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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국의 '59년 왕십리'와 당신의 조상(彫像) 뒤에 있는 '왕십리'라는 시와는 무슨 관계입니까.

왕십리(往十里)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데.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당신은 시인입니까.
이 나라의 시인임에는 분명하나 언제 왔다가 언제 가신 분이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우리와 함께 숨쉬고 계신 분이십니까.
당신의 시비의 뒤를 돌아보아도 당신이 누구인지 설명이 없습니다.
당신은 참 알 수 없는 사람이군요.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알되 당신을 이곳에 세워놓은 사람들은 참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왕십리 네거리 횡단보도 중간에 소월의 시비(詩碑)가 있다.
서른의 나이를 갓 넘긴 잘 생긴 시인의 좌상이 섰다.
좌상 아래에는 김소월의 상이라는 각인이 보인다.
그 옆에 있는 시비에는 그의 시 , '왕십리' 가 있다.
그의 이름은 김소월인가?
그렇다면 춘원 이광수의 경우에는 이 춘원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며, 해공 신익희 선생은 신해공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시인이나 예인의 경우에는 필명으로 아호를 바로 성 뒤에 붙여 쓸 수 있다하더라도 김소월의 상이라고 하기보다는 시인 소월 김정식의 상이라고 했으면 더 좋을 뻔했다.

김소월이 누구인가 ?
대한민국 사람 모두 다 그를 알 리가 없다.
학교에 다녔어도 잊은 사람도 있을 것이며 오며 가다 보는 이방인에게는 한글이 라틴어 만큼 어렵고 글을 안다손 쳐도 김소월이가 누군가를 그들이 어찌 알리.

소잔등 처럼 넓적한 반석의 뒤에는 누가 글씨를 썼고, 누가 글씨를 팠고, 성동구청에서 만들었다는 자랑의 기록은 있되 김소월이라는 사람의 일생에 대한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무신경이며 몰상식이며 철면피한 노릇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시인의 조상을 세웠다면 그가 언제 태어났으며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을 하다가 죽었다하는 기록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김소월은 죽었으되 무심한 표정이고 낯선 사람이 그를 알자하되 그는 말할 도리가 없다. 어쩌면 이 곳에서 도둑을 잡다가 죽은 의객이거나 이 동네의 실존하는 시인이라고 착각할 수 도 있다.
관청의 이름으로 하는 일은 이렇게 맹랑하고 몰상식하다.

행여, 길손이여.
왕십리 지하철에서 나와서 우체국 쪽으로 나갈 때는 김소월의 '왕십리' 를 한 번쯤 보고 지나치시라.
그리고 뒤 판은 본들 백판 이니.
지금 내가 옮겨 적은 김소월에 대한 설명을 미리 보고 가시라.

김소월( 金素月) 1902~1934 시인.
본명은 정식(廷湜). 평북 정주 사람. 1909년
남산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에 졸업한 후 조금 쉬다가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재학하며 조만식,서춘, 이돈화, 김억 등 여러 교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김억은 그의 천부적인 재질을 일찍 발견하여 손수 그의 작품을 첨삭해 주는 등 시를 쓸 것을 권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오산학교가 폐교령이 내려지자 1921년 배재고보로 편입했다. 1920년 3월 김억의 주선으로 창조 5호에 첫작품 ' 낭인의 봄 '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 ' 그리워', ' 춘강 (春崗)'등 다섯편을 실었다.

그 후 1922년 부터는 작품 발표가 궤도에 올라 주로 개벽을 통해 한꺼번에 3.4편씩 작품을 동시에 발표, 개벽만을 통해 1년 동안 발표한 시작편수가 50편 이상을 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는 '금잔디' ' 엄마야 누나야 ' ' 진달래꽃' ' 먼후일' 등 오늘 날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일련의 가작들이 많이 섞여 있다.

1923 년 배재고보를 졸업, 고향으로 내려가 10월에는 유일한 단편소설인 '함박눈'을 개벽에 발표했다. 그리고 동아일보사 정주지국 경영에도 손을대는 한편 여러가지 사업에도 손을 대었으나 모두 실패, 실의에 빠져 '못잊어'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가는 길'을 썼으며 나도향과 친교를 맺었다.

1924년 동인지 활동에 가담했는데, '창조'의 후신으로 김동인이 기획, 발족시킨 영태(靈台)의 동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3호부터 '밭고랑 위에서' 등의 작품을 실었다.

이때부터 작품은 곱고 맑은 가락 대신 좀 질팍하고 굵직한 육성을 작품에 담아보려고 했던 것 같다. 즉, 처음에는 정형시를 썼으나 말년에는 민요적인 서정시로 전환되었다.

1934년 12월 24일 33세로 남시(南市)에서 요절(夭折)하였으니, 자살이라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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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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