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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진(33) 사장은 요즘 멋진 헤어스타일로 사내에서 인기만점이다. 갈색 톤의 브릿지 스타일에서 최근에는 아예 앞머리를 금발로 염색,자유분방함을 한껏 뽐내고 있다.
코스닥기업 CEO로 믿기 어려울 만치 개성이 넘친다. 염색한 이유는 직원들과 더 친해지기 위해서다. "규모가 커지면서 직원들과 조금씩 멀어지는 것같더라구요. 나 그렇지 않다. 부담없는 사람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강남 삼성동 사무실에서 만난 김 사장은 한 눈에도 무지하게 바쁜 CEO임을 알 수있다. 연이은 해외출장의 빡빡한 일정중에 만난 김 사장은 국경을 넘나드는 해외진출사업 이야기를 할 때면,좀처럼 마침표를 찾기 어려운 달변이다. 연신 의욕넘치는 청사진을 쏟아낸다.
그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이는 동안(童顔)이다. 큰 눈과 장난기어린 눈빛은 금새라도 웃음을 터뜨리며 장난을 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는 겸손하기로 소문이 난 CEO다.
시가총액 4000억원을 넘나드는 코스닥 황제주로 대접받고 있지만 특유의 겸손함과 친절함을 잃지 않고있다. 엔씨소프트는 온라인 게임 ‘리니지’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벤처기업.
창업 2년만인 올해 매출은 550억원. 올 여름 코스닥에 등록하자 마자 새롬기술, 다음커뮤니케이션즈 등 내로라하는 코스닥대표주를 제치고 IT종목중 시가총액 1위로 뛰어 오른 신데렐라 '코스닥 황제주'다.
◆ 아래아한글 개발주역
김 사장은 서울대 전자공학과 85학번 출신. 그는 대학 2학년때 서울대 컴퓨터동아리활동을 시작하면서 그 유명한 아래아한글 개발에 입문하게 된다.
당시 컴퓨터동아리에는 한글과컴퓨터를 창업,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던 이찬진(현 드림위즈 대표이사)씨를 비롯해 아래아한글 개발주역이었던 김형집(나모인터렉티브 연구소장), 우원식(나모인터랙티브 연구원)씨 등 3명이 워드프로세서 개발을 준비중이었다.
그래픽카드를 개발할 사람을 찾던 중 동아리 멤버 가운데 어셈블러 전문가로 통하던 김 사장을 합류시켰다. 그는 GUI(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및 그래픽처리 쪽을 개발했다.
시작한 지 1년만인 89년, 국내 최초 워드프로세서 ‘아래아한글’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아래아한글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화면에서 보이는 대로 글자가 찍혔던 아래아한글 초기버전은 당시로서는 세계 최초로 그래픽기능을 갖춘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89년 한글과컴퓨터가 창업됐지만 김 사장은 한컴에 합류하지 않았다. 김 사장은 이미 대학원 2학년때 한메소프트란 회사를 창업,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있었다.한메소프트는 한컴과 비슷한 시기에 ‘한메타자교사’란 워드프로세서를 내놓았다.
◆ 첫 사랑의 아픔, 그리고 미국행
89년은 김 사장에게 고통의 세월이었다. 7년간의 사랑이 깨진 것. 첫사랑의 아픔은 너무나 컸다. 실연은 그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흔들며, 그를 혼돈의 세월로 몰아 넣었다.
헤어진 이유는 '너무 일에 빠져있다'는 것 때문. 당시 김 사장은 컴퓨터하고 살다시피했다. 오로지 개발에만 몰두했다. “자유로운 창작을 가능케하는 컴퓨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컴퓨터는 저의 삶이었죠.”
끝없이 밀려드는 무력감,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현대전자의 해외근무 입사제안을 받고,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90년초였다. 현대전자 미국 보스턴연구소는 SW를 개발하는 곳이었다.
