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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990년도 들어서서 기업마다 ISO인증을 받지 않으면 명함 내밀기 쑥스웠다. 1997년도에는 건설회사 중에서 현대나 동아, 대림 등 1군 회사의 협력 회사들은 협력사로 등록하기 위하여 필수조건으로 인증을 받아야만 했다.

98년도에 건설사를 퇴사한 직원들 중 일부는 한국품질인증협회(KAB)에서 실시하는 품질 보증체제 인증 심사원 자격 부여 시험에 합격해서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심사원이 되었다.

30-40대 심사원은 능률 협회, 표준협회, 생산성본부인증원등의 기관에서 상근 심사원으로 일을 했다.

40대 후반에서 5-60대 심사원들은 상근으로 일을 못하고 비상근으로 1년간 계약에 의하여 매월 심사일자를 지정받아서 심사를 나갔다. 98-99년도에는 하루에 25만원을 받았다. 한달에 20일을 일했다.

전국을 다니며 심사를 하느라 고달퍼도 한달에 500만원이고 1년이면 5-6000만원의 수입이 되니 현역으로 뛸 때보다 살 맛나는 일이었다.

함께 일했던 동료는 이미 심사원으로 활동을 했고, 자기돈을 들여서 사업을 할 자신이 없는 나는 목표를 심사원 자격따기로 들어갔다.

만만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98년 4월부터 시험보기 위해서 필수 과정인 교육과정을 거치면 3번의 자격을 주는데 나는 연전연패를 하고 말았다.

다시 교육을 또 받아 시험보고 떨어지고 하며 교육을 또 받고 여섯번 째에 합격을 했다. 1년이 걸렸다. 길고 힘든 세월이었다.

연봉 5000만원의 꿈을 안고 시작한 공부의 결과는 지금 어떤가.
건설회사는 무너지고 협력사는 함께 부도가 나는 판에 ISO도 물건너 갔다.

시험보고 실습에 6개월을 보내고 정작 인증 기관에 심사원으로 등록을 금년 9월에 했다. 10월에는 하루의 심사도 없었고, 이번 11월에는 단 하루를 배정받았다. 심사 수당도 20만원으로 조정되었다. 세금 떼면 19만원이 조금 넘는다.

나는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과로와 스트레스로 차를 몰고 가다가 코피가 터져서 피를 흘리며 병원을 찾으며 비몽사몽간에 버스 전용차선으로 들어가다가 차선 위반으로 걸린 범칙금과 동두천 승용차 전용도로에서 텅빈 도로를 과속하다 찍힌 벌금, 전곡의 시골길에서 경찰관이 숨어서 찍은 비디오에 또 과속으로 잡혀 이달들어 범칙금만도 20만원이 넘는다.

미국의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었다.
"국민들은 국가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우선 자신이 무엇인가 하라."

그러나 나는 말한다.
"국가는 나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하기 전에 내게 무엇을 하여 주었는가를 생각하라."

예측할 수 없는 나라. 계획을 세워도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 그리고 경찰관이 숨어서 비디오 찍는 나라에서 우리는 언제까지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희망을 가지고 시험을 보고 떨어졌던 날들의 아래 기록은 차라리 눈물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1998년 4월 25일 ISO 교육 끌
다들 열심히 하고 진지하게 한다.시험 공부 대비에 열심인 우리조의 조장은 이번에 시험을 본다.시험을 다음으로 미룬 내게 조장을 넘긴다.나도 마다하지 않는다.

조원이라는 수동적 교육태도보다는 조장의 위치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시험은 내일 서울에서 있다.교육생 19명중 나를 포함해서 3명만 빠지고 다 본다.

인증 심사원보의 시험은 짝수월에 있다.나는 6월에 볼 참이다.1998년 6월 28일 인증심사원보 시험 전후 시험 예상 문제 카드 정리를 계속했다.

나는 한 번 정리한 노트를 가지고 반복해서 암기하는 시험 공부는 안 된다. 카드 앞면에는 제목을 달고 뒷면에는 답을 썼다. 시험장에서도 만년필로 쓰려고 만년필 맛을 느끼며 썼다.

나는 카드 작업에서 토씨를 빼고는 한문으로 쓴다. 밤12시가 되니 지치고 피곤했다. 카드 정리한 한 장 한 장의 문제를 보고 답을 맞춰야 하는데 글자 앞머리부터 생각이 안 나는 게 부지기수이다.

