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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동무가 무대에 올랐다. 두 동무의 가멸진 몸짓은 관중을 황홀케 했다.

평양교예단 교예배우 홍명조·최성남. 한 사람 위에 올라타 또 한 사람이 흥에 겨워 노니는 익살이 보는 이들의 웃음보를 간지럽혔다.

올라타 있음에도 전혀 밉지 않았다. 받쳐준 사람이 되레 더 넉넉한 표정이다. 한번 태워줬으니 이번엔 내 차례 따위의 천박한 속셈은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셈 자체가 끼어들 여지가 없을 만큼 `두 동무' 공연은 순수했다. 아니 순결했다.

우정은 물론 형제애의 이름마저 잃은 지 오래인 남녘의 강파른 이들에게 두 동무의 정겨운 풍경은 가슴을 뭉클케 했다. 기실 동무란 얼마나 살가운 배달말인가. 냉전이 무너진 오늘 동무란 말도 우리 사회에서 시민권을 되찾을 때가 되었다.

리미현·김순덕이 허공에 그린 쌍그네의 살뜰한 낭만과 더불어 두 동무의 열연에 슴벅이며 참던 눈물을 후두둑 쏟고 말았다. 공연이 끝나자 관중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에 손잡았다. 목메어 남과 북의 애국가 `우리의 소원'을 합창했다.

그리고 2000년 6월13일 오전 10시35분. 평양 순안공항.

김대중 그리고 김정일 두 정상이 만났다. 환하게 웃으며 남북 대표들이 두손 잡는 역사적 순간을 생방송으로 지켜본 이들의 콧잔등은 시큰했다. 그랬다. 우리는 형제였다.

하지만 무릇 모든 사회현상이 그러하듯 어둠의 세력도 있다. 이를테면 <조선일보>는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가 축제 분위기에 사로잡혀있다며 꾸짖었다. 들뜨는 습성이 좀 심하단다. “나사가 풀리듯 최면에 걸리듯”하다는 모멸 섞인 우려가 이어졌다.

<중앙일보>도 슬쩍 거들었다. “TV매체들이 쏟아내는 지나치게 극화되고 이벤트화한 홍보와 갑작스러운 대북 보도 방향의 변화 속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배제하고 냉철하게 사태를 지켜보아”야 한단다.

과연 그러한가. 어림없는 말이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고위간부들이 업수이여길 만큼 우리 민중들은 어리석지 않다. 오히려 최면에 걸려있는 쪽은 <조선일보>다. 냉철하게 사태를 지켜볼 당사자는 <중앙일보>다.

정작 정상회담이 열리자 갑작스레 새역사 창조 운운하는 수구신문들의 모습은 보기 민망스럽다. 표변하는 깜냥을 몰라서가 아니다. 언제나 `민족지'를 자처하며 맹목적으로 미국을 좇아 북을 `깡패국가'로 몰아친 우리 언론들이 아니던가. 국민의 눈·귀·입을 자처하며 결정적 고비마다 국민의 눈·귀·입을 막아오지 않았던가.

물론 남과 북은 불화도 있었다. 내전의 흉터가 덴데처럼 남아있다. 그러나 사람의 세계에서 티 없는 형제애는 없다. 북이 깡패국가가 아니라 형제국가라는 발상의 대전환이 절실하다. 반세기 동안 여론을 오도해온 수구언론들이 당장의 눈가림에서 벗어나 겸허히 반성할 때다. 민중을 상대로 오만 방자한 충고를 감히 늘어놓을 때가 아니다.

고 늦봄 문익환은 자신을 `소영웅주의자'로 몰아친 남쪽의 언론이 붉은 목도리로 보안법 혐의를 들씌우자 당당히 말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찬양하고 고무해야 한다.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을 부각해야 한다.

그렇다. 대한민국이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문화의 전통을 자주적으로 지켜왔다. 한국에 어두운 면이 있듯이 조선도 있다. 그러나 일단 접어두자. 하여 제안하고 싶다. 이제 우리 동무에게, 우리 형제에게, 서로 제 이름을 불러줄 때다. `북괴'에서 북한이 되기까지 실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북한이란 나라는 없다. 조선이란 본디 이름을 부를 때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동무가 세계의 무대에 올랐다. 두 동무가 멋진 한판을 놀 때다. 관중은, 아니 무대감독은 누구일까. 남과 북의 두 동무, 민중과 인민이다. 인민과 민중을 `상부'로 한 김정일·김대중 회담. 꺾자를 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조국과 시대의 부름에 값하기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 신문 6월 15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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