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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 짐이 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더욱이 오늘 한일 어업협정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는 데서 그들의 속셈이 드러났다고 보아진다. 무엇보다도 내가 의연해지고 싶다. 미래와 현재의 공존과 조화. 바다를 통한 인류의 평화 모색. 청년에게 꿈과 지혜를 주고 싶다. 탐험정신. 발해의 정신." (97년 12월 23일. <1차 발해뗏목탐사대> 장철수 대장의 일기 중에서)

장철수 대장(당시 38세)이 자신의 일기장에 쓴 위의 글은 안타깝게도 그의 생애 마지막 기록이 되고 말았다. 바로 다음날인 12월 24일 아침 6시, 일본 해양 수색대는 일본 오키제도 도고섬 서북쪽에서, 한겨울 초속 20미터가 넘는 매서운 강풍과 4-5미터를 넘는 어마어마한 파도와의 사투 끝에 끝내 좌초되고 만 '발해 1300호'의 잔해를 발견했다.

발해 건국 1천3백년을 맞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부산에 이르는 뗏목 탐사를 통해, 발해인들의 해상교역 항로를 재현하려 한, 네 명의 탐사대원들은 모두 숨을 거둔 뒤였다. 탐사대 이덕영 씨는 뗏목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의지로 몸을 선체에 꽁꽁 묶어 두었지만, 돌풍과 사나운 파도에 찢겨 몸은 사라지고 발목 부분만 돛대에 남아 있었고, 다른 대원들은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고 있는 상태였다.
(뗏목이 발견된 도고(島後)섬 후쿠아라(福浦)항은, 조선시대 일본의 울릉도, 독도 침탈에 항의하기 위해 독도 수호자 안용복이 두 차례나 입항했던 바로 그 곳인데, 사고를 당한 장 대장도 대학재학 시절 독도가 한국 땅임을 일본에 알리기 위해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뗏목 항해를 하는 등 역사 의식이 남달랐다고 한다.)

"반드시 발해사를 복원하고 말겠다"

방송 및 신문 매체를 통해 전해진 발해뗏목탐사대 대원들의 사망 소식을, 당시 설악산에서 인명 구조 작업을 하던 산악인 방의천(43) 씨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그는 모험 정신을 공유한 사람으로서 탐사대원들의 죽음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는 한편, 자신이 반드시 재도전하여 대원들의 넋을 기리겠다고 마음 먹었다.

방의천 씨의 그 결심은 한순간의 다짐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그때부터 발해 역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한편, 암벽 등반과 총포상, 카페 운영까지 정리하여 사재를 털어 탐사 준비에만 몰두했다. 결국, 2년에 달하는 치밀한 준비 끝에, 방의천 씨는 출중한 대원들 - 항해 담당 주재용 씨(31. 스킨스쿠버 강사), 통신 담당 서상대 씨(22. 목포해양대), 연구 담당 신영재 씨(32. 서울대 해양물리학과 박사과정), 촬영 및 의료 지원 주성종 씨(38. 개인사업) - 을 영입하여, '2차 발해 뗏목 탐사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서울대 신영재 씨는 해류 및 기상을 전공한 연구원으로 동해안의 복잡한 해류의 움직임을 측량 분석하는 학술 조사를 담당하고 있고, 다른 대원들 역시 팀훈련 과정을 통해 자신의 담당 분야에 대한 준비를 마친 상태이다.

'반드시 발해사를 복원하고 민족정신을 되살리고 말겠다'는 방의천 대장의 굳센 의지는 차츰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2차 발해 뗏목 탐사대는 작년 상반기에 대부분의 중앙 일간지 및 방송사를 통해 여러 차례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당시 일부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해양수산부와 해군본부에서도 적극적인 지원 의사를 밝혔고 여러 정치인들도 후원자로 나섰다고 한다. 그런데도, '2차 발해 뗏목 탐사대'는 예정 날짜를 두 번이나 번복한 지금까지도 934km에 달하는 항해에 실제 착수할 수 있을지 여부가 불확실하다. 왜일까?