나이를 떠나서 무지하고 외우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는 잘 알고 있다.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고 MAP형 노트형식으로 꾸며 보기도하나 답안의 첫 머리가 줄줄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카드 노트를 정리하기 전에 대학노트에다가 정리를 했었고 카드형 스프링 노트에다가도 MAP 형식으로 하기도 했건만 기억은 건망으로 흘러서 제가 써놓고도 기억이 안 난다.
이런 경을 칠.

시험 공부를 한다고 두 달을 허송 세월을 한 것 같다. 노트에다가 학습성과 표를 만들어서 점검을 했건만 그것은 다만 몇 쪽만 보았다는 기록이었지. 얼마를 암기했느냐는 실적은 아니었고 문제와 답안 작성의 반복이 부족했구나 하고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고 있는 쪽이 너무 많구나 하고 통감했다.

강의실에서는 하루에 4시간을 자면 불합격이요, 3시간을 자면 합격이라고 했건만 나는 자정을 못 넘겨 그냥 자리 펴고 누워버렸다.

그러나 정작 시험날이 되자 모든 기억이 날라가고 없었다. 이럴 수가?
이번 시험이 끝나면 다음 시험은 8월에 있다. 이번에 떨어지면 다음은 8월에 치르지. 나는 자포자기하는 한편 또 다른 계획을 세웠다.

시험장에 가기 전에 아내는 "자기, 이번에 합격해요"하면서
"파이팅을 한 번 하자고요. "
하는 말에 나는 맥빠진
"파이이티이잉"을 하니
"파이이티이이잉이 뭐예요"
하면서
"파이팅… 하고 힘 있게요" 해서 나는 반쯤은 스스로에게 힘을 얻고 반쯤은 아내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파이팅. ."하고 소리쳤다.

뜻밖에 가슴이 뜨거운 감정이 솟구치며 힘이 생겼다. 아내의 격려가 내게 힘이 되어 옮겨온 듯 했다.

집에서 시험장이 있는 등촌동까지는 두시간거리였다. 지하철 5호선에 나는 마침 빈자리를 차지해서는 다시 카드를 한 장씩 넘겨본다. 조금씩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찌꺼기처럼 떠오른다.

조금 떠오르면 안 된다. 완전하고 떠올라야 한다. 완전하게. 시험은 오후 2시부터 였다. 200여명이 벌써 1시부터 와서 시험장을 채우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 둘이 보인다. 간단한 목례만 하고 제 노트에다가 눈을 꽂고 있다.

거의 다 수험생들은 까맣게 정리한 노트를 가지고 있다. 기업의 ISO9001을 인증해주기 위하여 심사하는 심사원을 뽑는 시험이 암기식이라니 참 딱한 출제 방법도 다 있다. 하지만 외워야 쓰게 되어 있는 답안지니 피해 나갈 재간이 없다.

나는 노트를 덮었다. 몇 자 더 들여 다 보아야 내 머리는 기억을 못한다. 더 초조해진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 이제 시작이다. 걱정도 한숨도 이제는 금물이다.

지금 내가 못되어 봐야 이 시험에 불합격밖에 더 있는가? 내가 초조해본 들 내 기억을 나를 돕지 못한다. 진정하고 여유있게 시험을 보자.
이번에 떨어지면 다음에 보면 되고 오히려 그 길이 내 인생에 새로운 분야를 더 진지하게 배울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마음이 평온해진다.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 으레 시험 감독관의 주의 사항이 있다. 컨닝하면 동일 종류의 시험에 3년간 시험을 못 본다. 답안 작성은 청색이나 검정의 볼펜으로 하라. 나는 만년필은 어떤가요? 하고 물으려다가 그래 그럼 하고 라미 볼펜을 꺼낸다.

문제지가 나누어졌다. 이미 앞서서 나왔던 문제가 다시 OX문제에서 보인다. 자신감이 선다. 내 기억은 80% 선까지 기억을 해내고 있다.
브라보.

모르고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시험 장소에 오기 전에 파이팅 하고 소리쳐주던 아내의 모습과 그 소리가 보이고 들렸다.
아는 것은 쓰고 아는 것 이상으로 썼다.
두 시간을 나는 다 썼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 함께 시험 본 아는 이도 시험을 잘치루었는지 시험 답안을 맞춰본다.

나는 웃으면서
"나는 안 할랍니다. 틀린 것이 나오면 신경 쓰이고 지금은 다 잊을랍니다."

