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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92년 원주교도소 복역중인 임종석씨에게 김소희씨가 편지를 띄우면서. 이후 서신왕래를 꾸준히 해오다 93년 임씨가 출옥한 후 비로소 첫 대면을 한 이들은 96년 결혼해 이듬해 딸 동아를 낳았다.

그리고 이 편지는 지금은 임종석씨의 아내가 된 김소희씨가 옥중으로 보낸 편지중 가장 길었던 연애편지 전문이다.


며칠 몸살을 앓았습니다.
첫번째는 새정부의 구상을 떠드는 TV를 외면하면서.. 그 두번째는 내가 쓰겠다는 책의 목적과 창조되어질 무엇인가가 잡히지 않아서.
'대학시절' 이라는 책을 읽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내가 쓰고자 하는 책에서 나는 인간의, 또는 행위의 정형을 찾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호기심만 부추기려는 것일까. '대학시절' 을 읽고 느낀 감동의 무게만큼 나는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내일은 부산엘 다녀오려고 합니다. 아직까지는 마음이 밝아지지 않습니다.
형 거기서는 '대학시절' 이라는 책을 읽을 수 있는지요. 형도 읽고나면 그 감동과 함께 찾아오는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을 텐데요.. 참, '윌리..' 는 찾았나요?


대전으로 해서 부산엘 갔습니다.
"부산은 수원보다는 좀더 따뜻하겠지". 싶은 마음에 블라우스에 가디건, 마의하나 입고 갔더니 웬걸요. 춥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올 겨울 추위가 맵다더니 그런가 봅니다.
형께 '정리' 의 부분을 속도있게 보내드리려 했는데 요즘 한겨레신문 박재동씨의 만평처럼 가슴이 휑하니 뚫려 나의 '정리' 를 마저하지 못했습니다. 가슴앓이가 사실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거든요.
형. '정리' 대신에 오늘은 저와 함께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자구요.

겨울바다 본지 오래됐지요?
찬 바람, 찬 파도소리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들. 조용한 걸음걸음…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어떻게 지금 부산쪽으로 갈 생각을 했느냐구요. 자기는 부산쪽, 경상도쪽은 돌아보고 싶지도 않다구요. 지금같아선!.
사실. 해운대 들어서다 '국민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라도 붙어있는 민주당 김대중 후보 명의의 벽보를 보면서 상처가 도지듯 다시 우울해지기도 했지요.


드디어 부산의 해운대 바다 간날.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날.
전날 보고싶던 선배와 동료(전국대학기자 활동때부터 알고 지낸) 들을 만나 한참을 이야기한 후 언니네서 잠. 조카와 언니, 형부 또다른 조카들, 그리고 나와 함께 간 친구가 떡과 술을 놓고 위로함. 술은 처음 마셔본 '마주앙' 이었음.
형부는 나와 내친구를 앉혀놓고 언젠가처럼 '요즘' 의 학생운동과 형부가 주장하시는 지역운동, 운동의 대중화, 프로페셔널한(?) 운동에 대해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한수 배우기도 하면서 새벽 3시까지 토론하심. 예전에 비해 '피곤한' 관계로 토론이 일찍 끝남. 이 분위기에 익숙치 않다는 내 친구가 피곤해서인지 먼저 잠이 듦.

나는 요즘의 학생들은 교수를 찾아오지 않는다는 형부에게 소극적인 학습자세를 비판하는 교수님께,"나의 꿈은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 같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의 꿈은 나의 제자들을 김정호로 키워내는 것이다" 라고 밝힌 한 지질학과 교수의 이야기를 전했다.
형부는 참 좋은 분이시다. 마흔이 넘은 어른의 세대차이를 느끼지 않게 해주신다. 잠자지 않고 소근대고 있던 조카들과 좀더 얘길나눈 후 4시반쯤 잠에 떨어졌다.

언니와 아침을 차렸다. 미리 형부가 장을 봐두었다며 시장의 아줌마들한테 인기가 높다는 형부의 자화자찬을 기쁘게 들으며 형부가 준비하신 오징어 젓, 오징어 포, 물오징어를 맛있게 먹었다.
경제학자의 경제적인 식단이었다. 식사후에 다들 다시 둘러모여 다과를 먹으며 하루계획을 얘기했다. 언니와 형부는 모처럼 부부끼리 배드민턴을 들고 산에 간다 하고, 막내조카는 친구와 예약된 스케쥴이 있단다.
첫째, 둘째 조카와 나와 내친구는 부산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영화도 보고, 바다도 보고, 회도 먹고…
동지로서의 가족에 대해 얘기함. 우리 조카들은 행복한 조건속에 살고 있다.


돈 때문에 하루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4명이 움직이려니 여간 부담스러운게 아니다. 우선 바다로 가자. 바다다. 꽤 춥다. 우리는 몰려다니지 않고 각각 바다를 감상하기로 했다.