"이제, 살아있는 자의 몫입니다"

'천년이 넘도록 역사의 변두리에서 서성거리던 발해의 실제 역사 - 만주와 연해주를 아우르고 동해 바다를 통해 일본과 교역했던 뛰어난 해양국가 - 를 눈앞에 펼쳐 보인다. 아울러, 발해인들이 일본을 왕래하면서 울릉도, 독도를 중간 기착지로 이용했음을 증명함으로써 독도가 우리 고유의 영토임을 확인한다'

위와 같은 뗏목 탐사대의 결성 취지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자가 방의천 대장과 인터뷰한 것은, 솔직히 말해 뗏목 탐사의 '의의'보다는 그 '인물'에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리 명분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목숨까지 내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도전이라면, 그 일에 선뜻 나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1차 탐사대와 동일한 기상 조건에 직면하게 된다면, 아무리 출중한 기량을 지닌 대원들이라 할지라도 사실상 살아 남기 어렵지 않겠는가?

"어떤 도전에도 위험은 상존하기 마련입니다. 제가 줄곧 해 왔던 산악 등반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나,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용기이고, 진정한 용기는 무모함과는 구별된다고 여깁니다. 저희 대원들은 이미 반복된 훈련을 통해 각자 역할에 대한 준비를 충분히 한 상태이고 팀웍이 다져져 있습니다. 해류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통해 가장 합리적인 항로도 설정되어 있습니다.

발해 역사를 찾는 것뿐 아니라, 발해의 정신, 탐험 정신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발해 역사를 뒤져 보면, 일본이나 신라로의 뱃길을 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철수(1차 탐사대장)의 항해도 발해사 연구의 앞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성공이라고 여깁니다.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누군가가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을 완수해야지요. 이제, 살아 있는 자의 몫입니다."

그가 작년 8월 독도수호대가 주관한 '독도∼울릉도 뗏목탐사'의 일원으로 참가한 것도 '살아 있는 자의 몫'을 다하기 위한 그의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가 탐사에 사용한 뗏목은 안용복 캐릭터가 새겨진 돛이 달려 있었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독도 영유권 문제에 관한 한 매우 민감한 태도를 지니고 있지만, 방의천 대장의 독도 주권에 대한 의지는 대단한데, '독도 수호대' 홈페이지에 인용된 그의 농담스런 말이 매우 엉뚱하긴 하지만, 아마도 그의 진심이 담긴 표현일 것이다. '일본이 독도에 대해 망언하지 않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해 놓았다.

"간단해.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대야 타고 가면 돼. 계속 망언하면, 내가 대야 타고 독도까지 갈 거야. 일본에서 독도까지 대야 타고 와보라고 해. 못 와."

"조선일보 반대 로고를 깃발로 매달 겁니다"

방의천 씨는 충청도 당진의 바닷가 마을에서 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외향적이었고 엉뚱한 면이 많았는데, 중학교 2학년 땐 국토 순례 무전여행을 하겠다며 혼자서 갑자기 사라져, '18일간의 전국 일주' 기간 동안 온 동네 어른들을 걱정시켰다고 한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공장 근로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유신 말기에는 노조 운동 및 사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노조 운동을 하다 제 개인 사업을 시작했고, 80년대 초부터 13년간 야학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졸업이 배움의 전부이지만 개인적으로 독서에 심취해서 공부를 계속했고, 음악에도 취미를 두어 신촌의 여러 음악 카페에서 디제이 생활도 했지요."

그가 가진 1500권의 책 중 대부분이 사회과학, 역사, 철학 방면 서적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그는 자신의 관심 분야에 상당히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방의천 씨는 신촌 독수리 다방 디제이 시절부터 모은 8000여 장의 팝 앨범들을 애지중지 아끼는데, 만약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이나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이 언론계를 떠날 결심만 하면 8000장 전부를 축하 선물로 줄 용의'가 있단다.