인생에 있어 시험이 전부가 아니지만 시험이 끝나면 다 잊는 것이 정신 위생상 편하다. 앞으로 합격자를 발표할 10일 후까지 나는 정말로 자유롭다. 인생은 더러 시험이 필요하다.

1998년 7월 9일. Never down
어제 합격자 발표가 있었지만는 오늘 아침에 표준협회 가서야 알았다.
"황선배님, 이름이 안보여요"하고 RT 18기가 말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시험보고 나서 사실 제법 썼다하면서 자신감이 있었다. 아내에게나 아는 사람들이 결과를 물을라치면 자신 만만하게 "수석을 노리고 있지요" 했는데 시험에 떨어졌다.

어제 속리산에서 함께 교육받았던 품기원의 L이 내게 전화를 걸어와
"저는 합격입니다.황선생님은요?"했을 때 나는 나의 결과는 확인은 안되었지만 자신만만하게 그의 합격을 축하했다.

그런데 내 꼴이 참 우습게 되었다. 결과를 아는 대로 아내에게 연락을 해주기로 했었다. 전화를 거니 아내는 내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알고 있다. 아내를 알아듣게 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표준협회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아내 잃은 홀아비 K형은 찰떡 같이 붙었다. 지난 번 실패하고 두 번만에 성공이다. 나는 첫 번이기는 하나 상당히 놀랬다.

노트 정도를 열심히 하고 카드를 만들어서 암기하고 한 번 만의 시험으로 끝내려고 나는 한 껏 여한없이 노력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이다.
뭔가 문제가 있다.

K형이 품질 인증협회를 가서 점수와 시험지를 확인하여 보라고 한다.
다만 몇 점 나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어디서 틀렸는가를 검증해 해보라는 것이다. 시험 공부를 다시 시작할 때 참고가 된다는 것이다. 정말 귀에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여의도에서 서강대학 입구에 있는 경총회관안의 인증원까지 수업을 빼 먹고 달려갔다. 담당자는 예약없이 왔다고 어렵다더니 내 시험지를 보여준다. 매일 보는 내 글씨가 갑작스럽게 낯설어 보였다.

100점 만점에 70점을 맞으면 합격이다. 내 점수는 58점이다. 옆에 있는 당담자 보기 챙피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당혹스럽고 의심스럽다.
진위형, 단답형, 기술형별로 매겨진 점수를 적고 기술형은 문제마다 점수를 적는다. 문제당 4, 5, 6점 짜리가 심지어는 빵점이 두개까지 있다. 대개가 2점, 1점이고 유독 2문제만 만점을 맞은 것이 있다.

이제 또 다른 문제는 마음에는 내 답안이 맞다는 고집이 있고 채점관은 아니라는 데 있다. 그렇다면 채점관을 따라야 한다. 나는 이제 초보이고 그들은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건물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나는 우산도 없이 나왔었다.
머리를 적시는 비에 몰골은 더 초라해지고 마음까지 갑자기 가난해졌다. 시간은 거의 12시가 가까워진다. 강의장에 들어서니 사람들 마다 결과가 어떠냐고 묻는다.

나는 아주 당당하고 기 죽지 않게 말하기를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지요"하면서 마음은 이미 끓는 물에 들어간 녹두가 되어 있었다.

갑자기 인생까지 싫어지고 뭔가가 아득해왔다. 시험에 붙었다고 생계 유지가 되는 것도 당장 몇 푼의 수입이 들어 오는 것도 아니다.

아깐 시험에 대한 대비가 하느라고 했지만는 그 정도 파악밖에 못했냐 하는 자기 비판과 글을 보는 순간에 잊어버리는 기억력이 조금씩 슬퍼지기 시작했다.

점심을 거르는 K형에게 내 몫의 점심 반인 토스트 2쪽을 내가 사들고 온 우유와 함께 그에게 권하면서
"K형 대단했어. 이제 심사원보 등록을 해야지"하고 진정으로 말한다.

간암으로 아내 잃고 어디라할 데 없이 이력서를 내고도 답장이라고는 대단계 밖에 안오는 신세가 된 전직 상무인 K형은 "이걸 따기는 했지만 첩첩산이라. 밥벌이가 안되니 …… "하고 일단은 여유있는 말을 한다.

그 말은 한치의 거짓이 없는 현실이다. 나는 다시 나 혼자가 되었을 때 노트를 가지고 휴게실에 앉았다. 그리고 시험 결과를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기술형에 치중하돼 중점 관리할 사항은 교재 우선으로 하자.

