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열다
<일러두기>
동학농민혁명과 동학의병전쟁
동학농민혁명은 보국안민, 척왜양창의의 기치를 내건 반봉건 민주화운동의 1차 기포와 반외세 항일무장투쟁의 2차 기포로 구분한다. 물론 1차 기포에도 반외세가 있었으나, 반봉건이 더욱 강했으므로 동학농민혁명이라 칭해야 맞다. 그리고 2차 기포는 반봉건이 아니라 순전 반외세의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한 동학의병전쟁이었다.
1892~1893년 수운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을 바탕으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고부기포에서 첫 출발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무장기포와 백산대회에서 동학연합군 성격의 동학농민혁명군으로 본격 출발한다. 이후 황토현 승전과 장성 황룡전투 승리에 이르고 마침내 호남의 수부(首府) 전주성 점령이라는 일대 쾌거를 이룬다.
동학농민혁명에 있어 최대 변수인 외세 개입과 청일전쟁이 시작되자 동학농민군과 조선관군은 전주화약을 체결하고 최초의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 집강소 설치에 의한 폐정개혁을 단행한다.
그러나 일본의 경복궁 침탈과 친일정권 수립 등 일본군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자 호남의 동학 의병들은 척왜창의의 기치를 들고 남원대회와 원평 논의를 거쳐, 태인을 출발 삼례에 이른다. 삼례에서 제2차 기포를 결행하였고, 논산에서 동학의병연합군을 결성한다.
동학 2세 교주 해월 최시형의 전국 기포령을 받은 동학창의군 대통령 손병희는 의병대장 전봉준과 함께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공주성을 앞두고 후퇴와 응전을 거듭하다가 한 많은 고개 우금티전투에서 크게 패한다.
한편 영동·영산, 서산·태안, 여산, 청주, 진천, 율곡, 산현, 하동, 진주, 남해, 사천, 하동고승당산, 충주, 홍천, 평산, 석현, 구월산, 장수산 전투 등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등의 우리나라 고을은 물론 강산의 계곡마다 봉우리마다 동학의병창의군은 최후까지 싸웠으나,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 앞에 무참히 쓰러졌다.
결국 전봉준 등 호남의 동학의병(東學義兵)의 주요 지도자가 체포되고, 최시형 선생과 손병희 통령의 보은 북실, 이방언 장군의 장흥 석대벌, 김석순 접주의 완주 대둔산 전투 등을 끝으로 2차 동학농민혁명 즉 동학의병전쟁은 30만여 명이 참여하였고, 3만여 명(최대 5만여 명)의 희생을 내고 좌절한다.(일부 학자들은 참여인원을 100만여 명, 희생 즉 순국의 인원을 30만여 명으로까지 본다).
녹두 전봉준, 그는 누구인가
(녹두 전봉준, 한 시대를 이끌고 백성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에 대해 짤막한 설명은, 봉준이 살다 간 일생이 태양과 같다면 마치 반딧불과 같은 내용으로 간소하다. 동학농민혁명의 전후에 있어서는 뒤의 글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겠지만 여기서는 혁명 이전에 전녹두에 대해 가벼운 소개로 갈음한다.)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의 처음 이름은 철로(鐵爐)이다. 봉준의 호(號)는 해몽(海夢)이며, 본관(本貫)은 천안(天安)이다. 봉준은 백제(百濟) 개국공신(開國功臣) 환성군(歡城君) 천안 전씨 시조 전섭(全聶)의 후손이며, 성인이 되었을 때 또 다른 이름은 명숙(明淑)이다.
전봉준은 1855년 전북 고창읍 죽림리 당촌(高敞邑 竹林里 堂村)에서 아버지 전창혁(全彰赫)과 어머니 언양 김씨(彦陽 金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봉준의 어린 시절 별명은 철로(鐵爐_쇠, 화로)라는 이름에서 따온 '쐬화로'로 불렸다. 그래서 그의 고향인 당촌마을 인근에서는 '골목대장 쐬화로'라는 꽤나 유명한 별명이 따라다녔다. 또 전봉준은 13세(1868년)에 백구시(白駒詩)를 지어 시문에도 능통한 기질을 발휘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은 청소년 시절부터 또 하나의 별명이 생겼다. 봉준의 특출한 외모에서 발상한 '녹두'라는 별칭으로 '전녹두(全綠豆)'라 불렸다. 봉준은 키와 체구가 작았으며, 얼굴이 둥글고 이마가 튀어나온 짱구로 영락없는 녹두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차돌처럼 야무지고 리더에 있어서 남다른 똑똑한 소년이었다.
