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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에 보면 남문동쪽 제주최초의 사학인 귤림서원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오현단 자리이다. 그 귤림서원에 배향됐던 오현의 사상과 문화를 후세에 전승하기 위해 귤림서원과 오현춘추제를 복원해야 한다는 '오현조사' 용역보고가 나왔다.

이는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소장 고창석)가 11일 제주시에 '제주오현 조사'용역을 보고하며 제기된 것이다.

제주 오현은 유배·목사·어사로 제주에 왔던 사람들 중 귤림서원에 배향된 다섯 명의 현인을 말한다.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펴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제주에서 사사(賜死)받은 충암 김정(1486∼1521), 중종때 김안로에 반대했고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규암 송인수(1487∼1547), 제주에서 역모를 꾀했던 소덕유와 길운절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제주에 안무어사로 파견됐던 청운 김상헌(1570∼1652), 광해군 주위에 정항같은 무리가 있어 영창대군을 죽음에 몰아넣었다며 영창대군의 처형이 부당함을 상소하다 제주 대정현에 유배된 동계 정온(1569∼1641), 남북노소론으로 정쟁이 심했던 당시 정실이 아니던 장희빈이 왕자를 낳자 숙종이 원자로 책봉한데 반대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유배왔다 돌아가던중 사사당한 우암 송시열(1607∼1689)등 5인이다.

오현의 유래는 1578년 조인후 판관이 충암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충암묘와 인재양성을 위해 지었던 장수당에 연원을 둔다. 그래서 제사와 교학의 기능이 확대되어 귤림서원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보고서는 유배기간중 제주지역 교유에 힘썼던 오현에 대한 체계적인 학술조사와 새로운 조명이 제주역사의 정체성을 밝혀줄 것이라고 보고했다.

오현의 제주입도와 행적을 살펴보면 제주유학의 역사와 당대의 지성풍토, 규범체계, 생활관습 등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새롭게 조망된다는 것이다.

제주 오현은 학문적 도통의 확립을 둘러싼 치열한 이념논쟁이 아니라 목민관이나 유배등을 통해 제주에 입도한 유현들로 선정돼 제주의 지정학적 위치와 관련한 상호 설명이 되고 조선조 제주 교학질서를 해명하는 방향을 암시해준다.

이 보고서는 도시문화와 관광에서 제주 오현의 관광적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오현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기 위해선 제주성지 및 오현단 복원정비 계획에 제주향토 수종인 귤나무를 심어 귤림서원을 복원하고 오현영정을 배향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 하다고 했다.

아울러 우암의 친필각자를 재차 음각한 '증주벽립'마애명과 적려유허비, 조두석 등 유물의 보존과 주변경관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들의 재정비보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탐라문화연구소 연구보고에서는 역사·도심·유배문화 공간으로서 제주성지와 오현단이 복원이 이뤄지고 교육문화축제로서 오현춘추제가 자리할 수 있길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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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학신문기자, 전 제주언론기자, 전 공무원, 현 공공기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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