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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복과 중국 정치지도자

1998년말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장주석은 일본 천황이 주최한 만찬에서 일본인들이 보기에는 무례한(?) 행동을 연발해 많은 일본 우익들의 분노를 샀다.

그 대표적인 일 중 하나는 일본 천황과 정부 고위인사들을 면전에 두고 일본의 과거 침략행위를 비판하면서 일본인들의 반성을 촉구해 만찬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든 것.

다른 하나는 일본인들 눈에 보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만찬의복인 중국의 중산복(中山服)을 입고 나와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천황을 무시한다고 여긴 것이었다.

만찬 이전부터 장주석이 일본의 과거 만행을 언급할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예견이 된 일이었다. 장주석은 근래 대등해져 가는 자신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일본 방문시 이루어진 양국간의 공동코뮤니케에도 서명을 하지 않을 만큼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시종일관 비난했었다.

여기에는 일본과 대만의 관계 접근을 차단하고,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국제적으로 환기시키는 역할도 작용한 것이었기에 우리 한국인의 입장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될만한 사항이었다.

헌데 중산복을 입고 나온 파격은 만찬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예상을 못 했던 일이라 일본인들의 반감을 더욱 샀던 것이다. 사실 장주석이 중국에서는 최고의 예복(禮服)이라 할 수 있는 중산복을 입고 나온 것은 이미 중-일 양국 간에 외교적으로 사전 합의간 된 사항이었다. 단지 중국의 문화를 이해 못하는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남루하고 촌수로와 보이는 이 의상이 눈에 거슬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허나 중국에서 현재 중산복을 입고 공식회의석상이나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인원은 오직 두 사람 밖이 없다. 바로 장주석과 후진타오(胡錦濤, 57) 국가 부주석뿐이다.

4세대 정치지도자의 선두 후진타오

50대의 젊은 지도자 후진타오 부주석은 중국공산당이 오랫동안 단련시킨 중국의 '준비된 지도자'이다. 그는 작년 9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15기 4중전회에서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취임함으로써 권력의 정상에 한 발짝 다가섰다.

공산당 중앙군사위의 주석 자리는 당총서기직과 더불어 중국의 권력을 쥐는 양대 핵심자리로, 덩샤오핑(鄧小平)이 장주석에게 가장 늦게 물려주었을 만큼 요직 중의 요직이다. 이런 직위를 후부주석이 차지하게 됨으로써 포스트 장을 위한 권력 투쟁에 있어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후 부주석이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것은 이제 새삼스런 뉴스거리가 아니다. 그는 이미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7인(장쩌민, 주롱지, 리펑, 리루이환, 후진타오, 웨이지엔싱, 리란칭)의 상무위원 중 한 명으로서 공식 당서열 5위이며, 중국 국가부주석, 공산당 중앙군사위 부주석, 중앙당교 교장 등을 겸직하고 있는 실세 중의 실세다.

다른 차세대 지도자들보다 중량 있는 직위들을 스스로 '쟁취'했고, 기반이 없었던 군부 내의 직위까지 얻어 권력을 더욱 공고화하는 중에 있다.

이런 그가 2003년에 있는 공산당 제16기 당대회와 이어 열릴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이나 당총서기직을 맡은 것이라는 중국 안팎의 예상보도는 결코 허언이 아니다. 최근에서 후 부주석은 장주석 외에 그 누구도 입지 못하는 중산복을 입고 공식 행사장에 등장하거나 외빈을 접견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년 5월 장 주석을 대신해 5·4운동 80주년 기념 연설을 했고, 나토가 유고주재 중국대사관 폭격했을 당시 TV에 등장해 중국정부의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장 주석은 작년 7월에도 오부치 게이조 일본 전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차세대 후계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후 부주석이 나보다 16살이나 젊다"고 말해, 외국언론에서는 장 주석이 후 부주석을 후계자로 공인한 것으로 해석했다.

