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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사흘째 배가 뜨지 못합니다.
그 사이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바람이 한 번 불면 적어도 이삼일은 배가 다니지 못하는군요. 나도 갈수록 오고감에 무감해지는 듯합니다.
세상에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일찌감치 군불을 지펴놓고 들어왔습니다.
오랜 시간 밖에서 일하느라 얼어버린 손과 발을 따뜻하게 달궈진 아랫목에 넣습니다. 시간이 가도 손발은 따뜻해질 줄을 모릅니다.

여러해 전 겨울입니다.
그때 나는 을지로 3가 지하철역에 내려 명동성당쪽 지하도를 걷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지나는 길이었고 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걸인들을 나는 무심히 지나치곤 했었지요. 자비심이 부족해서인지 나이가 들면서 나는 걸인들에게 무엇인가를 나눠 줘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나 또한 별반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자괴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그들의 처지가 몇몇 착한 개인들의 자선만으로는 결코 개선 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나는 어떠한 걸인도 외면했었지요.

그러나 그날 아침 처음 본 그 할머니만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님과 떨어져 할머니 밑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서 였는지, 아니면 너무도 평화로워 보이는 할머니의 모습 때문이었는지,
나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끌려 할머니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할머니에게 가면서 나는 주머니 속을 뒤적거렸습니다.
얼마를 드려야 할까.
어디 모시고 가서 따뜻한 국밥 한그릇이라도 사드려야 하는 건 아닐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머리 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오고 갔습니다.

할머니 추우시죠.
나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말을 물어보며 무안함을 감추려 했습니다.
할머니는 그냥 웃기만 하시더군요.
할머니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따뜻한 밥 한그릇이라도 사 잡수세요.
나는 기껏 5천원짜리 한 장을 내밀며 생색을 내려 들었습니다.

순간 평화롭게 웃고 계시던 할머니의 표정이 바뀌었습니다.
젊은이 그렇게 큰 돈을 함부로 쓰면 못써.
나는 그렇게 큰 돈 필요 없으니까 5백원만 줘.
아니에요 할머니, 많지 않으니까 받으세요.

나는 억지로 할머니 손에 돈을 쥐어 드리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한사코 손을 뿌리치셨지요.
할머니 잔돈이 없어서 그래요. 어서 받으세요.
잔돈이 없으면 그냥 가.

나는 할머니의 완강한 거절에 밀려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어른이 된 뒤 처음 시도했던 나의 적선은 그렇게 무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 자리에 할머니는 없었습니다.
을지로 일대 지하도를 다 뒤지고 다녔지만 할머니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후로 몇 번의 겨울이 무심히 흘러갔습니다.
인간 세계를 닮으며 변화해 온 자연은 또한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습니다. 겨울은 유독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더욱 혹독한 시련을 안겨다 줍니다.

이 겨울, 누더기를 걸치고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들고 할머니는 또 어느 거리, 어느 지하도 속을 떠돌고 계실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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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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