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 근처에 동호회 사람이 살고 있다. 좋은 사람들은 그저 불편해 하지 않고 그 곳으로 모여 하룻밤을 지새거나 더한 경우엔 삼사 일도 지내고 가는 집이다. 다행히 그가 혼자 살고 있기에 나그네 기질을 가진 이에게는 얼마나 행복한 곳인지.
엊그제 제자가 올라와 그 곳에 있다는 소식을 받고 달려갔다. 늘 보고 싶어하면서도 그 쉬운 편지글 한 통 못 보내고 쉬운 문자 메세지 하나 보내지 못해 얼마나 미안했는지.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미안한 일이지 싶다.
지하철을 빠져나오면서 하늘을 보았다. 저녁밥을 먹을 무렵이라 사람들은 손에 반찬거리를 들고 집으로 들어가거나, 바삐 어디론가 발길을 놓고 있었다. 산이 가까이 있어서일까. 지하철 속에서 답답했던 가슴 속을 밀어내고 찬바람이 문을 제낀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려 산바람을 마시고 부랴부랴 마음 바쁜 발걸음을 놓는다.
문을 열지 않아도 끼득끼득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는데, 녀석을 보는 순간 내가 먼저 안아버렸다. 알고 니 녀석은 서울을 올라온 지 오래되었단다. 그냥 바쁠 것 같아 이제야 연락했노라고. 저녁을 같이 먹고 작은 방에 앉았는 데 주인인 그가 뭔가를 오려내놓고 있었다. 하도 반듯하게 오려놓은거라 맨처음 사진인 줄 알았다.
아! 사진이 아니었다. 달력이었다. 묵은 달력이 달에 맞는 풍경을 갖추고 있었는 데 어찌나 생생해 보였는지 정말 그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았다. 주인에게 내가 살고픈 풍경을 골라 달라고 해보았다. 안주면 어쩔 수 없지만 주리라 믿고. 선뜻 주었다. 사실 그냥 버려도 되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주인의 마음씨도 고마웠고,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갖게 해준 것에 대해 더더욱 감사했다.
그 그림 하나를 올려본다.
한 겨울. 소복소복 말없이 시간처럼 쌓인 눈을 이른 아침 길 떠나는 남자를 위해 발소리 죽이며 뽀드득뽀드득 밟아나간 길. 싸리나무 울타리에 눈은 쌓이고 남자를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 포오폴 밥 연기를 날리며 군불을 지피는 아낙의 마음. 그리고 미리 패놓은 장작이 숨어있는 흙담과 눈 쌓인 지푸라기 지붕. 한 쪽엔 농기구가 조심스레 걸려있고, 개구쟁이 녀석이 눈을 굴려 만들어놓은 눈사람. 삽대신 사립을 쓸던 빗자루를 쥐어주고, 초립동이 쓴 밀짚모자를 씌어주고, 어디선가 구한 숯으로 눈과 입을 만들어준. 가끔 손이 시려워도 색색으로 짠 털장갑을 벗어 걸어두고, 목도리로 감싸주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정성으로 만들어진 눈사람이 겨울을 따스하게 나도록 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 맘놓고 눈싸움을 해보겠는가. 언제 작은 눈을 굴려 사람만한 눈사람을 만들것인가. 일상이 지겹고 답답할 때 돌아가고픈 그림이 아닐는지. 모퉁이를 돌면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창수야~ 밥 먹자! 밥 먹고 놀아라~"
비록 무를 채썰어 지은 밥일 망정 달짝지근한 밥에다 잘게 썬 동치미를 집간장에 비벼먹으면 얼마나 맛나는지. 꼬옥 고기국이 아니더라도 따끈한 밥 한 그릇과 숭늉 한 대접이 소중한 그 시절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덧붙이는 글 | 때론 철없이 그림 속에서 놀다 오기도 해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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