바닷물과 모래사장이 만나는 선을따라 느릿느릿 걸으면서 이것저것 떠올렸다.
- 지금의 나의 무력감, 가을앓이
- Why? How? What?…..


그리고 구경했다. 바다를. 사람들을.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한 사람들을.
그러다가 이 바다를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람들도 생각났다. 다만 한사람에게 만이라도 내가 이 바다의 모습을 전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자꾸 바다를 찍었다. 소리마저 찍을 수 없는게 애석했다. 정말로. 친구에게 핀잔을 들었다. 쓸데없는 것만 찍는다고. 아니야. 중요한 일이야.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계속 찍어댔다. 친구도 이젠 그러려니한다.

모래사장에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을 쓰려했는데 완성하기도 전에 파도가 지워버렸다. 오늘은 파도가 세다. 내 느낌일까?
친구는 이 겨울에 조개를 찾아보겠다며 놀고, 조카들은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저만큼 앞에서 나란히 걷고 있다.

"처얼썩 철썩 척 쏴아…" 국어교과서에서 배운 '소년' 이라는 시에서 외웠던가.
조카에게 얻어 목에 감은 목도리가 아니었다면 울어버렸을지도 모를 추위. 그래도 모두 폼잡고 거닌다. 혼자 외롭게 거니는 사람보다는 둘씩, 셋씩 짝을 갖고 있다. 외로운 사람만 찾는게 아닌가 보다. 겨울바다가.

사실 난 목이 파인 얇은 블라우스 때문에 창피를 무릅쓰고 빨간 목도리를 머리부터 얼굴까지 칭칭감았다. 조카들이 이모가 아줌마 같다고 한다. 친구도 촌스럽다고 뭐라하더니 배외에서 느끼는 바닷바람이 매서운 걸 알았는지 나를 따라한다.
배가 오륙도를 돌아 되돌아 올때는 아예 추운 배 난간에서 감상하기를 포기한 채 객실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나만. 모두 '소녀다운' 감성을 가진 탓인지 그대로 저녁놀까지 구경하겠단다.
좀 창피한 기분도 들었지만 아무 감상도 할 수 없게 추운데 괜히 너스레를 부릴 필요가 있겠는가. 부산은 따뜻할 거라고 믿었던 내가 잠깐 바보처럼 느껴졌던 선착장에서 오뎅을 팔던 아주머니가 그러셨다. 부산엔 오늘이 제일 춥다고. 그래서 배의 손님도 적다고.

객실은 배의 지항 해당되는 곳으로 바닷물이 무지 가깝게 다가온다. 저녁때가 되어서인지 노을 빛 때문인지 바다와 주변 섬, 산의 경계가 더 뚜렷하다. 군데군데 켜진 불빛이 마치 햇새벽의 한점 불꽃, 아니 샛별같다. 선착장이 가까워지자 색색의 불빛이 "이제부터 속세입니다" 라고 하는 듯 화려하게 마중한다.


배에서 내리자 좀 훈훈해졌다. 여유를 찾았다. 함께 갔던 친구 은희는 뱃길이 짧아 아쉽다며 이 바다를 수원에 옮겨놓고 싶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별로 예쁘지도 않은 돌맹이도 소중한 물건다루듯 종이에 싸 주머니에 넣었다. 은희는 우리둘이 결혼해 계속 이런식으로 여행하잖다. 세상에나….


다음 일정을 의논했다.
아쉽게도 내일 약속 때문에 오늘 밤차표를 끊어두었다. 밤 11시 50분까지는 부산역에 가야한다. 회를 먹으려 했는데 (바닷가에 온 만큼) 우리가 먹을만큼의 분량이면 최소한 4만원은 주어야 했다. 결국 언니네 집을 나올 때 언니가 전망좋은 곳이라며 가보라던 '언덕위의 집' 에서 피자를 먹기로했다.
바다에서 피자라니.
영 어울리지 않는다만 가장 경제적인 식사이기에 전망좋은 '언덕위의 집' 에서 콤비네이션 피자와 후식으로 커피, 아이스크림, 콜라, 코코아를 각각시켜 먹었다.
난 은희의 아이스크림을 한조각 얻어 내 커피에 넣은 뒤 "이게 바로 비엔나커피야" 하면서 마셨다. 은희가 장난으로 세림의 콜라에 아이스크림을 넣어 '비엔나 콜라' 라고 하자 세림이는 정말로 믿는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나의 조카 혜림이, 세림이와 섭섭하게 인사한 후 언니에게 주려고 책을 한권 사서 보냈다.
김영희씨의 "아이를 잘 만다는 여자".
눈물많은 우리언니는 이 책을 보면서 또 눈물꽤나 흘리겠지. 역전에 도착하자 9시반이다.
'쉘부르의 우산' 이라는 카페에 들어갔는데 크리스마스이브라서인지 자리가 없다. 몇군데 다녔지만 마찬가지다. 할 수 없이 만화가게로 쭈삣거리며 들어갔다. 몇 년만의 출입인가. 13권짜리를 빌렸는데 끝에는 내용은 보지도 못한 채 그림으로만 넘겼다.