중국 공산당의 연경화 정책

이전까지 70대의 노인들이 판을 치는 중국의 정치판에 한참 정력적으로 일할 50대의 당정 실무진들은 드물었던 사실이었다. 90년대 후반 덩샤오핑의 사망 이전까지 8노(八老)라고 불리는 정치 원로들이 막후에서 중국 정치를 주무르면서, 종종 현 지도부를 능가하는 파워를 과시했었다.

하지만 공산당 혁명원로가 거의 사라진 지금에는 오히려 신시엔시에예(新鮮血液)라 불리는 젊은 지도자군(群)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의 인식과 다른 이면에는 중국공산당의 전통적인 정책과 연관이 깊다.

1949년 신중국이라 공산주의정권이 등장한 이래 중국은 년대마다 새로운 정치지도자들을 등장시켜 왔다. 50년대 경제기초 건설의 기둥 리우샤오치(劉少奇), 덩샤오핑과 60년대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을 혼란에 빠뜨렸던 4인방의 한 사람 왕홍원(王洪文), 70년대 후반 마오쩌동 사망후 후계자로 권력을 잡았었던 화궈펑(華國鋒), 80년대 들어 연이어 공산당 총서기직을 맡았던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즈양(趙紫陽), 장쩌민이 바로 그들.

당시 세간의 예측을 뒤엎고 권력 2인자의 오른 이들은 1인자에게 선택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지금의 장주석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인 격변에 의해 중간에 팽(烹)당한 의미심장한 대목 또한 존재한다.

어쨌든 중국공산당은 덩샤오핑이 당정의 권력을 잡은 78년 12월 제11기 3중전회에 10여년 문화대혁명의 참화를 수습하고 개혁개방을 이끌어나갈 신진 인사의 등용을 적극 주창하였다. 이에 따라 당·정·군에서의 대대적인 연경화(年輕化) 정책에 의해서 수많은 젊은 피들은 수혈하여, 각 분야에 잠복하고 있었던 문혁(文革)의 극좌파와 무능한 인사들을 몰아내고 개혁을 순조롭게 추진할 수 있었다.

또한 1989년 6.4 티엔안먼(天安門)사태 이후의 정치·외교적 어려움을 장쩌민, 리루이환(李瑞環), 딩관건(丁關根) 등과 같은 신진인사의 기용하면서 정국을 정면 돌파하는 용단을 내리면서, 중국 당정에 있어 40~50대의 젊은 지도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게 된다.

곳곳에 잠복해 있는 정치 신시엔시에예들

지금 중국 전역과 각 분야에 흩어져 있는 신진들의 급부상은 이와 같이 연속성있는 공산당의 정책과 95년에 이루어진 내부 결정에 영향이 깊다. 당시 당 중앙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내려보낸 통달(通達)을 통해서 "인민정부 성장, 시장, 국장과 각급 당위원회 서기로 키울 수 있는 후보자의 3분지 1을 40대 이하에서 키우라"고 지시하여, 전국적으로 정치 지도자의 연경화를 촉발하게 한 것이었다.

현재 중국 인민들에게도 잘 알려진 대부분의 제4세대 지도자들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중앙무대에 진출하거나 지방정부의 성장을 맡아 행정실무를 쌓은 사람들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현 중국 국가부주석 후진타오인 것이다.