망각속에 벌써 가버린 용어와 서로 연관되는 것을 다시 노트에 묶자.
오늘부터 시험날 까지의 일정 계획을 짜는 레이아웃에 나는 글씨를 채워 놓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NEVER DOWN'이다. 한 번 공부해서 딴 자격증보다 한 번 더 한 것이 내게 득이 될 것이다. 나는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서는 자신을 보면서 인생은 고비마다 배워가는구나 하고 새삼 절감한다.

1998년 8월 29일 몽브랑 아가사가 쓰는 시험 답안지

6장 짜리 시험 문제지의 첫장을 덮은 채 나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고브라의 시뻘건 눈에 내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가사, 그동안 너의 고생이 수월찮았다. 반복하고 반복하고 많이 피곤했지. 오늘, 너는 나와 매일 함께 했던 시간내내 써내려갔던 내용을 빠트리지 말고 이 시험지의 답안지에다 너의 독처럼 쏟아 주길 바란다. 너는 한 번 보았던 것을 잊지 말고 한 번 물면 상대를 쓰러뜨리는 너의 독을 다 쏟아야 한다. 아가사, 이제 시간이 되었다. 너의 능력을 보여다오."

시험장의 칠판에는 시험 답안은 검정색이나 청색의 볼펜으로 쓰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알고서도 만년필을 가지고 왔다.

나와 아가사와의 은밀한 약속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볼펜으로 답안을 쓰는 시험지에 만년필이 안된다면 무슨 경우인가?

ISO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매일 몽브랑 아가사 크리스티 만년필로 첫 글자를 쓰기 전에 나는 내 심정을 말했었다.
"이제 너는 나와 함께 있다. 한 번 쓰고 다시 쓰고 너의 본능과 동작에 관행을 심어주마. 대신 너는 기억해다오. 답안지를 쓸 때 너는 내 머리가 회전될 때 보다 더 빨리 너의 촉으로 썼던 기억을 글씨로 보여다오." 아가사는 나의 말을 알아듣는 듯 했다.

다만 한 자루의 만년필이 무슨 영적 신념과 반응이 있겠는가? 이것은 자기 최면이며 만년필 하나에 마음 의지하는 소심(小心)탓인지도 모른다. 아가사는 제가 아는 문제에 대해서는 불같이 서둘렀다. 나는 그를 따라 갈 수가 없었다. 팔목이 저려올 지경이었다.
진정해라.
천천히.

아가사가 모르는 문제에는 멈짓하고 잠시 꽈리를 틀다가도 꾸준히 꼬리를 흔들며 목표를 물고 검은 독을 뿌리며 흔적을 남겼다.

답안은 채워지고 때로는 진실이 적히고, 때로는 옹색한 허위의 기록을 남기면서 아가사는 제 할 일을 다하고 있었다. 결과는 어쨌든 다만 사물에 불과한 만년필 아가사 크리스티의 응답과 함께 나의 오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1998년 9월 22일 낮술은 괴로워

동병 상련이라는 말도 있고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했다. 여의도 표준협회에서 연을 맺은 RT 선배이며 퇴역 은행 지점장인 선배가 점심내마 했다.

사실 점심의 주빈은 UNIX 전공장장이며 상무이고 홀애비인 K 였다.
ISO시험 노트를 선배가 몽땅 복사를 해서 시험 단 한 번에 ISO 심사원보 시험에 합격을 했다. 나는 열심히 했으나 또 한 차례 떨어졌다.

내 뒷자리에 앉아서 "황형. 좀 보여달라고….. "하더니 선배는 한 번에 승부를 냈고 내 꼴이 우습게 됐다. 나는 요즘 분명히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 기억력이 물건너 가고 있다.

PC의 자판을 때리고 있다가 누가 와서 말을 시키면 중단된 동작부터 기억이 날아가서 기억 챙기기에 다시 시간이 흘러야 한다.

그러나 나보다 5년 더 연상인 선배가 일발필중했다면 내가 공부하는 방법에 무슨 문제가 있든지 노력이 부족했음이 틀림 없다.

남이 한 번해서 합격했고 내가 한 번 해서 불합격했다면 나는 두 번 세 번을 하여야 한다. 선배가 권하는 잔에 나는 대낮부터 취해가면서도 낮술에 교훈을 느낀다.

