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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인종과 언어, 종교 및 문화의 모든 면에서 매우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이 섬은 고대로부터 말레이반도와 호주 및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와 멜라네시아 제도들 사이의 통로가 되어왔다.

근세 이후에는 포르투갈을 통하여 라틴계통의 카톨릭문화가 수입되었으며, 아랍과 중국 상인들의 왕래를 통하여 이슬람과 중국의 종교 및 문화도 들어왔다. 1975년 인도네시아의 침공 당시 80%의 주민이 정령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20 %가 카톨릭을 믿고 있었다. 또한 30여 개의 언어가 사용되었는데 테툼어가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동티모르는 16세기에 특산물인 백향목을 거래하는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하여 서구에 알려진 후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서티모르는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다. 서티모르는 1949년 인도네시아로 독립하였으나 동티모르는 1974년까지 포르투갈이 관할권을 가지는 비자치지역, 즉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동티모르의 많은 지역에서는 포르투갈의 냄새가 난다. 이들은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작은 보트에 의지해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티모르의 바다는 우리 동해안처럼 깊고 푸르다. 해안가에는 맹그로브 나무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집집마다 문 앞에는 성모 마리아의 초상이 걸려있다. 어촌의 나이든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어 보다는 포르투갈어가 더 흔히 쓰인다.




비숍 벨로 주교. 우리에게도 참 익숙한 인물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는 우리나라에도 다녀간 인물이다. 그의 집에 갔다. 내전 중에 그의 집도 역시 불에 타 버렸다. 하지만 일요일 오전이면 성당 보다 그의 집으로 사람들이 모려든다. 오전 미사는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오전 미사는 다른 신부가 집전하고 있다. 주교는 성당에서 저녘에 집전을 하신다고 한다. 약 500명 정도의 사람이 주교의 집을 메우고 있었다. 아이들 역시 부모의 함께 미사에 나왔다.

인도네시아는 이른바 판차실라 원칙에 따라 모든 국민에게 이슬람, 가톨릭, 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 5개 종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등록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신을 부정하는 자, 곧 공산주의자로 간주된다. 이 때문에 정령신앙이 많았던 동티모르인들은 80% 이상이 카톨릭을 믿게 되었고, 다른 지역에서 온 이주민들은 주로 이슬람교를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군과 동티모르인 사이의 저항전선이 한편으로는 동티모르인과 이주민사이의 인종갈등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카톨릭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종교갈등의 양상으로 나타났고 인도네시아 군 당국은 이를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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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크루즈 공동묘지에는 늦은 오후의 노란 햇살이 가득했다. 빼곡히 들어차 있는 묘지들. 천천히 걸어서 그 역사적인 현장으로 들어갔다. 대학살이 있었던 곳. 동티모르의 참상을 처음으로 세계에 알렸던 곳이다.

이곳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보면서 광주를 떠올린다. 특히 1999년 대학살 때 죽어간 사람들의 묘지가 많이 눈에 띤다. 한 비석의 장식은 총탄에 의해 깨졌다. 이 묘지에는 아이들의 무덤이 많다. 이곳의 취약한 의료 시설로 아이들의 사망률은 특히나 높다. 작년 대학살 때 아빠와 2살의 어린 딸이 함께 죽어 묻힌 묘지를 보며 슬펐다.

묘지 곳곳에서 죽은 남편을 애통해 하는 미망인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전쟁과 학살이 남긴 깊은 슬픔이다. 죽어간 이를 위로하려는 듯 묘지 위로 수 없이 많은 촛불들이 어린 손에 의해 세워지고 있다. 같은 마을 사람들의 손에 죽어간 이들의 분노를 어떻게 잠재울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는 이 낮선 이방인에게 묻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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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주민의 대다수가 절대 빈곤 속에 살고 있다. 1975년 침공 이후 계속된 전쟁으로 쌀을 비롯한 곡물과 커피 등 농작물의 생산이 급격히 감소하고 가축들이 몰살당한 것이 제일 큰 원인이다.

한편 동티모르인들의 문맹률은 50% 이상이며 영아 사망률은 세계 최고 수준인 1,000명당 106명을 기록할 만큼 보건의료상황도 열악하다. 적십자에서 운영하고 있는 종합병원을 찾았다. 병원장에게 어렵게 취재 허락을 받앗지만 단지 취재 시간은 20분. 전쟁 이후 아이들은 불결한 위생과 열악한 의료환경에 놓여 있다. 말라리아, 댕기열 등 열대병은 아이들에게 치명적이다. 혈관을 찾기 힘들어 머리에 바늘을 꽂은 아이의 모습이 애처롭다. 하지만 전에는 이런 시설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적십자의 손길은 이제 동티모르 아이들에게 절대적인 것이다.

식민지 정책의 또 하나의 산물은 문맹이다. 현지인들을 철저하게 교육에서 배제시키고 일부의 인텔리들에게만 교육의 혜택이 돌아갔다. 식민지의 마름들 외에는 교육에 혜택을 볼 수도 없었고 또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현재 딜리의 초등학교들은 절대적인 교사와 시설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아이들은 하루 3부제로 교육을 받고 있으며 교과서와 같은 것은 아예 없다. 선생님의 필기를 받아 쓸 노트와 연필이 전부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습은 진지하다. 동티모르의 공용어로 선택된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있다. 물론 식민지 모국어를 현재에 다시 공용어로 한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왕이면 영어가 공용어가 되었으면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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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학교에 나가는 아이들은 선택받은 것이다. 아직도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을 방치하거나 노동을 시키고 있다. 딜리 유일의 종합시장 안에는 공공연한 도박을 벌이는 곳이 있다. 동티모르인들이 좋아하는 닭싸움과 카드판이 벌어지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도 아이들은 어른들과 어울려 개평을 뜯거나 심부름을 해주고 있다. 아무도 아이들을 제지하지 않고 있다.

과연 독립 정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딜리에서 유일한 공공 도서관을 개막하던 날 동티모르의 독립지도자 사나나 구스마오는 "아이들은 우리의 희망이다. 아이들에게 우선 교육의 혜택이 돌아가게 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우리 동티모르의 역사를 알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시작인 것이다.

더 많은 사진을 보고 싶다면 -> 한국전쟁50주년 공동기획 '아이들에게 전쟁 없는 미래를' NO WAR, NO CRY http://warchil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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