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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폭력배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일종의 테러죠"

이토록 거칠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분노 어린 목소리를 낸 장본인은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과 학문적 전통을 자랑하는 국립서울대학교의 김민수 교수(40. 디자인학)이다.

지난 달 31일 '재임용 거부처분이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공정한 심사를 거친 것이라고 볼 수 없다'(서울행정법원 제13부)는 1심판결을 뒤엎은 서울고법 특별11부(재판장 우의형 부장판사)로부터 "재임용 탈락은 계약기간 만료에 대한 사실확인에 불과하므로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는 행정처분이 아니다"는 기막힌 선고를 받은 김교수가 이 사건의 본질을 묻는 취재기자의 첫 질문에 건넨 말이다.

"지난 달 31일 항소심 선고는 사실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항소심 과정에서 재판부가 바뀌었고 모 판사의 보수성향에 대해 한결같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 서울대측이 개입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며 대법원에 상고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98년 재임용 심사과정에서 재임용에 필요한 연구실적물의 4배인 8편의 논문을 내고도 '연구실적 미달'을 이유로 서울대 사상 처음으로 재임용에서 탈락한 김교수는 2년째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처음에는 이민 갈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죠"라며 평생이 걸리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고 밝힌 그는 '패거리 교수 사회', 학자적 양심과 연구활동에 족쇄를 채우는 악법 '재임용제도', '청산되지 않은 친일잔존세력'들이 가해오는 '백색 테러리즘'과 '집단 이지메'라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맞서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아내가 "맘놓고 싸워라"며 아낌없는 정신적 지원을 해줘 힘들지 않다고 한다. 또한 5.18공소권 취소와 관련해 140여명밖에 서명하지 않았던 서울대 교수들도 김교수 문제와 관련해 현재 380여명이 연대서명을 해 부당한 재임용심사를 철회할 것을 주장하고 있고 일반인들도 4천여명 가량이 서명을 해 김교수를 지지하고 있다.

객관적인 연구실적물의 양을 채우고서도 98년 재임용심사 대상자 42명중에서 유일하게 탈락한 김교수는 자신이 이렇게 밉보여 '괘씸죄'를 적용한 것에 대해 "미대 전체로 봤을 때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기 몇몇 교수들이 가담했던 사실을 전남대 이태호 교수의 연구결과를 인용해 게재했던 것과 원로교수의 학과 커리큘럼을 비평한 것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한다.

이는 즉 96년 10월 미술대학 부설 조형연구소가 주최한 '한국현대미술교육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46-1960' 이라는 개교 50주년기념 학술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 / 공예 교육 50년사:1946-1960"이라는 논문이 문제가 된 것이다. 공식적인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한 학문적 비평에 대해 '교수들간의 관계'를 이유로 들어 서울대측은 상식밖의 행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김교수의 주장에 '연구내용 부실'로 재임용 탈락 결정을 내렸던 서울대 측은 "친일문제와 탈락은 상관이 없이 3차에 걸친 공정한 심사였다", "임용절차는 대학의 고유권한이다"고 맞서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공식적인 재임용 탈락 사유인 '연구실적 부실'이라는 서울대측의 판정은 공정한 것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98년 6월 중순 재임용 심사에서 다른 교수들이 두 편의 논문을 제출할 때 여덟 편의 논문을 제출한 그의 연구물에 대해서 잠시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서울대 미대에서 유일하게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이론 전공 교수이고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후즈후 인더월드' 밀레니엄(2000년판) 인명사전에 수록된 김교수가 심사물로 제출한 '21세기 디자인 문화탐사'(솔 출판사, 현재 1판 7쇄)는 월간 '디자인'으로부터 '97 올해의 디자인 상'을 수상했고 많은 타대학 디자인학과의 교재로 채택되어 사용하고 있다.

또한 그가 제출한 논문 '시각예술의 측면에서 본 이상 시의 혁명성'은 97년 '이상 사후 60년 집중 재조명' 학술심표지엄에서 발표해 시각예술적인 면에서 이상 시를 분석해 호평을 받았고 이상 연구의 권위자인 서울대 국문과 권영민 교수는 자신의 '이상 문학 연구 60년'이라는 논문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특히 33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국제학술저널 'Visible Language'의 샤겐 포겐폴 편집인은 "시각 언어에서 좀처럼 개발되지 않았던 교차문화적 사고의 교환 영역을 확장시켜 주었다"며 밀레니엄판에 김교수의 논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학술지에서 인정받고 있는 그의 논문이 왜 유독 국립 서울대학교에서만 인정을 못받고 희대의 지적 사기가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럴 줄 알았다면 인간관계를 좀 더 잘해 놓는 건데"라는 김교수의 말은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을 적나라하게 잘 보여주는 것이다.

'연구의 자율성'이나 '비판의 자유'라는 학자가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도제식으로 엮어진 사제간의 의리와 나이순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줄서기 문화와 교수사회의 패거리주의에 처참히 짓밟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학교측은 연구실적물들이 어떤 이유로 재임용 기준에 미달하는 것으로 판단했는지에 대해 입증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재임용탈락 이후 김교수는 학교측의 전화해지, 연구실 퇴거 통보, 플라자 계정 삭제 등의 강제조치에 맞서 학생대책위와 교수대책위가 연대해 지난한 투쟁을 하고 있다. 또한 '학점 없는 릴레이 강의'를 통해 강제폐강된 '디자인과 생활'수업을 주인 허락없이 하고 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학생대책위의 "지금의 서울대학교는 올바로 서지 못한, 거꾸로 선 서울대학교라는 생각을 합니다"라는 부끄러운 고백은 지금의 서울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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