1년6개월 미국생활은 그야말로 외로움과의 처절한 싸움, 그 자체였다. 잠자는 숙소는 홑이불이 전부였다. TV도,어떤 생활용품도 없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야말로 '짐승'처럼 살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실연의 아픔을 견디기 위해 시작한 이국땅에서의 고통스런 삶은 훗날 그에게 엄청난 사업적 모티브를 제공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행운은 곧 찾아왔다. 91년 그는 컴퓨터용 TCP/IP의 등장을 접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송제어프로토콜로 풀이되는 TCP/IP는 말그대로 인터넷의 기본을 이루는 통신규약체계.
TCP/IP는 PC로 인터넷을 가능케하는 기술이다. 컴퓨터에서 인터넷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접한 후 그는 미칠듯이 프로토콜 연구에 매달렸다. 누구보다도 먼저 인터넷의 근본을 다루는 기회를 잡았고, 이는 물론 훗날 그의 소중한 사업적 토대가 된다.
◆ 거칠 것없는 세월
그가 귀국을 결심한 것은 옛애인이 결혼한다는 친구의 귀뜸때문. "정말 마음속으로 포기가 되더라구요." 그는 곧바로 짐을 쌌다. 91년 여름 비행기안.
온통 TCP/IP생각뿐이었다. 귀국하자 마자 그는 꼬박 1년간 TCP/IP개발에 매달렸다. 미국 FTP사의 소스를 가지고 와 현지화하는 작업을 했다.
일치감치 모든 환경이 인터넷으로 바뀔 것임을 간파한 김 사장은 이 때부터 프로그램개발자로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92년 TCP/IP기반 그룹웨어, 93년에는 세계 최초 인터넷기반 PC통신인 아미넷(현 신비로)을 개발했다.
당시 천리안등은 BBS(사설게시판)수준인 반면 신비로는 지금은 널리쓰는 웹메일, 웹게시판, HTML에디터 등의 기능을 갖추고 있는 파격적인 서비스였다.
◆ 송재경과의 ‘운명의 만남’
95년 출범한 신비로사업이 현대전자와 현대정보기술사이에 끼여 입지가 애매해지자 그는 곧바로 퇴사했다. 밑의 직원 17명을 데리고 나와 97년 3월 엔씨소프트를 창업했다.
이에앞서 95년 가을, 한컴에서 아래아한글 윈도개발을 도와달라고 SOS가 왔다. 개발자를 데리고 한컴에 파견근무를 했다. 김 사장은 이 곳에서 리니지개발주역인 송재경씨(34.현 엔씨소프트 개발이사)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송씨는 국내 최초 그래픽머드게임인 '바람의 나라'를 개발했던 인물.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졸업후 KAIST전산학 석사과정중 한컴에 입사, 개발을 맡고 있었다. 발군의 개발기획력과, ‘머드게임 개발이 꿈’이라는 송씨의 말을 듣고 김 사장은 "바로 이 사람이야"라며 탄식을 질렀다.
이심전심이었을까? 둘은 마음이 통했다. 넥슨을 설립했던 송씨는 특례문제가 걸려 대표이사를 맡지 못할 때 김 사장에게 넥슨을 맡아달라고 제안을 할 만큼 둘의 신뢰는 두터웠다.
하지만 선배회사 직원을 빼돌릴 수는 없는 일. 무작정 기다렸다. 송씨는 96년 허진호씨(현 아이월드네트워킹 대표이사)가 세운 아이네트로 옮겨 게임개발팀장을 맡았다. 송씨는 아이네트에 있으면서 이미 '리니지'를 한참 개발중이었다.
기다린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던가. 아이네트가 게임사업을 방출키로 결정한 것. 98년초 김 사장은 송씨를 극적으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리니지의 성공에는 또다른 '운명의 만남'이 있다. 현 엔씨소프트 이사인 이희상씨. 김 사장은 역시 95년 한컴 파견근무시 그 곳에서 일하던 이씨를 처음 만났다. 프로그래머인 이씨는 곁에서 도와줄 망정 절대 앞에 나서지 않는 야인(野人)스타일.
그는 프로그램개발의 해결사였다. 이씨는 아래아한글 개발시 가장 어렵다는 디바이스개발을 총괄했던 인물.김 사장이 송재경이사와 함께 이희상씨를 영입하려한 것은 두 핵심개발자들이 최고의 콤비이기 때문이다.
