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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이와 머무르는 이...

이야기가 잠깐 딴 곳으로 흘렀군요. 다시 섬진강에서 섰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잠시 이제까지의 이야기와는 조금 성격이 다른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군요. 바로 저처럼 어쩌다가 이곳을 들리는 사람들이 아닌 이곳에서 대대로 한 평생을 살아온 이들과 이방인들에게는 단지 아름답게만 보이는 섬진강의 역사에 대해서 말이죠.

흔히 시골을 찾은 이들은 맑은 공기와 새소리, 녹음이 짙은 수풀에 대해서 찬사를 늘오 놓습니다. 허나 그곳에 뼈를 묻는 이들에게 그런 것들은 단지 삶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이는 그들이 멋과 낭만을 모르는 무미건조한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그곳이 그들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기 때문이죠. 당신께서도 잘 아실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이처럼 섬진강이 저 같은 이에게는 감정의 정화를 하게 해 주는 장소이지만 그곳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을 연명할 수 있는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터전이랍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강을 바라볼 때 미추의 개념이 아닌 용도의 개념으로 보죠.

그러한 태도가 너무 인간중심적이라고 비난하진 마십시오. 어쩌면 그들의 그러한 태도로 인해서 자연은 계속 그 본질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니까요. 진정 그 곳에서 자신들 삶을 계속 누리고자 하는 이는 자신들이 먹고 살만큼만 자연을 이용하지 결코 그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별다른 고민없이 자신들의 쾌락만을 위해 자연을 찾는 이들이 훼손하죠.

이곳 섬진강 주변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 곳이기도 하지만 치열하고 처절했던 우리 조상들 삶의 애환이 곳곳에 서린 곳입니다. 두꺼비 전설처럼 고려 시대 잦은 왜구의 침입과 임진왜란 때 전라도 지역 최초의 전투가 벌여진 곳이자 조선말기 수탈에 항거하는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제 시대 항일 의병이 치열하게 일어났던 곳입니다.

제가 섬진강의 역사성와 시대성을 언급하는 것은 위에서 나열한 사실뿐만 아니라 불과 50십 년 전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의 화마가 이곳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가장 고통스럽고 서글픈 역사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죠.

지리산 줄기 곳곳에서 투쟁한 빨치산과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 투입된 군경의 치열한 전투현장이 있고 그들 사이에서 죄 없이 죽고 다친 이들-그러함에도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오히려 빨갱이로 몰렸고 아직까지도 숨죽여 사는 이들-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아직까지도 지리산 골짜기에 그 당시 죽은 이들의 유골이 발견된다죠.

섬진강은 단순히 저무는 노을과 백사장의 아름다움만을 간직한 곳이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아픔을 소리없이 모두 담아서 유유히 흘러가기에 진정으로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 것입니다. 흔히 한은 승화되어야 한다고 하죠.

맞습니다. 섬진강은 바로 이곳의 피맺히고 절규하는 한을 보듬어주고 어루만져주면서 그 한을 삭게 하는 힘을 주는 곳입니다. 혹시나 이런 말을 이 지역 분들이 들으신다면 그러시겠죠.
'다 씰데 없는 소리여. 어디 자네가 한 번 당혀봐. 그게 그리 쉽게 삭혀지나. 안 돼. 내 가심엔 못이 박혔어...'

맞습니다. 제가 한 말은 지극히 감상적입니다. 다만 섬진강은 알게 모르게 그러한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건 섬진강을 읊은 시와 수필들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치열함과 순박함...

전 끝내 강속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날씨도 날씨려니와 아무런 준비를 안 했기에... 솔직히 물 속에 들어갈 준비를 해왔다 하더라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네요. 순수하고 깨끗함은 바라만 보는 것으로써 그 맛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물 속 조그마한 돌과 결정들을 만져 보았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들은 탐욕의 대상이 아니기에 그 자태가 어떤 보석보다도 곱고 화사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제는 제 마음에서 사라진 동심이 다시금 살아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 강물에서 숨쉬고 있기에 그리고 한없이 따사로운 햇살을 받기에 더욱 순백의 빛을 발했습니다.

이제는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더 머무르고 싶지만 떠나야 다음에 왔을 때 섬진강의 참모습을 다시금 느끼겠죠. 물론 전 이곳의 참 모습을 완전히 알지 못했고 이곳의 애환과 현실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떠납니다. 전 어쩔 수 없는 나그네일 뿐인가 봅니다.

다만 이곳을 찾은 덕택에 조금이라도 제 마음을 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이곳의 현실을 느껴야한다는 다짐을 했다는데 위안을 가져봅니다.

바랍니다. 이 아름다움과 깨끗함이 오래도록 유지되기를...
그러기 위해선 이곳 사람들의 치열함과 순박함이 계속 이어나가야겠죠.

섬. 진. 강. 삼행시

섬 : 섬진강은 알고 있다
진 : 진저리치도록 몸서리치도록 피맺힌 한을
강 : 강물은 그 한과 아픔을 조용히 보듬어안고 바다로 바다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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