1942년 안후이(安徽)성 태생으로 명문 칭화(淸華)대학 수력공정학과를 졸업한 테크노크라트(전문기술관료) 출신인 후 부주석은 이미 80년대 간쑤(甘肅)성과 시장(西藏, 티베트)자치구 당서기를 맡으면서 열성적으로 당방침을 수행하였고 강력한 조직장악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88년 티베트 라샤에서 일어난 반중국-독립 시위에서 직접 철모를 쓰고 진압한 후, 적극적인 티베트인 제일주의로 민심을 수습한 경력이 있다. 그 후 중국 최고지도자들의 눈에 들어 오늘과 같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지만, 신사(gentle)와 같은 인상과 언제나 윗사람에 복종하는 듯 하는(yes man) 외면의 모습과는 달리 엄격함과 치밀함을 갖춘 인물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후 부주석 외에 거론할 수 있는 차세대 지도자로는 국무원 농업담당 부총리 원지아바오(溫家寶), 공업담당 부총리 우방궈(吳邦國), 당 중앙서기처 서기 쩡칭홍(曾慶紅), 건설부장 위정성(兪正聲), 베이징(北京)시당위 서기 지아칭린(賈慶林), 상하이(上海)시당위 황쥐(黃菊), 광동(廣東)성장 겸 당위 서기 리창춘(李長春), 라오닝(遼寧)성 따리엔(大連)시장 보시라이(薄熙來)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작년 말부터 대대적인 수사에 들어간 푸지엔(福建)성 시아먼(廈門)시의 대규모 밀수사건에 자신의 부인이 연루되어 곤혹을 치르고 있는 지아칭린 서기를 제외하고는 언제 정치적 실권을 잡을지 예측하기 심든 젊은 뉴파워(New Political Power)들이다.

원지아바오-우방궈-쩡칭홍

98년 장강(長江) 대홍수시 현장을 진두지휘하면서 국난을 극복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원지아바오 부총리는, 10년 가까이 당중앙 판공실 주임으로 후야오방-자오즈양-장쩌민 3명의 지도자를 모신 탁월한 수완을 보여주었다.

후 부주석과 동갑으로 티엔진(天津) 출신인 원 부총리는 명석한 두뇌와 친화적인 인간관계, 정치색이 옅은 테크노크라트로, 똑부러지는 일처리를 하는 개혁파이다. 만약 그가 중국의 현안 중에 하나인 농업생산성의 향상과 도농간의 생활격차를 해소한다면 유력한 차기 국무원 총리로 떠오를 가능성이 유력하다.

현재 중국이 안고 있는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인 국유기업과 금융 개혁을 떠맡아 처리하고 있는 우방궈 부총리는 차차기 총리가 유력한 인사이다. 1941년 안후이(安徽)태생으로 장쩌민-주롱지에 이어 상하이 당위서기를 거친 그는 장주석이 당 내외의 비난을 무릅쓰고 중앙정치무대에 불러왔을 정도로 업무수행 능력을 인정받은 '상하이방' 출신이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서민적인 지도자로 이름난 그가 중국의 현안을 무난히 해결한다면 예상외로 빨리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여지가 있다.

얼마전 한국을 다녀간 쩡칭홍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중앙 정치무대의 실권자 중 하나다. 1939년 쟝시(江西)성 출신인 쩡서기는 부모가 모두 당정 고위직을 지낸 공산당 혁명원로로, 이른바 '타이즈(太子)당'의 일원으로 꼽히면서 거대한 꽌시망(인적 네트워크, 關係網)를 가지고 있다.

중국 정가에 '꾀주머니'로 통할만큼 지략이 뛰어난 그는 1989년 장주석과 함께 베이징에 입성하여 그의 곁에서 출세가도를 달려올 만큼 장주석의 총애를 받으면서 성장했다. 이제 참모의 위치에서 당의 인사권을 지닌 직위를 오른 그가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면, 후부주석의 차기 공산당 총서기직 승계에 가장 강력한 경쟁자를 떠오를 가망성이 크다.

리창춘-위정성-보시라이

2년전 장주석이 중국 최대의 경제지구 광동에 내려보낸 자신의 심복 리창춘 성장은 또한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중국의 정치판에 있는 막강한 다크호스라 할 수 있다.

1944년 라오닝성 출신으로 직무상에 있어 장주석과 별다른 인연을 없던 그는 '그릇이 큰 인물'이라는 평가답게 강한 포용력을 발휘하여 중앙정부의 권력자들을 매료시킨 사람이다. 올해 2월 광동성을 직접 방문한 장주석은 그의 손을 직접 잡고 부정부패와 밀수 문제를 일소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킨 리성장의 업적에 깊은 만족을 표시했다.