둘은 이미 '바람의 나라'를 같이 개발했던 게임개발의 고수들이었다.하지만 둘의 연결고리는 매우 약했다. 김 사장은 두명의 핵심멤버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송이사는 창의성(Creative)을 바탕으로 한 아키텍처를 잡는 데 일인자입니다. 반면 이희상 이사는 이런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현실적인 문제를 푸는 귀재죠. 사용자들의 어려움을 찾아내고, 이를 편하게 구현하는 그의 프로그래밍기술은 세계 최고죠”
97년 겨울부터 이씨를 설득, 무려 3년이 지난 올해초에야 엔씨소프트 직원이 됐다. 김 사장은 이를두고 ‘삼년초려’했다고 파안대소했다.
◆ 대박의 꿈
98년 10월 운명의 리니지 상용서비스를 시작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PC방을 통해 유료 제공하기 시작한 리니지는 '스타크래프트'일색의 게임마니아들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최초로 살아움직이는 비쥬얼과 액션은 상상력에 의존했던 기존 덱스트 머드게임의 지루함을 순식간에 털어내며 게임마니아들을 흥분시켰다. “네트워크 게임을 처음으로 재미를 단순화해 현실감있게 보여주고 쉽게 이용할 수있게 해준 게 성공요인이었던 같습니다.”
그해 12월말 동시사용자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 해를 넘겨 99년 들어서자 직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시 큰 게임업체들의 매출은 고작 월 3000만~4000만원수준.
하지만 리니지는 3개월여만에 월 2억원의 매출로 이어졌다. 이어 분기당 매출은 계속해 두배로 뛰었다. 4억원, 8억원, 16억원…99년 4/4분기에만 3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두 배 행진은 올해에도 이어지고 있다. 64억원은 분기가 바뀌면서 128억원으로, 2000년 4/4분기에만 2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올해 매출 550억원, 순익 220억원.
오프라인에서 리니지게임의 무기를 구입하려고 몇 십만원을 주고받는 등 사회적 문제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99년 한해는 전국의 게임마니아들을 리니지열풍속으로 몰아넣었다.
◆ 김택진의 꿈
김 사장은 정직과 투명한 경영을 원칙으로 삼고있다. “말단직원도 회사의 모든 것을 알수 있도록 했습니다. 가장 투명한 회사를 만드는 게 저희들의 꿈입니다.”
김 사장은 CEO는 서비스맨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CEO는 직원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하고,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서비스맨입니다. CEO가 권리를 주장하고, 군림하려고 하면 벤처가 아니죠.”
김택진의 CEO론은 간단하다. “서클과 같은 분위기, 멤버들의 꿈을 실현할 비전을 만들고, 그것을 실무자들이 실천할 수 있도록 조정해주는 밸런스 역할만 하면 되죠.”
김 사장은 국내에서 가장 모범적인 회사, 가장 표본이 되는 경영스타일을 만들어보는 게 꿈이다. 그래서 그는 무조건 원칙대로 한다. 현재 엔씨소프트 직원들은 30%의 지분을 갖고있다.
김 사장이 자신의 지분을 떼내 직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준 것들이다. 70%대의 김 사장 지분은 그래서 지금은 33%수준이다. 요즘 그는 부쩍 해외출장이 잦다. 대만진출에 이어 미국, 중국, 유럽 등지를 살피느라 한달에 20일은 외국에서 보낸다. 리니지를 미국, 일본 등지에서 서비스하기 위해서다.
“리니지를 세계적 브랜드로 키워 전세계 게임마니아들이 즐길 수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이미 2004년까지의 세계진출계획이 꽉 잡혀있다. 인터넷온라인게임 종합회사를 만드는 게 그의 두번 째 꿈이다.
그래서 그는 게임외에 다른 쪽에 눈돌릴 틈이 없다. “저희들은 온라인게임을 잘한다고 다른 분야도 잘할 수있을 거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존 사업에만 집중할 계획입니다.”
김택진. 자그마한 체구의 그는 국내는 물론 세계 온라인게임 시장을 향해 거친 호령을 하고 있는 거인으로 우뚝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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