문제는 제 탓이다. 노력을 하고 최선을 다 한 뒤에 그 최선만으로 만족하라. 합격이 밥 먹여 주는 것은 아닌데 남 뒤를 못 따라 가는 신세가 문득 딱하게도 느껴진다.

낮 술에 취해 만나는 이에 따라 즐겁고 낮 술에 제 자신을 돌아보니 더 돌아 볼 것도 없이 너무나 분명하다. 머리로 안되면 몸으로 때워라. 낮술의 취기는 길기도 길었다.


1998년 11월 02일 시험에는 퇴출이 없다.

시험이 하루 앞에 있어도 초조한 마음은 없었다. 출제 경향을 다 파악했다. 기출 문제에서 시험 문제는 반복 출제된다. 나는 60쪽의 주관식 문제를 반복해서 했다. 처음엔 50점 미만. 70, 80, 90점을 돌파했다. 같은 문제를 반복하니 만점을 못 받는 것이 이상하다.

지난 번 시험 문제는 기출 문제의 복사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렸다. 그런 시험인줄 파악 못한 머리가 돌머리인지? 아니면 기출 문제는 출제가 안됩니다 하는 속임수를 믿은 탓이었다. 객관식 25점, 주관식 75점.

주관식은 이해하고 분석하는 문제 반, 암기해야 쓸 문제 반. 암기 사항을 거의 원문에 가깝게 외우는 자신이 신통했다. 시험 당일 오후 2시에 있지만 아침부터 고덕 도서관에 갔다. 가면서부터 몸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열이 오르고 배가 부글대고 막상 도서관 열람실에 들어오자 여기 저기 기침하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고 발자국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도저히 감당 못하겠다.

그리고 아내가 한 말 "시험 보기전에 초컬릿을 먹으면 머리가 잘 돈대요"하고 사다 놓았던 것을 못 챙겨 왔던 것도 마음에 켕긴다.

이런 일로 켕겼던 일이란 내게는 거의 없었다. 내게는 징크스도 마스코트도 없었다. 다만 늘 가지고 다니는 만년필이 하나라도 없으면 신경 쓰였지만 몽브랑이 없으면 듀퐁이다하는 식으로 태평스러운 점이 내게 있다.

아침까지 멀쩡했다가 거의 반쯤은 죽어서 집에 기어들어 가듯이 들어갔다. 죽을둥 살둥 화장실을 다녀오고 전기 장판을 깔고 들어 누었다.
시험장까지는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한 번 시험에 40만원이 들어 가는 시험이다. ISO 교육을 한 번 받으면 시험을 3번 치를 기회를 준다. 수강료가 100만원이다. 그리고 한 번 시험 볼 때 마다 수험료가 7만원이다.

그러나 이번에 또 떨어지면 다시 100만원을 들여서 수강을 또 해야 한다. 돈도 문제지만 내 꼴도 참 딱하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이 잠재 의식에 깔리면서 아파지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프다고 시험을 피할 수는 없다.

시험을 안 봐도 본 것으로 간주하니 빼도 박도 못할 궁지에 몰렸다. 몸은 가라 앉고 시간은 다가 오고 있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11시. 이 시간에 떠나지 않으면 나는 시간을 맞춰 갈 수가 없다. 몸에 병을 달고 나는 집을 나섰다. 나서서부터 시간 맞춰 수험장에 갈 일이 꿈 같았다.

방화동 인공 폭포를 지나 보건소 건너 전기안전공사까지 나는 숨이 턱에 닿게 갔다. 밭은 걸음으로 갔다고 숨이 차올랐다. 1시 반. 30분을 당겨서 왔다. 전철 연결이 잘되었고 버스도 제때 와주었다. 자리 배치가 시작되고 주의 사항을 알리려는 참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온갖 생각을 다 날려 버렸다. 시험에 대한 생각도 아팠던 생각도 그냥 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무슨 부처가 된 것도 아니다. 반복되는 이런 일이 세 번째니 딱하고 딱하다는 감정부터 삭여야 했다. 시험지가 배부됐다. 전체를 한 번 넘겨 보았다. 시험지는 늘 그렇듯 6장이었다. 주관식 문제 형식이 바뀌어있다. 기출 문제는 단 한 문제만 보인다. 나머지는 암기보다 이해를 위주로 문제가 나왔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왔다. 이거 또 실패인가? 갑자기 시험 문제가 낯설어진다.

