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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에 속하는 자현사의 둥지마을엔 유아부터 스님과 공양주까지 거의 오십 여명이 살고 있다.>

서울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안산의 시화방조제를 곧장 지나면 대부도를 만나게 된다.

봄볕만큼이나 강한 봄바람과 한산함 속에 방조제를 가르는 도로 길에 자욱한 안개가 끼인 아침. 오른 쪽엔 바다여서인지 낚시꾼이 낚시를 드리우는 모습이 있고, 왼쪽엔 미지의 기억처럼 뭉글뭉글한 안개가 곧장 앞으로 가라는 듯 살풋 미소를 띄운다.

오랜만의 외출. 서울을 벗어나 누군가 나를 반기는 웃음소리와 떠들썩거림이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마치 시골집에 오랜만에 찾아드는 불효자식 같다. 시간 개념없이 함께 가던 우리 다섯은 김수철의 "팔만대장경"을 듣는 듯 마는 듯 깔고 10시가 조금 넘어서 둥지마을에 도착했다.

맨 먼저 우리를 맞이한 건, 작은 뒤산 같은 곳에 붉그스레하게 살을 드러낸 흙들과 부드러운 봄바람이었다. 차 소리에 뛰어놀던 아이들이 우우 달려와 카메라를 맨 나에게 달려온다. 아마도 생소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일행이 법당에 들어가는 사이, 아이들 사진 한 장 찍는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카메라를 멀겋게 바라보는 표정들이 초등학교 시절 사진을 처음 찍던 생각이 났다.

"이게 뭐야. 카메라지. 필림 있어? 이리 내봐. 보자."

거침없이 달려든 녀석은 빡빡 깎은 머리에 코풍선이 콧구멍 속에서 빼꼼 내밀고 있었다. 얼굴은 봄바람에 터진 듯 거칠하고, 작은 파카가 더욱 더 녀석을 작게 보였다.

어느새 흙산으로 간 아이들 몇 몇이 '찍어줘, 찍어줘'를 외친다. 아뿔싸. 사진기에서 밧테리가 닳고 있었다. 한두 장 더 찍어주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먼저 도착한 여덟 명의 사람들이 먼저 각기 맡겨진 일을 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만지던 나는 제일 하고프던 볶음밥 만들기에서 밀려나 제일 못하는 빨래를 하게 되었다.

4명은 볶음밥을 만들기 위해 햄을 썰고 달걀을 깨고 콩을 삶고 부산했다. 음식 만드는 옆에서 뽀짝거리며 음식을 얻어먹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본 음식보다 훨씬 맛나다는 것을. 햄을 자르는 님 옆에서 떼장이 녀석들 몇이 둘러서서 입맛을 다신다. 결국 몇 조각의 햄을 주워들고 바깥으로 바람되어 달려가는 아이들.

갑자기 한 녀석이 달려와 허리를 머리로 친다. 몇 번 맞고 나니 허리가 시큰한데 모두들 좋아하는 표현이라며 참으라 한다. 허리를 감싸며 세탁실로 갔다. 넷이서 몇 개의 통에 담긴 옷과 신발을 세탁했다. 마음의 때를 털어내는 심정으로 깨끗하게 해보자며 웃음을 풀어 세탁했다. 두 개 중 하나의 세탁기가 고장이 나서 탈수만 되었으므로 바깥에서 불어오는 밭바람에 손이 시려도 열심히 빨아야 했다. 벌써 한 쪽 세탁기는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밥 먹으라는 소리에 식당에 가 보니 벌써 아이들이 먹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선반 위에 올려놓은 곳엔 막대 사탕이 있었는데 한 아이가 와서 내 손을 잡아 끈다. 손목을 덮는 옷이 시커멓다 못해 헤어져 있었다. 마치 석연찮은 내 마음처럼. 손을 넣어 막대사탕을 내리는 순간 어떤 보살님이 주지 말라고 한다. 머리 깎아주는 님들에게서 머리를 깎고 씻고 오는 아이에게만 준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은 식당을 들락날락했다. 머리를 깎고 감아빗고 말갛게 얼굴을 내밀어야만 받을 수 있었으므로. 결국 그 아이는 다시 돌아와 내 손을 잡았다. 말끔한 머리 모양새를 하고 말이다. 그런데도 이번엔 주지 말란다. 에긍. 알고보니 이미 하나 받아 먹었다는 것.

작은 밭과 흙산을 향해 허리 한 번 길게 폈다. 제법 큰 키의 아이들이 몇몇씩 나와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 방 구경 좀 하자했더니 흔쾌히 그러라 한다. 잘 정돈된 남학생의 방. 고2가 제일 큰 오빠란다. 여학생은 네 명 뿐이고 모두가 남학생인데 용케도 머리를 감고 나온 여학생을 보았다. 시간이 없어서 긴 이야기는 못했지만 다음에 가게 되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방 양 쪽으로 TV와 컴퓨터가 있었다. 아직 전용선이 깔리지 않은 곳에선 윈엠으로 음악을 듣거나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있었다. 게임용어는 모르지만 그 곳에 대단한 실력의 게이머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형들 틈에서 금세 식당에 있던 아이가 코를 훌쩍거리며 열심히 시청하고 있었다. 바깥에 나가 놀자했지만 고개도 안돌리고 손만 뿌리친다.

자꾸만 나이가 줄어들면서 70년대 초등학교 시절을 뒤적거려보았다. 흙산에서 바람이야 불든 말든 손톱 끝 속으로 흙이 들어가든 말든 손등이 따가울 정도로 트든 말든 두 볼이 발그레해지든 말든 해가 지도록 놀다 내려오든 생각. 꾸밈없이 제 발길 닿는대로 옮아다니며 고함치는 아이들. 옹기종기 햇살 따스한 담벼락 아래 모여 무슨 이야기가 재미날까. 코를 훌쩍거리는 녀석들에게 팽 풀어보라고 했지만 푸는 듯 마는 듯 닦다 말고 도망친다.

어떤 녀석은 볼에 코딱지가 들러붙어 세수를 여러 번 해도 아프다는 말만 할 뿐 떼지지가 않았다. 녀석도 아픈지 손을 뿌리쳤는데 결국 내 손톱을 세워 팠다. 녀석의 코딱지는 몇 년 묵은 내 게으름이 아니었을까.

부릉부릉 벌써 돌아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스님은 뵙지 못하고 비구니 스님께만 합장하고 돌아서는 둥지마을. 서로가 서로의 둥지가 되는 아이들 속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돌아와 미안하다는 생각이다. 다음에 와선 좀더 친해질 수 있는 놀이를 준비한다고 한다. 등을 따사로히 덮어주는 산바람에 감사한다. 향긋한 봄나물과 꽃들의 몽오리짐을 보며 다음 달을 약속하며 떠나왔다. 시화방조제는 답답함 마음의 딱지를 떼버린 듯 말갛게 배웅을 해주었다.

히히덕거리던 아이들 웃음 소리를 몰고 씽하니 서울로 향했다. 늘 떠나면 길 위. 일행은 옥수수막걸리 한 잔을 생각하며 인사동으로 향했다. 마음을 도적질해간다는 그 도적굴로. 한 잔 막거리 사발에 앓는 시름 담아 삭히고 빈 막걸리 사발에 그득한 허허로움을 달게 마시고자 말이다. 사발에 남은 좁쌀 한 알에 첫 마음 몰래 심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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