어제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었다. 우리 집에는 수능 보는 고3 학생이 없는데도, 수능일이 가까워지면 늘 매사 긴장이 된다.
아마 자녀를 둔 우리나라 부모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나도 매년 수능일이 가까워지면 수험생 엄마 마음이 된다. 올해는 함께 글 쓰는 지인의 자녀들이 수능시험을 많이 보는 해이기에 나까지 더 긴장되었다.
우리 집은 큰아들은 수시에 합격하여 수능을 보지 않았다. 둘째 아들은 수능 시험을 봤는데, 아직도 수능 보던 그 날이 얼마나 추웠는지가 기억날 정도다.
그날 오후, 아들이 수능 시험을 치던 고등학교 교문 밖에서 떨면서 아들이 나오길 기다렸던 생각이 난다. 올해 수능 날인 어제(11월 14일)는 다행히도 예전만큼 춥지 않아서 수험생들이 덜 떨었을 것 같다.
나는 시인이기에 수능 시험날이면 학생들이 쓰는 '수능 필적 확인 문구'가 가장 궁금하다. 올해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답안지에 실린 필적 확인 문구는 곽의영 시인의 '하나뿐인 예쁜 딸아' 중 한 구절인 "저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쳐라"였다고 한다.
필적 확인 문구는 2004년 치러진 2005학년도 수능에서 대규모 부정행위가 발생하자, 대리 시험을 막기 위해 이듬해부터 도입됐다고 한다. 수험생들은 이 문구를 매 과목 답안지에 컴퓨터 사인펜을 사용해 정자로 따라 적어 넣어야 한다.
국내 작가의 문학 작품 가운데 적절한 문구를 수능 출제 위원들이 골라서 투표를 통해 결정된다는데, 작품은 일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단다. 필적을 확인 가능하도록 ㄹ이나 ㅁ 등 자음이 포함돼야 한다고.
한편 지금까지 필적 확인 문구로 가장 많이 인용된 작가는 시인 정지용으로, 그의 작품 '향수'에서 3차례나 필적 확인 문구가 인용됐다. 다음은 '역대 수능 필적 확인 문구'들이다.
'저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쳐라' (2025학년도 수능, 곽의영 '하나뿐인 예쁜 딸아')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2024학년도 수능, 양광모 '가장 넓은 길')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2023학년도 수능, 한용운 '나의 꿈')
'넓은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며' (2022학년도 수능, 이해인 '작은 노래2')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 (2021학년도 수능, 나태주 '들 길을 걸으며')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 (2020학년도 수능, 박두진 '별밭에 누워')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2019학년도 수능, 김남조 '편지')
'큰 바다 넓은 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 (2018학년도 수능, 김영랑 '바다로 가자')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 (2017학년도 수능, 정지용 '향수')
'넓음과 깊음을 가슴에 채우며' (2016학년도 수능, 주요한 '청년이여 노래하라')
'햇살도 둥글둥글하게 뭉치는 맑은 날' (2015학년도 수능, 문태주 '돌의 배')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2014학년도 수능, 박정만 '작은 연가')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이며' (2013학년도 수능, 정한모 '가을에')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2012학년도 수능, 황동규 '즐거운 편지')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고 넓어진다' (2011학년도 수능, 정채봉 '첫 마음')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2010학년도 수능, 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2009학년도 수능, 윤동주 '별 헤는 밤')
'손금에 맑은 강물이 흐르고' (2008학년도 수능, 윤동주 '소년')
'넓은 벌 동쪽 끝으로' (2007학년도 수능, 정지용 '향수')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 (2006학년도 수능, 정지용 '향수')
그동안 나왔던 문구를 한 번 써보고 싶었다. 자주 시를 필사하는데, 오늘은 수험생들처럼 컴퓨터 사인펜을 들고 써보았다.
우선 올해 문구를 써보고 그 뒤 내가 마음에 드는 문구를 수험생들 마음으로 따라 써보았는데, 왜인지 가슴이 떨렸다. '그냥 따라 쓰는 나도 이렇게 떨리는데 수험생들은 얼마나 떨렸을까?' 싶어 수험생들의 간절한 심정이 느껴졌다.
지난 2021학년도 수능에 출제된 문구는 내가 좋아하는 나태주 시인님 시라서 시 원문을 찾아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시다. 나도 시를 쓰기에, 언젠가 내가 쓴 시에서 '수능 필적 확인 문구'가 출제된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을 잘 마친 수험생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오늘은 나태주 시인의 <들길을 걸으며> 시를 필사했다.
들길을 걸으며/나태주
세상에 와 그대를 만난 건
내게 얼마나 행운이었나
그대 생각 내게 머물므로
나의 세상은 빛나는 세상이 됩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
그대 생각 내게 머물므로
나의 세상은 따뜻한 세상이 됩니다
어제도 들길을 걸으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들길을 걸으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어제 내 발에 밟힌 풀잎이
오늘 새롭게 일어나
바람에 떨고 있는 걸
나는 봅니다
나도 당신 발에 밟히면서
새로워지는 풀잎이면 합니다
당신 앞에 여리게 떠는
풀잎이면 합니다
수능을 위해 그동안 고생한 수험생들이 올해 필적 확인 문구처럼 '저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치기를' , 진심으로 응원한다. 이제는 가슴을 활짝 펴고, 친구들과 함께 남은 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잘 마무리하시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이 한 마디를 꼭 전해드리고 싶다.
"수험생 여러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