국민학교 동창처럼 반갑지가 않고 떠난지 얼마 안되는 직장 동료처럼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진다. 해온 가락이 있어서 답안을 써나간다.
평소에 나는 거의 한자를 써서 답안을 작성했었다. 지난 번 시험때는 거의 한자로 썼다.

불합격하고는 시험 답안지를 확인하러 한국 ISO본부에 가니 실무자들은 "채점관들이 한문을 모르지 않아요"하면서 나를 웃겼었다.

그러나 내가 웃을 일 만은 아닌 일을 나중에 알았다. 채점관들은 한글 맞춤법을 틀려도 감점을 하지는 않지만 영어나 한자가 틀리면 점수를 깎았다.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한자를 한글처럼 쓴다손 쳐도 오자가 있고 내 나름 즐겨 쓰는 약자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스스로 못 느끼고 있었다. 함께 공부하는 한 방 사람이 내 노트를 보고 한자를 몰라보는 것은 내게는 충격이었다.

한자를 쓰면 안되겠다.
한글로 쓰자.
줄줄줄 써내려갔다.
조금은 망설이고 쓸 때는 망설일 것도 없었다.
그냥 써지는 대로 썼다.

시간이 30분 남았을 때 나는 답안지에서 손을 놓았다. 검토고 뭐고 지쳤다. 200여명이 시험을 보고 답안지를 내고 나서는 사람은 10여명이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관식으로 시커먼 잉크로 쓴 답을 고쳐본들 무슨 소용. 그리고 고칠 답도 떠오르지 않을 만치 지쳤다. 지난 번에는 답안을 쓰는데 생각지도 않게 손에 힘이 풀려서 벌벌벌 기듯 썼다.
오늘은 그런 면에서 당당하게 썼다.
합격의 가부는 일단 젖혀 놓고서도 그래도 내 마음이 단단하지 못한 것은 지난 번에 답안지 작성을 했던 몽브랑 아가사 크리스티을 오늘은 쓰지 않았다.

대신 몽브랑 마스터피스 149를 썼다. 엄지 손가락 굵기의 만년필 대는 글을 쓰는 데 아주 편했다. 무엇보다 글 쓸 때 중심이 아래로 몰려서 운필감이 좋았다.

아가사, 미안하다. 너는 좀 무거워 머리가 … 너의 머리에 꽈리를 튼 고브라는 너무 무게가 나가. 합격의 가부를 떠나 시험이 끝나면 신바람이 난다. 아프던 몸도 다 나은 듯 했다.

다만 한 가지 부담스러운 것은 아내에게 전화를 하니
"자기 시험 잘 봤어요? "
하며 당연히 묻고 나는
"보기야 잘 보았지"하고 명랑하게 말했다.

내심 마음 켕기는 것도 없지는 않다.


1998년 11월 11일 또 떨어져

50여명의 합격자 이름에 내 이름은 없었다. 내 뒤에서 지켜보던 아내의 숨소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피가 얼굴로 솟는다. 시간이 순간 정지한 듯했다.

당락의 확률은 반반이었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가나다 순서로 나와있는 합격자 명단을 몇 번 보아도 변함이 없다.

한국 ISO 협회에 전화를 걸어서 점수를 알아보았다.
100 점 만점에 주관식 75점, 객관식 25 점이다.
합격점은 70 점이다.
내 점수는 66. 5 점이었다.
3. 5가 부족했다.
주관식이 문제 하나당 4점, 5점, 6점씩 한다.
거기서 1점씩 4점을 보탰으면 합격이다.

한 참 뒤, 아내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컴퓨터만 하더라"하고 농반 진반 말한다.
틀림없는 말이지만 듣기 싫었다.

왜 3번째 실패를 했는가?
마지막 시험을 볼 때는 나는 내가 ISO강사를 나갈 정도가 되었다고 허풍까지 칠 정도로 했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3.5가 부족한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큰 소리를 쳤지만 실력이 부족했다.
그 점을 스스로 알라.
그러나 3. 5가 부족하다는 것은 또 무엇이 문제인가?

두시간을 치루는 시험에 한시간 반에 하고 나왔을 때는 수험생의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도저히 문제를 풀 수가 없어서 또는 문제가 쉬워서 나는 문제가 쉽다기 보다도 몇 달 공부에 문제를 보면 답이 보일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결과는? 주관식 답안을 쓸 때, 나는 글씨에 신경을 썼다. 잉크는 검정, 지난 번 시험에는 한자로 꽉 채웠으나 채점관들이 한자를 몰라 볼 리야 없겠지만 내가 무심코 쓰는 한자가 일본식 약자에다가 중국식 간자가 더러 섞이면 문제가 있다.

