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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내린 겨울비 때문인지 명동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옷깃이 굳게 여미어 있고 거리엔 이미 크리스마스를 맞은 듯 캐롤과 산타복장이 축제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비단 희망은 크리스마스선물을 준비하러 명동에 온 사람들뿐만이 아닌 명동성당에서 파업을 진행중인 한국통신노조원들에게 더 큰 희망이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싸우지 않는자 어찌 해방의 의미를 아느냐?♬"라는 한국통신노조가를 힘차게 부르는 노조원들에게 이미 추위나 배고픔은 중요한 욕구가 아니었다. 머리나 손목엔 '물러설 수 없다 총파업'이라고 쓰인 노란 손수건이 열심히 흔들리고 '불나비'와 '또 다시 앞으로' 등의 노래를 부르면서 승리에 대한 확신을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느끼고 있다.

"비 맞고 춥지만 이겨내야 합니다 이 시간을 지켜내지 못하면 한통노조는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는 사회자의 결의에 찬 목소리가 잠시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던 노조원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파업기간엔 술 먹고 휘청거리지 맙시다. 휘청거리면 밖으로 내보내자"라는 사회자의 말에 "지금 열 받는데 좀 마실 수도 있지..."하는 농담이 들리기도 한다.

사회자의 말처럼 술을 사가지고 농성장으로 들어가려는 노조원들을 한국통신 총파업 사수대들이 때아닌 치밀한 수색으로 찾아내 거리에 그냥 쏟아버리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날씨는 더욱 쌀쌀해지고 잠시 추위를 이겨볼 생각으로 밖에 나가려는 노조원에게 "이길 수 있는 싸움이다 힘내자!"라는 말로 다시 자리로 돌려 보낸다.

어느새 명동성당 계단은 물론 명동성당 앞마당까지 노조원들로 가득하다. 얇은 비닐과 비에 젖은 종이 박스로 어설픈 천막을 치고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는 노조원들, 멀리서 온 친구들과 담배 한 모금에 그동안의 회포를 푸는 모습도 보인다.

한국통신 파업에 함께 하고자 한총련 학생들과 민주노동당 학생그룹이 좀 늦게 상경한 지역 노조원들에게 "저희들도 함께 투쟁하겠습니다 힘내시고 꼭 승리하세요"라는 말과 힘찬 박수를 보내자 미소와 함께 "총파업승리!"를 연신 외치는 한 노조원 덕분에 잠시 웃음바다가 되기도 한다.

"지금 물품과 음식이 경찰의 저지에 막혀 조금 늦어지고 있습니다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참아 봅시다" 하는 목소리에 민중의 곰팡이(?) 경찰과 현정권에 대한 분노를 담아 힘차게 구호를 외치고 명동성당이 떠나가라 함성도 지르는 모습이다. 단일노조로는 최대의 노조원을 자랑하는 한국통신 노동조합인 만큼 파업에 대한 결의 또한 추위를 녹일 만큼 뜨겁다.

"우리 남편 좀 불러 주세요 남편 옷이랑 여벌로 몇 벌 더 가져왔는데 이것 꼭 전해 줘야 되요"라는 한 아주머니의 부탁을 받고 한 사수대원이 급히 전화를 건다. 몇 분 후 때 아닌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지고 아주머니는 힘내라는 말과 함께 옷가지를 건네준 뒤 애써 눈물을 감추고 돌아선다.

명동성당 앞엔 얼마 전 새로 설치한 공중전화 박스 윗쪽엔 지금 파업중인 한국통신이라는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설치 후 시험전화만 했던 전화로 가족의 안부를 묻는 노조원들의 모습도 보인다. "총파업 승리하여 평생직장 사수하자!"는 구호들이 자꾸 힘들어지는 노조원들의 가슴 속에서 맴돌며 오늘 미사를 알리는 명동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희망이 되어 총파업 승리에 다가가고 있다.

산타가 줄 선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힘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만들려는 한국통신 노조원들 모두는 이미 누구나 스스로에게 선물할 희망꾸러미를 간직한 산타가 되어 추위를 녹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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