자오즈양을 제외한 이전의 광동성장 출신들이 도약을 하지 못하고 중간의 날개가 꺾였지만, 앞으로 리성장이 광동성의 금융개혁과 산업의 고도화를 순조롭게 추진해나간다면 언제든 중앙무대에 화려하게 진출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1998년 일개 지방 지도자에서 국무원 건설부장으로 중앙무대에 진출에 성공한 위정성은 근래 들어 무섭게 떠오르는 젊은 피이다. 올해 55세의 그는 부모와 가족형제들이 모두 당정 고위간부를 역임한 명문가 출신이다.

90년대 전반 산둥(山東)성 옌타이(煙台) 칭다오(靑島) 시장을 맡아 두 도시를 모두 경제모범도시를 변모시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고, 우리 정부 관계자와 기업인들과도 깊은 교류를 맺은 인물이다. 이론과 실무를 이미 검증받은 그는 근래 들어 중국정부가 의욕을 가지고 추진중에 있는 '중국식 뉴딜정책'에서의 대규모 건설사업들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냐가 그의 등룡에 있어 관건이 될 것이다.

지방도시 지도자 중 중국 인민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보시라이 따리엔 시장은 10년 후 중국을 이끌어나갈 대표적인 지도자이다. 과거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원로 보이보(薄一波)의 차남으로 타이즈당에 속하나, 아버지의 후광을 포기하고 자수성가한 인물로 유명하다.

올해 51세로 제5세대로 분류되는 그룹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지만, 언제나 신선한 아이디어와 높은 인품, 신사적인 행동으로 따리엔을 전국에서 가장 쾌적하고 환경이 맑은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었다. 도시발전의 새로운 규범은 세운 그는 중국 내에선 보기 힘든 라오바이싱(일반 민중, 老百姓)에게 만족도가 높은 미래의 총리감으로 꼽히고 있다.

인적 네트워크망을 쌓아두어야

위에 열거한 대표적인 정치지도자 외에 현재 중국 전역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방면에 무수히 많은 신진 인사들이 자웅을 겨루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중국은 공산주의정권 건국 이후 대약진운동-반우파운동-문화대혁명-두 번의 티엔안먼사건 등의 정치적인 격변과 꽌시를 중시하는 중국 사회환경에 실망하여 뛰어난 인재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조국을 등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정책적이고 조직적인 신진 육성책을 꾸준히 추진해나간다면 이전의 피해와 부작용은 머지 않아 극복될 전망이다.

지금 중국 권력층에 산재해 있는 '타이즈당'의 일원들조차 무능력자들은 이미 상당수 도태된 상태고 현역으로 일하는 이들은 철저한 검증을 통해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비록 중국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부조리와 부패, 전형적인 꽌시문화가 일거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지만, 자신의 실력을 중시하는 정치문화의 정착은 21세기 미국과 유일하게 겨룰 수 있는 헤게모니 국가 중국의 정치 엘리트의 수준을 나날이 높여줄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수없이 이어진 치열한 경쟁 - 13억 인구의 중국 상황에서 지금의 자리에 오른 인재들의 생존능력을 생각해 보라 - 속에서 살아남은, 이 능력 있고 이론과 실무에 능하며 국제적인 감각이 익숙한 차세대 지도자들을 파악하고 이들과 얼마나 인적 네트워크망을 형성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상당한 중요한 과제이다.

남북정상회담을 얼마 안 남겨둔 한국에 있어 주변 4대강국과의 정치·외교적 신뢰 형성을 더욱 중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최대 무역·투자시장으로 등장하고 있는 중국의 존재를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넓은 중국 대륙, 13억 인구 속에 파묻혀 있는 인재들을 찾아내서 신뢰 관계를 쌓는 일은 미래를 대비한 최소한의 기초 안전판이다.

덧붙이는 글 | * 다음 기사 예고
- 2000년 4월 23
- 제 1 부  3편 - 'No'라 말할 수 있는 중국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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