"제가 조선일보 반대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역사 공부를 하다 보니 조선일보의 친일 행적을 낱낱이 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본래 민족의식, 역사의식을 강조해 온 사람인데, 일제 시절 그토록 부끄러운 친일 행각을 벌인 조선일보가 민족지인 양 또 정론지인 양 스스로를 미화하는 기만적인 모습을 보니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강준만 교수의 책들을 접하게 되니, 너무나 반갑고 기쁘더군요."

그는 조선일보 반대 운동에 자신이 미력하나마 동참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다름 아니라, 2차 발해 학술 탐사대의 뗏목에 '조선일보 반대 로고'를 깃발로 매달고 전체 항해를 완주하는 것이다.

"저는 지식인도 아니고 언론학자도 아니니 설득력 있는 글을 써서 국민들에게 조선일보의 해악을 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졸업이 전부인 탐험가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있더군요. 작년 2월에 조선일보 측에서 사진 촬영 요청을 했을 때 거절했습니다. 유독, 조선일보 기자의 제의만 거절했으니, 담당 기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디 그 사람 개인을 보고 그랬겠습니까?

▲ 뗏목에 깃발로 달 안티조선 로고
발해뗏목탐사대는 언론개혁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이 로고를 뗏목 깃발로 달기로 했다 ⓒ 2001 안티조선 우리모두

그런데, 어느날 문득 생각해 보니, 뗏목에 조선일보 반대 깃발을 달면 전국에 방송되는 TV 화면을 통해 저의 의지를 모든 이에게 알릴 수 있겠더군요. 바로 그런 일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제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은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가 뗏목에 달기로 한 조선일보 반대 로고는, 미술 및 디자인을 전공한 자원 봉사자들에 의해 도안이 만들어져, 안티조선 인터넷 사이트인 '우리모두' 네티즌들의 의견 수렴을 통해 확정되었다고 한다.

그가 탐사에 사용할 뗏목은 삼나무를 재원으로 하여 길이 14m, 너비 7m(고물쪽은 8m) 크기로 만들어질 것인데, 1차 탐사대가 사용한 뗏목처럼 작은 선실에 위성항법장치, 무선교신장비, 디지털비디오카메라 등이 갖추어질 것이라 한다. 그런데, 뗏목 제작이 여태 완성되지 않은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3억 6천만원 때문에 흘린 눈물들

"뗏목 제작을 포함해서 약 3억 7천만원 정도 소요되는 전체 탐사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서입니다. 이미, 작년 3월과 12월 두 차례나 탐사 일정을 미루었지만, 아직도 필요한 돈을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래, 탐사대는 발해 시대 당시 한겨울에 신라와의 교역이 있었다는 가설에 따라, 12월 31일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항을 출발하려 했지만, 이미 두 차례나 일정이 변경된 것이다. 지난해 언론 및 정치인, 정부 기관이 나타내었던 상당한 관심을 떠올려 본다면, 약 4억원의 소요 예산을 마련하지 못해 탐사가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과거 보도 내용 몇 가지를 방의천 대장에게 확인해 보았다.

"작년 5월 국회에서 발해 뗏목탐사를 홍보하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한나라당 윤한도, 민주당 신기남, 김충조, 설훈 의원 등 많은 국회의원들이 참석하셔서 저희를 격려해 주셨지요. 그리고, 9월 27일에는 '발해뗏목탐사 후원의 밤'이란 행사가 정관계 인사 3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캐피탈호텔에서 있었습니다."

