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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쓸 때마다 지키지 못하고 있는 자신과의 약속이 있다. '나 자신, 혹은 주변의 이야기로 밥 벌어먹지 말자'가 바로 그 약속인데, 제대로 한번 지켜내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친숙한 이야기를 쓰게 되는 것은 유명한 이들, 특히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인 에릭 클랩튼에게 받은 교훈(?)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에릭 클랩튼을 보라. 그가 히트시킨 곡들은 언제나 자기 주변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내에게 바치는 곡 '원더풀 투나잇(Wonderful Tonight)', 친구이자 비틀즈의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의 아내였던 패티 보이드와의 결혼과 이혼 속에서 만들어 낸 곡 '라일라(Layla)', 맨해튼 아파트에서 실족해 죽은 네 살짜리 아들을 그리워하며 만든 곡 '티어즈 인 해븐(Tears in Heaven)', 베이비페이스와 함께 불러 팝싱어 셰릴 크로에게 바친 곡 '체인지 더 월드(Change The world)'...
청바지와 티셔츠, 동네 아저씨차림의 그가 들려주는 음악에서, 결국 삶의 진실과 신비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뿌리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에릭 클랩튼이 근 3년만에 내놓은 솔로앨범(B.B King과의 듀엣앨범 제외) 역시 이 같은 맥락에 있다.
3집의 앨범이름은 <렙타일(Reptile)>이다.
사전적인 의미를 달자면 "비열한 놈" 혹은 "파충류"라는 뜻의 '렙타일'은 에릭 클랩튼이 살았던 동네에서 대단한 존경의 의미로 드물게 불려졌다. 에릭 클랩튼이 가장 처음 '렙타일'이라고 불렀던 사람은 현악기의 일종인 '밴조우'를 연주했던 동네의 '찰리 큠버랜드'로 "어, 저기 밴조우를 부는 '렙타일'이 오고 있군!"하는 말은 큠버랜드에게는 대단한 칭찬이었다.
지난해 봄 그의 삼촌 아드리안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렸을 적 아드리안을 삼촌이 아닌 형으로 믿고 자랐는데, 그는 '렙타일' 앨범 노트에 "삼촌 아드리안이 나의 음악, 예술, 옷차림, 자동차 등의 취향이 결정된 나의 성장기에 좋은 추억과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고 적으며 '렙타일'의 칭호와 앨범을 삼촌 아드리안에게 헌정하고 있다. 이번 앨범 역시 그의 주변 인물을 그리워하며 만든 셈이다. 대부분의 경우 실연(失戀)이 많은 예술가가 좋은 작품을 만들어낸다. 예술가의 삶이 쓸수록 작품은 단 것일까? 인생은 그래서 아이러니컬하다.
| | ▲ '렙타일'의 사전적 의미는 비열한 놈, 파충류 ⓒ 워너뮤직 |
앨범 '렙타일'의 첫곡은 '렙타일'.
보사노바 리듬이 흥겨운 연주곡이다. 스티브 가드의 흥겨운 드럼 연주가 볼 월러에 의해 리드미컬하게 프로그래밍되었다.
두 번째 곡은 블루스의 대가 빅 조 터너의 '갓 유 온 마이 마인드(Got You On My Mind)'. 에릭 클랩튼 특유의 힘찬 목소리와 튕기는 듯한 기타리듬이 복고적인 블루스 리듬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네 번째 곡인 '빌리브 인 라이프(Believe In Life)'는 에릭 클랩튼 특유의 긍정적인 사랑과 인생관이 (아주 간단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가사(歌辭)에서 깊게 느껴져 온다.
'컴백 베이비(Come Back Baby)'는 레이 찰스의 곡을 리메이크한 곡으로 블루스가 주는 느낌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곡으로 약간씩 처지는 리듬이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다. 특히 마지막 부분, 에릭 클랩튼의 창법이 새롭고 재미있다.
