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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

전대 달라이 라마로 인정받은 후 2년이 지난 4세 때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는 집을 떠나 가족들과 함께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있는 포탈라 궁에 들어갔다. 6세 때부터 링 린포체로부터 불교 철학을 교육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계를 분해하거나, 영사기를 조작하여 영화를 보기도 하고 차를 몰다가 차 유리창을 깨먹기도 하는 등 여느 어린이들과 비슷한 호기심과 장난기가 있었다. 25세가 되던 1959년 불교철학박사 학위에 해당되는 게쉬를 마쳤다.

달라이 라마가 공부한 불교철학은 논리학, 중관철학, 인식론, 불교교학, 계율론 등이었고 고승들과의 논쟁을 통과해야 하는 여러 시험들을 거쳐 게쉬를 마칠 수 있었다.

중국의 침공과 망명정부 수립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자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는 16세의 나이로 14대 달라이 라마에 즉위하고 UN에 티베트 문제를 호소했다. 그러나 엘살바도로만이 UN 총회에 티베트 문제를 의제로 상정하는데 지지했고 나머지 국가들은 받아들이지 않아 UN 총회에서 다뤄지지 못했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협상하였지만 중국의 강압에 의해 오히려 라사에 중국군 진주를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의 '17개 조항의 협정'에 서명하고 말았다. 1954년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 주은래 등 중국의 지도자들과 티베트 문제를 협상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아편이라고 믿는 중국 지도자들의 시각하에서 "티베트는 불교라는 독약에 물들어 있고, 중국은 이 티베트를 해방하기 위한 어머니 나라"임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티베트 점령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1950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이후부터 지방에서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는 민중봉기가 계속되었고 1959년에 티베트에 유례없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티베트인들은 중국군이 달라이 라마를 납치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캄과 암도지방의 주요 라마승과 지역 지도자들이 중국 문화공연과 행사에 초대되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고통스러운 경험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군이 3월 10일 달라이 라마를 경극에 초대하면서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의 안전을 더욱 염려하게 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중국군이 경호원도 없이 오라고 한 점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라사의 시민들은 중국의 핑계에 달라이 라마가 끌려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59년 3월 10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수천명의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가 중국 경극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블링카 궁을 둘러쌌다. 그후 며칠동안 중국이 티베트를 단념하고 완전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대중집회를 열었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이 대규모 집회의 폭발적인 결과를 염려하면서 노블링카 궁 앞에 있는 수많은 티베트 군중들에게 해산할 것과 중국군의 노여움을 삭이고 폭력을 막기 위한 일환으로 중국군 장군에게 편지를 썼다.

이때 상황을 달라이 라마는 자서전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양측의 화를 식히기 위해 그리고 라사의 시민들에게 절제하도록 요구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장군의 모든 편지들에 답장을 했다. 당시 나의 가장 시급한 임무는 비무장한 나의 국민들과 중국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충돌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라사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전면적인 대치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한 모든 노력이 실패하고 중국군의 진압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자, 달라이 라마는 그의 국민을 보호하는데 국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인도로 망명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59년 3월 10일 하루동안 시위에 참석한 1만 5천명의 티베트인들이 사살되었다. 당시 티베트인들의 민중봉기를 진압한 과정에서 중국은 6,000여개의 불교사원을 파괴했고 12만명의 티베트인들을 학살했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은 당시 상황에서 티베트인의 생명을 지키고 티베트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민주적 망명정부 조직,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

인도로 망명한 후 네루 수상의 지원을 받아 인도 동북부 지역인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수립한 14대 달라이 라마는 지난 40여년 동안 학교와, 수공예 공장, 예술 학교까지 설립하여 티베트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또한 1963년에는 티베트 헌법의 초안을 만들고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티베트 망명정부를 재조직하여 사원제도를 개혁하였다. 현재 티베트 망명정부 의회의 의원은 직접선거에 선출되고 내각은 이 의회 의원들에 의해 선출된다. 달라이 라마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티베트 행정부를 민주화할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티베트가 독립을 쟁취하면 정치적인 권한을 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달라이 라마는 의회 의원의 2/3가 대법원과 협의하여 국가의 이익이 된다고 판단할 때 달라이 라마의 실권은 평의회에서 수행해야 한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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