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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다 정치난국이다 하며 겨울을 나는 우리들의 체감 온도는 더욱 내려갑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혹시 하루종일 이불을 뒤집어 쓰고 만화책이나 보는 것은 아니겠죠? 여기 이 추운 겨울 바쁘게 살아가는 대학생들이 있습니다>

시험 하루전부터 대본을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통째로 외워버려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음 날 시험장으로 가는 지하철에서도, 택시 안에서도 계속 중얼중얼.

택시 기사 아저씨가 쳐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분명 정신이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하지만 정작 심사위원 앞에 선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달달 외운 대본도, 내가 누구인지도 모두. 난 <몰리 스위니>에 등장하는 여자 장님 ‘몰리 스위니’였다.

처음부터 빛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던 선천적인 장님이었던 내가 눈을 뜬 것이다.

하지만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사물들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두려움으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게 아마 사람들이 말하는 ‘몰입’이었나 봐요. 그 때 몰입을 처음 맛본 거죠.” 희진씨는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시험을 보고 나오면서 ‘이 대학 떨어져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다행히도 결과는 합격이었다.

연극원 01학번이 되기까지 희진씨는 4년을 허비해야 했다. 97학번이었던 그는 재수를 해 중앙대 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공부가 영 재미가 없었다. 연극 동아리 ‘영죽 무대’에서 활동하긴 했지만 결코 연극에 미친 것도 아니었다.

결국 1학년 2학기부터 시작해 연속 3번 학사 경고를 맞고 학교와 이별했다. “교수를 찾아가긴 했었는데 없는 거예요.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너무 처량해져 그냥 나와버렸어요.” 얌전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는 전혀 그려지지 않는 모습이다.

모든 게 훵했다. 희진씨 앞에서 제발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하며 우는 친구들도,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크게 느껴지는 연극 작업도, 막막한 앞날도. 인생은 바닥을 친 것 같았다. 4, 5개월 아르바이트를 하고 중국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그 다음 시작한 것이 연극이었다. 나우누리 연극 동호회에서 연극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아무 준비 없이 무작정 연극원 시험을 봤다. 아직도 희진씨는 연극원에 합격한 것은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연극은 제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줘요. 엄마는 우리 집안에는 끼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고 아버지는 연극이 아니라 사람에게 미쳐있는 거라고 하지만요. 하지만 저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 걸요. 연출도 해봤는데 자신을 표현하는 연기에 더욱 매력을 느끼게 됐어요.”

이제 희진씨는 지하철을 타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지하철에 탄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을 끊임없이 살피는 게 버릇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배우치고는 다소 커보이는 몸집 때문에 음식 조절도 하고 아침마다 조깅도 빼먹지 않으려고 한다.

“이제 후회는 그만 하고 앞을 바라봐야 할 때가 아닌가 해요. 학교를 그만 두고 나서는 제 인생이 바닥을 쳤다고 생각했지만 한번도 ‘진짜’ 바닥을 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이젠 힘들어도 절대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돌아 돌아 4년이 걸려 이제야 자신의 삶 앞에 선 희진씨. 이제 진짜 시작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대학생신문(www.e-unipress.com) 126호에 실린 글입니다. 2001년 대학생들의 겨울나기 3번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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