방의천 대장이 말한 후원 행사에 참석한 정관계 인사들 중, 백인호 YTN 사장은 발해 뗏목탐사 추진위원장을,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은 명예추진위원장을, 윤한도 의원은 후원회장을 각각 맡고 있다고 한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해양수산부와 해군본부도 지원을 약속했는데, 이들의 후원은 순전히 심정적으로만 이루어진 셈이다. 기업체의 후원이 전무한 것은 그렇다손치더라도, 후원을 약속한 주요 인사와 기관들만이라도 적극적인 재정 지원에 나선다면, 3억 7000만원의 소요 비용을 마련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을텐데...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좌절했을 거예요. 그 동안의 이야기 말로 다 못 합니다. 오죽했으면 이민 갈 생각까지 했겠어요.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한 몇 년 복무해서 탐험경비에 좀 보탤 생각까지 했었지요. 방송사에서나 기업체에서 몇 차례 교섭이 있었지만, 그들의 실제 관심은 방송 촬영권에만 있었습니다. 기업체에서도 스폰서 문제는 결국 외면하더군요. 기대를 한껏 했다가 기대가 무너질 때마다 참 많이도 울었지요."

"세상은 자신이 움직여야 바뀐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사업까지 처분하여 발해 탐사 계획에 몇 년째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는 방의천 대장을 사람들은 평범하게 보진 않을 것이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고집을 유난스럽다고 여기지 않을까?

"발해는 고구려의 위상과 기개에 맞먹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역사입니다. 그러나 발해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아직까지 미미합니다. 따라서, 발해를 연구하려는 저의 노력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발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연구가 미미한 상태인 것이 특이하다고 생각합니다. 발해 탐사도 사실은 개인이 아닌 정부 당국이 나서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외국의 경우, 탐험가가 국가적 혹은 역사적 탐험에 전념할 수 있는 지원을 정부나 기업체에서 아낌없이 해 주는 예가 많습니다. 저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해상 교역로 탐사에 성공해 우리 국민들에게 시련을 이겨내는 용기를 보여 주고 싶습니다."

방의천 씨는, '박정희 시절 용기있는 글로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나 지금은 추상적인 거대 담론만을 이야기하는' 어느 유명 지식인을 예로 들며, 자신의 소박한 신념을 역설했다.

"과거의 경력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중학교 학력이 전부인 저보다도 못하다고요. 진정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난 암울했던 시기에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현재 무엇을 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날 엄연히 존재하는 거짓과 위선에 대해 침묵하는 지식인들은 숨을 쉬고 있더라도 이미 죽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제가 조선일보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강준만 교수, 김정란 시인 등을 존경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현 체제와 제도하에서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해 주지 않으면, 즉 곧은 소리로 세상을 향해 발언해 주지 않으면, 우리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올바른 방향으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세상의 변화와 개선을 누군가가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하고 기다려서는 안된다고 믿습니다. 세상은 자신이 움직여야 바뀐다는 게 제 신념입니다.”

기자는 방의천 씨의 도전이 결실을 맺길 바라는 마음에서, 인터뷰 말미에 이 글을 읽고 발해 뗏목 탐사대를 지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니 그들이 소액이라도 작은 정성을 모아 기부할 수 있는 구좌를 준비하라고 제안했다.

그의 거듭된 좌절, 특히 정부나 기업체 등의 재정적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서태지에게 한번 도움을 요청해 보시죠' 라는 말도 하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그가 필자의 말을 장난스런 농담으로만 여겨 언짢아 할 것 같아 하지 않았다. 방의천 대장은 90년대 중반 서태지가 '발해를 찾아서'라는 노래를 그의 앨범 타이틀 곡으로 불렀던 걸 기억하고 있을까? 방의천 대장도 혹시 정치인이나 기업가들보다 차라리 연예인을 믿는 편이라면,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연락해 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방의천 대장이 개설했다고 알려온, '2차 발해 뗏목 탐사대 시민 후원 계좌'입니다.

외환은행 146-18-29555-0 (예금주: 방의천)

* 이 기사는 <월간 인물과 사상> 3월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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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분야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였고,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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