녹두 전봉준의 눈빛은 좀체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곧고 빛이 났으며, 얼굴색은 깨끗하고 맑았다. 특히 눈썹이 누에나방 모양처럼 아름다웠다. 그의 표정을 보면, 매우 엄격하고 올곧으면서도 따뜻한 성정인 줄 대번에 느낄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봉준은 영웅호걸의 기상을 갖춘 작은 거인이었다. 또한 봉준은 한 시대를 이끌어가고,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 만한 위인(偉人)으로서 모자람이 없었다.
전봉준은 1890년 36세에 동학(東學)에 입도(入道)하였으며, 1892년 동학 2세 교주 최시형에 의하여 고부접주로 임명되었다.
동학접주로 활동하면서 1893년 서울로 올라가 흥선 대원군을 방문하여 시국을 논하는 자리에서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하여 대원군을 놀라게 하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전봉준은 갑오년(1894) 동학기포 전후(前後)에 태인(泰仁) 산외면(山外面) 동곡(東谷)에 거주지를 정하였으며, 또한 고부군(古阜郡) 조소리(鳥巢里)에서도 살았다.
봉준은 먹고 사는 일에는 약간의 농사일과 주로 선비로서 글을 가르치는 훈장(訓長)일을 하였다.
전봉준의 가족은 모두 6명이었다. 사별한 첫째 부인 여산 송씨가 낳은 딸 '옥례·성녀'와 재혼한 부인 남평 이씨(이순영)가 낳은 아들 '용규·용현'이다. 녹두는 어쩜 떠돌이 인생을 산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가정적이었으며, 자상한 아버지였다. 전봉준의 동학농민혁명 전후에 있었던 내용들은 앞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과 같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아프게 해대며 살았다. 친구들과 막대기를 하나 들고 호령하기 시작하면 세상을 압도하는 영웅이 되었다. 동학 격전지 김제 원평 부근 마을에서 태어난 탓도 있지만 세종대왕과 같은 문인보다는 우리가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을 더욱 흠모하면서 자란 전후(戰後) 세대이기 때문이다. 동학군의 무기 죽창,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대나무만 보면 나는 대숲을 서성였을 그 사람들의 눈빛을 떠올린다.
방황과 도전의 사나이 전봉준
(전녹두, 대체로 역사의 전면에 나설 때는 그럴만한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누구는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 선생이 고을 농민들의 억울함에 앞장서다 곤장을 맞아 비참하게 죽어 관료들에 대한 반감으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건 거대한 나무에서 나뭇잎 하나를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앞으로 전개되는 역사 이야기 속에 그 답이 있다는 것에 민족사와 인류사에 큰 획을 그은 동학농민혁명의 총대장에 대한 그 출발점을 꼼꼼히 살펴보자.)
조선,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여 백성들이 아우성칠 때, 방황과 도전의 기로에 서게 된 사나이가 있었다. 체구는 작았지만 차돌처럼 강했으며, 유난히 눈빛이 강렬한 작은 거인 녹두 전봉준이었다.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고 하였다. 그는 영웅의 기질을 감추고 시국을 관망하면서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봉준은 가족을 지극히 사랑하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일찍이 사별한 송씨 부인의 묘소에 자식들의 손을 잡고 찾아가 눈물을 삼키곤 하였다. 깊은 밤 홀로 사색에 잠기면 호롱불 앞에서 날을 새며 한숨을 몰아쉬는 날도 많았다. 그런 그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거대한 역사의 해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봉준이 나서는 게 아니라, 시대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녹두는 선비로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훈장직을 본업으로 삼아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다. 여러 방면의 서책을 두루 읽은 덕분으로 풍수에 밝아 묫자리를 잡아 주기도 하고, 잔병치레를 하는 사람에게 침도 놓아주었다. 때로는 지인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시국을 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길을 떠나면 몇 달 만에 돌아오곤 하였다. 마치 바람의 사나이처럼 나타났다가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진다.
