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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전 국민적인 성원과 관심이 집중됐던 인물답지 않게 ‘훈’(이남이)할머니의 최후는 쓸쓸했다.

프놈펜에서 70km나 떨어진 정글 오지의 스쿤 마을에서 딸과 사위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둔 ‘훈’할머니는 지난해 프놈펜의 병원에서 한달간 당뇨와 관절염 등 치료를 받았으나 별 효과를 못본 채 오랜 기간 고통에 시달려 온 것으로 전해졌다.

한달 전 ‘훈’할머니를 방문했던 현지 사업가 황기연 씨는 “다리 관절이 퉁퉁 부어 전혀 거동을 못하는 상태였고, 손발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몰골이었다”면서 “그후 사업상 귀국하는 바람에 병원에 모시고 가지 못한 게 못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우리 정부가 할머니에게 지급하는 월 50만원의 생계지원금을 사위가 대리수령해 할머니에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면서 “돈 문제로 인해 시나와 잔니 등 외손녀들과도 사이가 멀어져 왕래조차 별로 안한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할머니는 지난 97년 8월 26일 당시 <경남매일> 취재진에 의해 장조카 이상윤 씨와 올케 조선애 씨, 여동생 이순이 씨 등 혈육을 찾아 55년간의 한맺힌 인생을 보상받는 듯했다.

할머니는 이후 우리 정부의 국적회복 절차를 거쳐 <경남매일>이 모금한 ‘위안부 할머니 돕기 성금’을 보태 경북 경산시 하양읍 대곡리에 새 주택을 마련, 장조카와 올케, 외손녀 잔니 등과 함께 정착했다.

그러나 오랜 이국생활로 인해 모국어를 잊은 데다 기후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고, 캄보디아 현지의 딸과 외손녀 등을 잊지 못해 98년 9월 15일 캄보디아로 되돌아갔다.

이어 경산 이상윤 씨 가족과 함께 살던 외손녀 잔니도 지난해 5월 캄보디아로 돌아감으로써 국내 혈육과는 다시 헤어져 살게 됐던 것.

현지에서 할머니는 계속 지병에 시달려 왔으나 대도시와 멀리 떨어진 오지인데다 의료시설이 마땅찮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가끔 신병치료차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으나 완치를 못한 채 고통에 시달려 왔다.

장조카 이상윤 씨는 “돌아가실 때까지 곁에서 모시고 싶었는데 결국 이국땅에서 이렇게 돌아가셔서 안타깝기 짝이 없다”면서 “현지 가족들과 상의해 유골만이라도 고향땅에 모시고 싶다”고 말했다.

주 캄보디아 이웅연 부영사는 “국내 가족이 유해를 조국으로 모시겠다면 현지에서 크게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국가적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분인 만큼 국내 가족의 뜻대로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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