일곱 번째 노래 '파인 마이셀프(Find Myself)'는 피아노, 기타, 퍼쿠션의 조화가 개성 있다. 'I had to find myself(나 자신을 찾아야해)' 'You help me find myself(나 자신을 찾게 도와줘)'라는 후렴구와 코러스가 코끝이 찡한 향수를 자아낸다. 'I'll be lonely 'till I find myself(나 자신을 찾기 전까지 난 너무나 외로울 거야)'라는 에릭 클랩튼의 가사가 모두의 가슴에 파고들지는 않는지...
'아 앤 거너 스탠 퍼 잇(I Ain't Gonna Stand For It)', 여덟 번째 곡의 제목이 낯설지 않다. 바로 그보다 다섯 살 연하인 스티비 원더의 곡. 듣고 있자면 어깨가 자연스레 들썩이게 된다.
그가 '슬로우 핸드'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 그가 기타를 빠르게 연주하지 않고 여유있는 리듬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가 슬로우핸드 연주와 흐느끼는 듯한 블루스 창법을 아낌없이 발휘하고 있는 곡이 있다면 바로 아홉번째 곡 '아 원 어 리를 걸(I Want A Little Girl)'과 열 번째 곡 '세컨 네이쳐(Second Nature)'.
열 번째 곡과 열두 번째 '모던 걸(Modern Girl)'은 '98년 <필그림>앨범에서 실리지 못했던 곡이다.
제임스 테일러가 작곡, 직접 불렀으며, 70년대 아이즐리 브러더스가 히트시켰던 곡 '돈 렛 미 비 론리(Don't Let Me Be Lonely)'에서는 에릭 클랩튼이 곡의 느낌을 상하게 하지 않고 음악의 재해석에 얼마나 능한가를 보여준다. 특히 제임스 테일러는 에릭 클랩튼의 음악적 토양을 만들어 준 친구나 다름없다. 그래서 제임스 테일러가 'You've Got A Friend(너에겐 친구가 있어)'라는 노래를 부른 것일까? 에릭 클랩튼은 제임스 테일러가 불렀던 것보다 더 강하고 애절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어떤 음악도 블루스로 바뀌면 확실히 세련미가 흐르게 된다.
'수퍼맨 인사이드(Superman Inside)'는 이번 앨범의 첫 번째 싱글로 그가 락 기타리스트라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게 해 주는 신나는 음악.
마지막 곡인 '선 앤 실비아(Son & Sylvia)'가 바로 삼촌 아드리안과 그의 아내 실비아에게 바치는, 기타소리가 부드러운 헌정연주곡이다.
| | ▲ 에릭 클랩튼 ⓒ 워너뮤직 | 지난해 이미 블루스의 대가인 비비 킹과 듀엣앨범인 <라이드 위드 킹(Ride with King)>을 발매해 '블루스'라는 장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사실 에릭 클랩튼은 블루스를 떠난 적이 없었다. 제프 벡 및 지미 페이지와 함께 '락 음악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라는 수식어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하게 만들었지만, 언제나 그는 블루스로 다시 되돌아왔다.
이번 그의 앨범<렙타일(Reptile)>은 그가 전에 연주했던 '벨 바틈 블루스(Bell Bottom Blues)'보다 더 깊고, '블루스 비폴 선라이즈(Blues Before Sunrise)'보다 더 감동적이다. 블루스라는 음악장르가 인간적이고 내면적인 것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에릭 클랩튼의 블루스는 게리 무어(Gary Moore)의 블루스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에릭 클랩튼이 그의 음악적 동기를 자신의 주변과 가족, 즉 뿌리에서 가져오기 때문일 것이다.
'프럼 더 크레이들(From The Cradle)'과 '필그림(Pilgrim)'의 앨범이 그저 그랬다는 팬들에게 이번 앨범은 에릭 클랩튼의 음악적 성숙미 이상의 만족까지 느끼게 해줄 것이다. 나에게도 '렙타일'이라 부를 만한 존경의 대상이 있을까? 아! 그런데... "저기 블루스를 연주하는 '렙타일'이 오고 있군!"
덧붙이는 글 | Do me wrong, do me right
Tell me lies but hold me tight
Save your goodbye for the morning light
But don't let me be lonely tonight..
제임스 테일러의 'Don't let me be lonely Tonight'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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