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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한다는 것

애초에 시와 노래는 별개가 아니었다. 지구상의 가장 고등한 생물인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언어와 소리로 표현할 줄 알았고 문자가 발명이 되자 그것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중국의 3대 고서중 하나인 시경(詩經)은 수천년전 당시의 유행가 가사였고 또한 중세유럽의 음유시인들은 당시 민중들의 이야기를 음률에 실어 간단한 악기 반주로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면서 노래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청산~리~~~ 벽계수~~~"로 시작하는 시조창은 가사 자체가 한 편의 시조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 대중가요의 가사는 사랑과 이별이 주를 이루기 시작하면서 시(詩)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쑥스러운 수준의 노랫말이 양산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중가요를 걱정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이러한 걱정을 덜어주는 음반이 나와 잔잔한 화제다. 도종환·안도현· 류시화· 이정하· 정지원· 백창우· 박완호· 김현성 등 당대의 시인들의 시를 노래로 만든 음반. 바로 포크그룹 '노래마을' 출신의 싱어 송라이터 손병휘의 첫번째 앨범 '속눈썹'이 그 것이다.

이 앨범에는 손병휘씨가 수 년전부터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들어온 시노래 11곡이 오롯이 담겨있는데 보통 시로 만든 노래가 갖는 재미없다는 선입견과는 달리 수록곡들은 저마다의 개성이 뚜렷하고 다양한 편곡의 시도도 눈여겨 볼만하다.

그의 앨범의 노래들은 전형적인 포크발라드풍의 노래에서 프로그레시브한 락의 분위기를 풍기는 곡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지만 이 앨범이 끝까지 놓치지 않는 것은 시의 감동과 선율의 아름다움이다. "너의 속눈썹이 되어 삶에 지쳤을 때 너의 눈을 덮어주는"(노래 '속눈썹') 여린 마음이 첼로와 기타만의 단순함으로 장식되는 '그리움'같은 노래를 만날 때 그의 노래는 가을날 떨어진 잎사귀를 태울 때와 같은 향기와 빛으로 우리를 물들인다.

그의 보컬은 포크그룹 '노래마을'에서 다년간 활동했던 이력이 있어서인지 부드러운 느낌이 있지만 다소 거친 목소리도 만만치 않아 속삭이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며 흐느끼기도 하는 등 한 사람의 노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다양한 색깔을 보여 준다. 특히 거의 모든 코러스를 직접 넣는 빼어난 감각을 자랑한다.

삶에 지친 이들을 위해 "깊은 곳을 지키는 질긴 뿌리"(노래 '느티나무')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그의 노래들은 사랑과 자유, 환경과 삶의 진실함을 주로 노래하고 있는데 이번 앨범을 발표하며 손병휘 씨는 "누구든지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을 때 말없이 떠나는 작은 방같은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며 "가사를 선택할 때는 시의 감동위주로, 선곡할 때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고 밝히고 있다. 최근 시노래 동인 '나팔꽃 음반'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이나 이지상의 음반 예에서 보듯 시와 음악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때 앨범 '속눈썹'은 한 가수의 독집이라는 의미와 함께 시가집으로서의 의미도 함께 있는 것이다.


락과 포크의 만남

또 한가지 이 앨범을 주목할 만한 것은 포크음악인과 락밴드의 만남이라는 데 있다. 이 앨범의 공동디렉터인 김현은 언더락 밴드 프리다칼로의 리더로 편곡과 연주에서 손병휘와 공동작업을 하였고 프리다칼로는 연주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김현은 25개 밴드의 연합체인 '아름다운 밴드연합'의 의장으로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며 락의 자존심을 지키는 밴드 프리다 칼로를 이끌고 있는데 그들은 아무 조건 없이 이 작업에 기꺼이 참여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작업은 평소 친분이 두터운 양측이 의기투합하여 이루어진 일로서 상업주의와 이해타산 그리고 속임수가 만연하고 있는 현재의 한국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이라 할 만하다.

외국의 경우 포크락 뮤지션인 닐 영과 락밴드 '크레이지 호스'등이 함께 작업한 예도 있지만 블루스에 기반하여 프로그레시브한 하드락을 추구하는 프리다 칼로와 포크음악인 손병휘의 만남은 아직 국내에 그 예가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시도로 정적인 포크와 동적인 락의 만남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의미가 있다. 그래서인지 앨범의 전반적 사운드는 정적이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는 포크락의 냄새가 배어있다.

새로운 형태의 독립음반

손병휘의 음반 '속눈썹'은 인터넷 사이트 '문화강국'과 자신의 공연장에서만 판매하는 음반이다. 전근대적인 유통체계와 음악인들과의 불평등한 계약관계 그리고 각종 로비로 뒤범벅인 채 십대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한국의 대중음악계에서 삼십대의 포크뮤지션이 음반을 내기란 여간 어려운 점이 아니나 그 이유보다는 '배고프지만 당당한 홀로 서기'를 원했던 손병휘는 자신이 직접 제작전반을 관장하며 일반유통을 삼가는 '인터넷 독립음반'의 형태로 음반을 만들었다.

이러한 시도의 성패여부는 인터넷 사이트 '문화강국'에 대한 네티즌의 구매력과 손병휘 자신의 활동력에 많이 달려 있지만 음반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매스컴과 소비자의 안목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갈수록 획일화되어 가는 우리 대중가요의 소중한 별종인 손병휘의 음악작업을 북돋우기 위해서라도 이 가을 그가 선사하는 포크의 서정성에 푹 잠겨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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