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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각종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는데요. 볏집나르기, 쇠풀뜯기, 나무하기, 모내기 등 각종 농사일을 섭렵했는데 하나같이 힘들고 지겨웠습니다.

그래서 도시에서 자라나 농사일을 하지 않는 친구들을 부러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여름방학이면 매일 우린 소꼴먹이기를 해야 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소를 이끌고 산으로 들로 소꼴먹이기를 했습니다.

어쩌다 게으름을 피우느라 소를 데리고 평소보다 빨리 집에 돌아오면 아버진 단호히 절 다시 들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쇠풀을 자루 가득히 빡빡하게 채워오지 않고 덤숭덤숭 채워오면 아버진 어김없이 절 다시 들로 보내 쇠풀을 만족할 수준(?)만큼 채워오게 하셨지요.

그래서 여간해선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소꼴먹이는 일이 언제부터 즐거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소 고삐를 항상 잡고 다니지 않고도 소꼴을 먹일수 있다는 사실을 안 거지요.

우리는 우리끼리 놀고 소들은 지들끼리 열심히 풀을 뜯어먹고. 착한 소들은 여간해서 무리를 벗어나 개인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물론 가끔 주인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 남의 벼를 마구 뜯어먹어 우리를 곤란한 지경으로 만들긴 했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우린 소를 풀어두고 만화책 보기, 축구 심지어 야구까지 즐겼습니다. 그중에 제가 제일 좋아한 놀이는 쇠똥벌레 잡기였습니다. 쇠똥벌레는 오래된 소똥을 주식으로 삼는 곤충입니다. 그 곤충이 상당이 위생적이지 않은 지역에 서식하고 채집하기가 아주 까다로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사랑을 받은 것은 우리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을 만큼 적당한 크기에 외모가 아주 우리가 흔히 볼 수 없고 구할 수 없는 장난감을 대체하고도 남을 만큼 훌륭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수컷은 코뿔소처럼 훌륭한 뿔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지요. 쇠똥벌레를 잡기 위해선 많은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우선 소똥 위에 흙이 소복히 쌓여 있다면 그것은 쇠똥벌레가 필시 그 밑에 깊고 좁은 자신들만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린 소똥을 제거한다면 조그만 구멍을 찾아 기다랗고 뾰족한 막대로 구멍를 추적해 땅을 파야 합니다.

그런 작업을 계속하다 여의치 않으면 손가락으로 말랑말랑한 소똥을 후벼내야 하는 끈기까지 필요합니다. 그런 고행(?)끝에 구멍 저 끝에 도사리고 있는 쇠똥벌레를 수중에 넣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잡은 쇠똥벌레로 우린 땅파기, 달리기, 씨름 등 온갖 놀이를 다 시키며 시간가는 줄 몰랐지요.

그러던 어느날 그렇게 어렵게 잡은 쇠똥벌레를 집에까지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개구리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깡통에다 목화에서 따서 어머니가 소중하게 커다란 단지에 보관하던 푹신하고 따뜻한 솜을 깔아준 전력이 있는 나는 이 재미있는 장난감을 항상 곁에 두고 항상 볼 수 있어서 다시는 그 어려운 수고를 할 필요가 없는 방법이 없을까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장고 끝에 악수라던가요? 제가 생각한 최적의 장소는 우리집 재산 목록1호인 소가 살던 외양간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거긴 쇠똥벌레가 좋아하는 소똥이 아주 풍부한 장소였고 제가 언제든 쉽게 갈 수 있고 친구들에게 빼앗길 위험도 없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전 쇠똥벌레 2마리를 마굿간 중에서 소똥이 많은 곳에 조심스레 풀어주었습니다. 내일 또 볼 수 있고 또 거기서 새끼를 낳는다면 우리집 외양간에 쇠똥벌레가 우글우글 거릴거라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면서 말입니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 다음 날에도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제가 달려간 곳은 쇠똥벌레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곳이라고 생각한 우리집 외양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전 쇠똥벌레를 외양간에 풀어준 이후 다신 쇠똥벌레를 볼 수 없었습니다.

잠자리가 행여 불편할까 목화솜까지 깔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집나가 돌아오지 않은 어느 잘생긴 개구리처럼 말입니다.

중세때 흑사병이 만연할때 성직자들이 병자와 가족들로 하여금 교회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라고 장려했다지요? 흑사병은 전염병이란 것을 그 당시 사람들은 몰랐던 거지요.

누가 그랬던가요? 사랑이 없는 지식은 공허하고 지식이 없는 사랑은 폭력과 같다고요. 지금은 더 이상 소똥을 뒤져 쇠똥벌레를 잡는다든지 장난삼아 개구리를 잡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지식(타인에 대한 이해) 없는 사랑을 베푸는 어렸을 때의 실수를 지금도 저지르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작 상대방이 필요하지 않거나 폐가 되는, 나 자신의 만족감을 충족하기 위해 이기적인 사랑을 강요한 적은 없는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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