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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서태지의 '음악'에 대해 평하거나 예찬하려는 게 아니다.
그의 새로운 앨범을 평하기에는 식견이 부족하고, 그의 음악을 예찬하기에는 내 취향과 기호가 하드코어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서태지라는 '인물'에 대해 내가 높이 평가하는 건, 그가 한분야의 전문가라 여겨지기에 손색이 없기 때문인데, (비록 그가 지향하는 격렬한(?) 음악 성향이 내 기호에 맞지 않긴 하지만) 어떤 분야건 한 방면의 대가에 대해서 갖게 되는 왠지모를 존중심이 그에게도 일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그는 매우 영리한 젊은이다. 사람들의 호기심과 기대를 고조시키는 방법, 무대를 연출하고 앨범을 디자인하는 방법, 매스컴을 가장 효과적으로 요리하는 방법 등에서, 그는 여지껏 프로다운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세밀한 계산이 미덕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런 그지만, 음악의 성격에 대한 고집에서 만큼은, 상업적 성공에 직결되는 대중적 기호보다 자기 취향을 더 중시하는 게 참 신선하다. 물론, 그가 하드코어를 들고 나온 이상, 나는 누가 그 음반을 선물해준다 해도 듣기 거북스럽겠지만, 현재 국내에서 인기를 끄는 주류 음악 흐름에 타협하지 않는 그의 고집은 오히려 대견하고 반갑다. 서태지 공연에서 실감한 그 고집에서 노무현의 고집이 연상된 건 왜일까?
서태지와 노무현의 닮은 점 다섯가지
1. '서태지 은퇴 기자회견'은 가수들의 은퇴 발표로는 이례적으로, 방송사들의 메인뉴스에서까지 기사로 다루어졌다. 그가 대중가요 흐름에 미친 영향, 그의 은퇴가 청소년층에 미친 정신적 충격과 공허감까지 일련의 기사로 다루어졌으니, 요즘 많이 쓰이는 표현을 빌리면, 참 '엽기적인' 보도였다.
'노무현 낙선 관련 보도' 역시 국회의원의 낙선 뒷얘기로는 이례적으로, 어떤 당선자에 대한 기사보다도 더 많은 보도 내용을 쏟아내었다. 방송 프로그램의 다큐 형식, 일간지와의 인터뷰, 시사 주간지들의 동정적 기사 등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졌으니, 참 예외적인 경우였다.
2. 서태지의 '팬클럽'은 여타 가수들의 팬클럽에 비해 수적으로 많고 연령이 비교적 폭넓다는 특징도 있지만, 뚜렷이 구별되는 독특함이 있다. 즉, 그가 은퇴한 이후에 가입한 팬들이 많다는 것이고, 그가 가수 활동을 하지 않은 수년간 그들의 관심과 애정은 한결같았다는 점이다.
노무현의 '팬클럽' 역시 여타 정치인의 지지자들에 비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전국적 조직이라는 특징도 있지만, 뚜렷이 구별되는 독특함이 있다. 즉,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정치인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도, 그의 낙선이 노사모 결성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3. 서태지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면서도 상업적으로도 성공해내는 수완을 갖고 있다. 색다른 장르를 고집하면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러야 하는, 그런 현실적 판을 깰 수 있는 발군의 실력을 그는 갖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역시 본인이 간직하고 싶은 '가치'를 지키면서도 정치적으로도 헤쳐나가는 수완을 갖고 있다. 낡은 정치의 틀에 물들지 않으면 도태되고 마는, 그런 현실적 한계를 깰 수 있는 유능함과 자질을 그는 갖고 있는 것이다.
4. 서태지는 지금 기회와 도전이 함께 따르는 '관문'에 들어섰다. 어느 음악 평론가는 말하길, '감미로운 멜로디와 소프트한 댄스'가 들어간 곡 몇개만 포함시켰더라면 그의 신화적 이미지에 의해 폭발적 성공을 했을텐데, 아직 국내에 척박한 하드코어 색채가 너무 강해 그의 앨범에 대한 반응을 미지수라 평했다. 지켜볼 일이다.
노무현 역시 기회일 수도 위기일 수도 있는 '관직'에 들어섰다. 어느 선배는 주장하길, 그냥 최고위원 선거에나 출마했더라면 영남권 대표로 당선된 김중권보다 더 많은 표가 나왔을텐데, 해양수산부 장관은 잘해야 본전이고 별로 행정력을 인정받기 어려운 실정이라 우려했다. 두고볼 일이다.
5. 서태지는 여타 가수와 다른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가 한국 대중 음악 판도에 미친 획기적 영향은 그의 음악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도 인정한다. 그의 길을 뒤따라 걸은 가수들 음악이 설령 그의 것보다 더 세련되다 누가 주장하더라도, 그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길을 뒤이어 따라온 이들 앞에 당당할 수 있다. 긍지를 가질 수 있다.
노무현 역시 여타 대권주자와 다른 '자존심'을 가질 만하다. 그가 지역주의라는 괴물과 맞서 싸운 처절한 노력은 그를 찍지 않은 부산 유권자도 인정한다. 지역 감정을 부추기며 자신의 입지를 공교히 다져온 이회창과 이인제의 기반이 더 탄탄하다 누가 주장하더라도, 그는 깨끗한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반칙을 일삼은 다른 선수들 앞에 당당할 수 있다. 큰소리칠만 하다.
나는 서태지가 다음 대선 때, 노무현 후보 홍보, 유세 자원봉사자로 활약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그런데, 살다보면 참 뜻밖의 일도 벌어지는 법이다.
덧붙이는 글 | 서태지와 노무현에 대한 호감이 반영된 에세이 성격의 글을 써보았습니다. '공정하지 않은 기사'라고 생각하는 분들의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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