지하도를 건너 역광장을 지나 힘껏 뛰어갔다. 5분전. 그래도 화장실에 들려야겠기에… 다시 뛰어 오늘의 막차를 잡아탔다. 자리에 앉고서야 한숨 돌렸다. 새벽에 서울에 도착하면 우리 둘의 약속장소로 가기전까지 남대문 새벽시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28일.
형.
비가 조금씩 내립니다. 어제,오늘 이틀째말이지요.
책상앞에 앉아 창밖을 보면. 앞을 다 떨구어 낸 단풍나무가 보여요. 꼭 매화가 피기전 몽우리져 있는 것처럼 나뭇가지마다 빗방울이 알알이 매달려 있어요. 그냥 물방울이다 싶기도 하고, 더 예쁘게 봐주자면 보석같기도 하지요.
빗방울은 가끔씩 톡톡 소리를 내면서 떨어집니다. 내방 창문으로 본 오늘 아침의 바깥세상입니다.

어제.
형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제까지 내가 몇번째까지 편지를 보냈더라, 8번인가, 10번인가, 가물가물해지고..
도대체 형이 받아나 보았는지 궁금하던 차에 받은 편지라 윤활제가 된 것도 같습니다. 형의 대선평가가 다시 대오를 정비해 힘을 내자는 위로 같은데, 왜 아직도 나는 힘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25일 임수경 학우와 문규현 신부님이 나오셨더군요.
연로하신 우리 한신의 선배 문익환 목사님은, 또 형을 비롯한 많은 양심수들은 또다시 다른 '기념할 만한' 날을 기다려야 하는가요?


제가 아는한 해직교사께서 그런 말을 전하며 눈물을 감추려 애쓰시더군요. 선거가 끝나 개표로 판가름이 정해진 날이었지요. 수원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에서 그 선생님께 "당신은 한 가정의 가장아닙니까. 이제 되지도 않을 복직을 기다리지 말고 전직을 하시지요" 다른 직업을 택하라는 의미지요.

그러나, 형
저역시 마냥 이러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며칠을 앓았는데… 이제 움직여야지요. 휑하니 뚫린 마음도 치유해야겠구요. 대선기간 중 함께 일했던 선배, 동료도 이젠 만나봐야지요.

운동권을 위로하는 자족적인 평가보다는 우리에겐 냉혹해도..대중의 눈으로 평가하자고 권하고 싶어요. 우리의 평가가 너무 관성적으로 진행되어 온 것 같아서요.
87년 대선, 92년 총선, 그리고 다시 대선에 이르기까지. 이제까지 너무 안일한 틀을 벗어나지 못한 평가도 만족해 온 것 같아서요.


형.
'ESC' 아세요? 탈출기호잖아요.
컴퓨터에서의 기계에도 실수나 오류를 범했을 때 그로부터 벗어나는 탈출명령어가 있는데 내가 기계만도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다면 안되겠지요.

형도. 그 어느 '기념될 만한' 날을 기다리고 있지 마셔요.
그들이 선심으로 던져준 혜택이 아닌 우리가 우리 손으로 찾아내는 성과이어야지요. 맞아요. 형은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텐데, 공연한 노파심이지요.
별걸 다 걱정했네요.

형. 죄송해요.
한꺼번에 보내려니 너무 부피가 크네요. 아니, 사실은 좀더 힘을 내서 마무리에 +알파를 더하고 싶은데 아직 그 알파 분을 정리해내지 못했어요. 빨리 슬럼프를 벗어나 마저하도록 시동을 걸겠습니다.

혹여라도 한참후에라도 답장을 하신다면 제가 지금까지 몇번의 편지를 보냈는지 좀 알려주세요. 까먹었거든요. 밖에 있는 사람은 그게 궁금해요. 번호를 일부러 써보내는 건 받아보는 사람에게 잘 전달되는지 알게하는 신호같기도 해서… 이거 참, 의심이 많은 건가.
화이팅.
몸도 마음도 건강하시구요.

김소희. 1992.12.28


* 지금의 나의 아내, 동아 엄마 소희의 편지.
파란, 빨간 색으로 빽빽하게 보내 준 편지를 읽으면서 눈은 좀 아팠지만..
후배의 고민을 함께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더 아팠다.


선,후배로 그렇게 몇통의 편지가 오갔더라.
창살 밖에서 만난 사랑, 소희
이렇게 건조(?)한 편지가 중개자가 될 줄이야..

[1999.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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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은 남자. 산소같은 미소가 아름답다. 공희정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기자단 단장을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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