어떤 때는 내가 한자를 잘못 쓸 때가 있다. 채점관들은 한글 맞춤법이 틀린 것은 관대하지만 한자나 영어 철자가 틀리면 감점을 한다.

이번에는 한글로 거의 쓰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쓰는 한자는 어쩔 도리가 없이 써졌다.(썼다가 아니라 저절로 쓰여졌다. )

시험전에 능률 협회에서 함께 공부하는 K 형이 내 노트를 보면서
글씨를 못 알아 보면서 1시간을 그에게 잡혀서 내 글씨를 번역? 해준 적이 있었다.
내가 쓴 글씨의 상당량을 그는 몰라보았다.
처음엔 그랬다.
지금은 알아보지만 한문도 못알아보는 것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 글씨체는 어떤가?
상고를 다니면서 나는 펜글씨로 궁서체를 배웠다.
그 글씨의 정자를 알아보기 쉽다.
그러나 글씨도 나이를 먹는다.
글씨가 흘림체로 된다.

책방에서 파는 한글 펜글씨교본을 보면서 나도 책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정도의 자긍심이 있는 나다.
혼자의 자존심을 떨치게 어떤 때는 내 글씨보다 나은 글씨를 찾아서 책방을 두지지만 없었다.
대신 가끔 국전에서 대상을 받은 글씨의 사진을 책상 유리판에 깔아 놓고 글씨를 가끔 베낀다.
그 글씨도 마음에 안찬다.
알아보기 쉽고 글씨 획이 아름다우면서 단순한 것은 없을까?
아내에게
" 글씨 덕에 몇 점을 놓친 것 같아. "
했다.
" 맞아 맞아. "
하더니 아내는
" 이런 식야. 액자의 글씨는 멋있고 그럴 듯 하잖아. 그러나 읽어 보려면 모르는 거야. 자기 글씨가 그래. 멋은 있는데 해석이 안돼."

모자라는 점수는 글씨 때문이라고 아내의 동의를 얻었다. 다음 시험엔 글씨를 또박 또박 쓰라고 단단히 교육까지 받았다.

그리고
나는 마음을 다시 진정했다.
괴로워하느니 다시 일어나야한다.
여기저기 전화를 거니 교육비가 100만원에서 56만원까지 한다.
마침 지금 교육 받고 있는 능률협회에서 이달 23일부터 5일간 다시 교육이 있다.

신청을 했다.
3전4기 하자(7전팔기의 오타가 아니다. )
이번 공부는 두 가지를 하여야 한다.
ISO 와 펜습자 연습이다.
일 못하는 놈 연장 탓 한다더니
내가 그 꼴이다.


1998년 11월 27일 난 나 , 넌 너가 아니야

시험을 보려면 다시 교육을 받아야한다.
마포의 능률협회에 수강료 내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1주일 과정이다.
이번 교육에는 내가 나서기를 많이 나섰다.
어제는 그동안 10번에 거친 기출 문제와 모범 답안을 받았다.
모법답안이란 정답이다.
정답은 수강생들이 다음 시험을 보는 기준이다.
두 번에 걸친 ISO 강좌 동안 나는 벙어리였다.
앞 뒤를 알 수가 없었다.
모르면 질문이 없다.

그러나 같은 교육을 세 번씩 받으면서 나는 좀 아는 게 생겼다.
이번에는 많이 나섰다.
오늘도 마찬가지 경우였다.
1회의 문제지는 두 시간이 뻐근한 과제지만 나는 이미 보았던 문제라 10회분 문제지 중 객관식 부분은 아침에 집에서 마포를 가는 동안에 보았다.

강사가 모범 답안이라고 한 것에서 오류가 나왔다.
그냥 지나치면 수강생들은 잘못된 답을 가지고 시험 공부를 하게 된다.
시간 중에 강사는 틀린 답으로 강의를 한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내가 나섰다.
" 답은 그게 아니고 이겁니다"
하니
" 아, 지난 번에 고치라고 한 것이 그냥 나왔군요. "
한다.
다시 내가 또 다른 답안의 오류를 말했다.
" 아, 그 것은 오타가 났군요. "
한다.
내가 또 못 참는다.
"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시정 조치해야 겠습니다. "
했다.