녹두는 인적이 끊긴 밤이면 슬그머니 집을 나섰다가 새벽닭이 울기 직전에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한번 마음을 통한 사람이면 흉허물을 터놓고 의기투합하며, 서로의 관계를 그물처럼 엮어 하나가 되게 했다. 야망을 품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고독한 밤길을 걷던 녹두 전봉준, 그가 이제 서서히 자신을 세상을 드러내면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녹두의 운명은 개인의 운명이 아니다. 나라의 운명이, 세상의 운명이 그의 가슴속에 파고들고 있었다.
누구나 개인 홀로 살아가기도 힘든, 아니 그때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도 벅찬 탐관오리가 판치는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세상이었다. 그런데 녹두는 달랐다. 백성의 아픔이 자신의 살과 뼈에 파고들고, 인민의 배고픔이 자신의 목을 졸여오는 느낌이었다. 더구나 외세들이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고 있다는 것에 백성의 한사람으로서 그들과 맞설 그런 기회를 동학에서 찾고 찾고 있었다.
전녹두, 그는 서당 훈장이나 하면서 살았을 한 집안의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가 대혁명, 대전쟁의 총대장이 된 사연은 간단하다. 동학접주로서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만민평등의 세상을 이뤄달라는 인민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척왜양창의 자주독립국가의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민족의 부름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정의의 칼을 뽑았던 것이다.
무당들이 설치는 어두운 시국
조선왕조에 참으로 민망한 큰 사건이 하나 등장한다. 고종왕의 부인 민왕후(민자영)와 얽힌 기가 막힌 이야기다. 민왕후는 권력다툼에서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위급한 상황을 겪은 적도 있었다. 한때 민왕후에게 닥친 위기를 관상과 점술로 모면하게 해줬다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진령군(眞靈君)이라는 거창한 벼슬까지 한 무녀(巫女)이다. 지금이나 예나 정치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지만 백성들에게는 국정농단과 매관매직이라는 망국적인 현상으로 보였던 것이다. 진령군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 한편 분량도 넘겠지만 여기서는 간단하게 소개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 때는 임오군란이 일어난 국난의 시기였다. 민왕후는 목숨이 위태로운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면서 충주로 도망갔다. 그 곳에서 민왕후는 점술이 용하다는 무당을 한명 만나게 된다.
그 무당은 민왕후의 병도 고쳐 주었으며, 민왕후는 그를 더욱 믿게 되었다. 또한 그녀에게 진령군(眞靈君 진령대군)이라는 칭호까지 내려 주었다. 진령군은 성균관 북쪽에 국가 돈으로 사당을 지었다. 그렇게 되자 진령군에게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진령군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도 조정의 실세가 되었다. 조정의 관리들은 진령군에게 연줄대기가 바빴으며, 그에게는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권세가로 대단한 위치에 올라섰다. 진령군과 아들의 횡포로 국고가 거덜 났지만 민왕후는 여전히 진령군을 신뢰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고종 실록 32권)에도 진령군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과히 그녀의 권세와 국정농단은 하늘을 찌로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양심 있는 선비들의 상소문에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이 세상 사람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한다'는 내용과 함께 10여 년간 세도를 부리며 '세상을 뒤흔든 진령군의 목을 베라'고 통렬히 규탄하였다.
또 강직한 선비들이 앞다투어 무녀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도승지는 감히 고종에게 올리지 못하고 먼지만 쌓여갔다. 또한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 사람들은 어처구니없게 귀양살이가 기다리고 있었으며, 누구나 무서워서 말도 꺼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진령군의 권세도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시점에서 무너지고 만다. 역사의 아이러니 즉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부조화라고 말할까,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내각을 구성하면서, 진령군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고 결국 삭탈관직 되어 쫓겨나 숨어 살았다고 한다.
조선왕조가 어찌나 허술하였는지, 진짜 어처구니없는 것은 민왕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후에 고종은 진령군에 대한 탄핵 상소문을 그때서야 봤다고 한다. 이후 진령군은 1896년 8월쯤에 삼청동 산골에 숨어 살다 죽었다고 한다. 진령군 이야기는 국정운영과 정치권에서 길이 잊지 말아야 하는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그와 같은 일들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해야 된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