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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을 떠도는 넋들의 외침이 과연 어느 날에 그칠 수 있을까? 반 백년의 세월 동안 세월의 깊이도 모른 채 그네들은 한 줄기 가녀린 외침을 숨죽여 외치고 있을지 모른다. '나의 억울한 죽음에 자네들은 무얼 하고 있나?'

"이름없는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마"

지난 9일 일요일, 연일 폭염에 아스팔트마저 녹아 내릴 듯한 대구인근 경산시. 여러 대의 차량 행렬이 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목적지는 경산 평산동 '경산폐코발트광산'.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돼 학살당한 양민들의 '학살지'로 더욱 이름을 '떨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대략 추정되는 학살인원만해도 3천명을 헤아린다. 전쟁 발발 직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던 이들은 지난 50년 7월경에서부터 다음해 8월경까지 약 일년간 군용트럭에 하나 둘 실려와 세상을 등져야만 했다.

경산에 소재한 경산대 입구를 들어서 자동차를 내달릴수록 '장례식장 반대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간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얼마 전부터 '코발트광산' 주위에 장례식장이 들어서 '순례단'의 발걸음을 가끔씩 막는다는 말을 전해들은 것이 생각났다. 경산대총학생회와 이 지역주민들 `명의로 결사반대를 외치는 노란 현수막이 시선에 들어온다.

'죽어서도 시끄러운 소란에 휘말리시나'

흉물스럽게 버려진 두 건물이 순례객 맞이해

경산대 정문까지 잘 뻗은 도로를 달리다보면 경산대 정문이 보일 만 할 때쯤 우측으로 난 길로 들어서야 한다. 이제는 아스팔트길이 아니라 울퉁불퉁 모가 난 콘크리트 산길이다. 콘크리트 도로에 모가 선 바닥에 자동차 타이어가 '드르럭 드르럭'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나간다.

10여분 이리저리 굽어진 산길을 힘들여 올랐을까? 서서히 흉물스런 '폐건물'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80년대 들어섰던 안경공장입니다. 지금은 망해서 이렇게 버려지고 말았죠." 길을 안내 해주기 위해 동승한 경산시민모임의 한 회원이 답을 해주었다.

건립 당시엔 꽤 웅장한 자태를 뽐냈을 법한 두 채의 건물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 건물은 흰색으로, 나머지 한 곳은 주황색 벽돌로 마감을 해 색상이 뚜렷이 구분된다. 하지만 두 건물 모두 깨어진 유리창, 이리저리 버려진 건물의 잔해로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되었을 것이란 짐작은 같았다.

이 '안경공장'도 코발트광산과의 '슬픈 악연'에선 자유로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건물 건립 당시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작업을 하던 중 흙더미에 섞여 나온 '유골'더미에 포크레인 기사가 당황했다고 한다. 결국 작업을 마무리도 하기 전에 이 기사는 손을 털고 집으로 향했단다. 그나마 공사를 마치고 공장은 가동됐지만 그 후 몇 년 못 가 폐허가 되고 말았다.

'얼음굴 식당'

빨간 건물 옆, 나즈막히 내려앉은 폐광산 입구가 보였다. 노란색 암벽을 인위적으로 깎아내 입구를 만든 흔적이 보였다. 폐광산 입구 주변으론 아카시나무가 즐비해 있다. 하지만 폐광산 입구를 통해 곧바로 들어설 순 없다.

입구엔 은색의 페인트 자국이 조금도 벗겨지지 않은 쇠창살이 걸음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입구로 몇 발자국 다가설 때쯤 발목에 스며오는 냉기에 깜짝 놀랐다. 한여름엔 쉽게 접할 수 없는 시원한 바람이다.

"이곳에 유골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도 동굴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입니다. 유골의 훼손을 시원한 자연풍이 막아준 거죠."

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좋은 결과만을 낳은 것은 아니었다. 이곳엔 얼마 전까지 동네주민들이 만든 식당이 있었다고 한다.

'얼음굴 식당'
한동안 시원한 바람을 이용해 여름철 잠깐 이득을 본 모양이었다. 이곳엔 아직도 비닐 천막을 치기 위해 땅을 판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이곳은 유골훼손이 덜해 의대생들이 실습에 필요로 하는 '뼈'를 공급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이리저리 '후손'에게서 괴롭힘을 당했던 이곳에 경산시민모임 등 관련단체가 '시건 장치'를 달아놓은 것은 최근 일이다.

"대구지방법원에 '현장보존신청'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법적인 절차에 문제가 생겨 우선시건 장치를 만들어 임시방편으로 입구를 막아 놓았죠" 『경산코발트광산 유족회』조사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경산향토신문 최승호 기자의 말이다.

국내를 넘어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경산코발트광산' 학살지

나머지 순례단이 도착하고 잠시 후 최기자는 지금까지 학살와 관련한 내용을 순례단 일행에게 설명해줬다. 잠시 최기자의 말을 들어보자.

"여기 폐광산은 일제가 대동아 전쟁 당시 수탈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일제 폐망 이후엔 사용하지 않았는데 결국 한국전쟁 당시 50년 7,8월경부터 약 일년동안 학살지로 사용되고 말았습니다. 이 당시 이곳 외에도 전국적으로 100만 명 이상 양민과 사상범들이『보도연맹』에 연루돼 '예비 검속'으로 구금된 후 각지에서 희생됐습니다. 하지만 특히 이곳은 그 중 국내에서 유일하게 유골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현장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넘어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는 곳입니다"

지금까지 이곳을 찾은 순례객은 1,000여명에 달한다. 전국 각지 학생, 청년단체 회원 그리고 외국인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코발트광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산 전체가 '공동묘지'

지난 1월 29일자 『경산향토신문』은 학살을 목격한 인근 주민들의 증언으로 당시를 생생하게 전한다.

"(학살기간 동안) 사람을 가득 실은 트럭이 하루 수십대씩 수주일간 마을을 지나 폐코발트 광산을 향해 올라갔다"
"트럭은 모두 호루를 쳐서 몇 명씩 탔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재소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을 수직갱도 입구에 세워 총으로 쏘면 굴러 떨어지곤 했다"

최승호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폐코발트 광산은 가로 4m, 세로 2m, 깊이 100m이상의 수직갱도와 그 수직갱도와 맞물려 있는 두 개의 수평갱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수평갱도 입구 중 하나가 현재 순례단이 위치한 자리이고 나머지 한 갱도는 아래편 작은 도랑과 연결되어 있다. 당시 증언에 의하면, 수직갱도가 모두 차고 시체가 수평갱도에까지 밀려나왔다니 희생자의 규모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갱도가 다 차자 광산 근처에서도 학살이 자행됐다고 전한다.

"이 곳은 거대한 공동묘지입니다. 광산뿐만 아니라 산 곳곳에서 학살이 이루어지고, 죽은 양민들은 땅속에 바로 묻혀진 겁니다"

덧붙이는 글 | '경산코발트광산' 순례 문의
- 경산시민모임 053-816-3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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