하고서는 내가 지나쳤구나하고 느낀다.
여러 사람 앞에서 강사를 너무 몰아세웠나?
난 체하는 자를 경멸한 내가 몇 개 아는 것을 가지고 오류에 빠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련다고 나서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가?
함께 수강 받는 이들에게 도움보다 미움이 되어 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600쪽의 책을 30쪽으로 정리한 서브 노트를 가지고 있다.
나만 보면 된다.
그러나 12월 시험을 보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노트였다.
그 노트를 가지고 두 명이 합격을 한 노트였다.
내 앞의 한일건설 김 상무께 보여 드려도 별 반응이 없다.
그러면 그만 두면 될 것을 또 내가 하는 엉뚱한 소리라는 것이
" 이 노트 정리에 15일이 걸린 것입니다. 이 것을 복사해서 가지면 그만큼 시간을 법니다. 물론 노트란 자신이 해야지요. 그러나 이것은 자기가 노트를 하더라도 훌륭하게 도움이 될 만합니다.
이런 기회를 만난 것이 행운인데 모르는 체 하는 모습을 보면 참 딱합니다. ISO 인증심사원이라는 것이 무업니까? 품질 감사를 하기 위한 자료 수집이 첫째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다 갖다 주는 떡을 모르는 군요"하고 내가 참 한심한 말을 한다.

그 노트를 돈 받고 파는 것도 아니다.
함께 공부한 인연으로 도움을 주려고 했다.
내 말에 금세 반응이 왔다.
우리 조와 옆의 조에서 금새 복사를 하겠다고 내 노트를 빌려갔다.
공부를 열심히 많이 할수록 내 경쟁자만 많아지는 걸.
어떤 때는 내 안에 나 말고 다른 존재가 있는 듯이 느낀다.
오늘은 3번째 받았던 ISO 교육의 수료일이다.

김상무는
"공부 그만 해요. 너무 해서 문제예요"한다.
그 분은 환갑이 넘으셨고 서울대 건축과 졸업에 건축기술사 이고 지금은 한일 건설에 있다.
그 연만한 나이에도 인증심사원이 되겠다고 공부를 하는데 뭔가 도움을 드리자 했던 것이 내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내 자신은 3번을 연거푸 시험에 떨어지고는 남들 일에 나서는 꼴이 참 우습긴 우습다.

언제 만나자 하는 기약 없이 다들 서로 헤어졌다. 내가 받은 인사는
"다음 시험에 꼭 붙어요"하는 덕담이었다. 덕담을 듣는 것만으로 나는 기쁘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내 것을 남에게 주는 버릇과 혼자 알고 삭이지 못하는 버릇이었다.


1999년 3월 13일 주관식 문제에 빵점이 웬말?

작년 3월에 회사를 그만두고 품질 환경 인증 심사원이 되기 위하여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12일에 발표가 났습니다.
또 떨어졌습니다.

한국경제일보사가 있는 충정로 그 건물이 한국품질인증원이 있습니다.
답안을 열람하니 주관식 6개가 빵빵빵입니다. 내 점수는 60점이고 합격점인 70에서 10점이 부족합니다. 주관식 문제 하나 하나는 3점에서 5점까지 입니다.

나는 시험 공부를 하다보면 시험에 나올 문제가 짐작이 되는 법입니다. 답안 작성은 한문과 한글을 섞어서 마치 펜습자 글씨 본처럼 정성껏 썼습니다. 그러나 덧없는 일입니다. 나는 다시 4월에 또 시험을 보아야 합니다. 밥벌이할 시간이 자꾸 멀어집니다.


1999년 5월 11일 5전6기, 드디어 합격

작년에 공부를 시작한 뒤 시험을 보는 족족 떨어졌던 ISO 심사원보 시험 합격자 발표가 오늘 하이텔과 유니텔에 있는 날이었으나 나는 감히 통신을 열지를 못했다.

이번에 떨어지면 다시 돈 100만원을 들여서 다시 재교육을 받아야 할 판이었다.

아내는
"자기가 알아서 봐요. "
하면서 궁금했던 눈치였다.

그 참에 메일에 들어온 정다운 이름들의 안부 묻는 일에 힘을 얻어(진짜, 진짜)유니텔을 열어서 합격자 명단을 보니 합격자는 77 명이었고 77번째가 아이러니콜하게도 내 이름이었다.

이 시간까지 깨어있는 아내에게 알려주고 아내는 내 뺨에 뽀뽀를 해주었다. 오전육기의 승리였다. 실패했어도 나는 다시 시작할 참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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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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