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천황의 치세는 천년만년, 작은 돌이 바위가 되고 이끼가 낄 때까지…

최근 일본과 주변국 사이에 논란을 일으키며 일본 의회에서 통과된 국기-국가법을 근거로 공식 부활된 기미가요(君ガ代)의 일부분이다. 기미가요와 히노마루(日ノ丸)의 법제화를 두고 일본과 주변국 사이에 일었던 논란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주변국들 - 특히,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 당사국들은 이를 최근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관련하여 일본 군국주의 부활의 상징이라고 우려를 표시하고 있으며, 반면에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은 한 나라의 국기, 국가를 제정하는 일은 그 나라의 자주권에 속하는 것으로 이를 군국주의의 부활로 보는 것은 주변국의 '오해'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이러한 주장이 주변국들의 우려를 일본이 주장하는 '이해'로 바꾸기에는 풀기 힘든 갈등이 존재한다. 이러한 갈등의 근본 원인들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근대 이후 특히 주변국 침략과 관련하여 일본의 수식어가 되어왔던 군국주의란 무엇이며 전후 군국주의의 향배를 알아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 될 듯하다.


군국주의란?

역사적으로 일본의 군국주의는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서 나타나는 제국주의 파시즘의 한 변종으로 볼 수 있다. 근대 이후 서구 자본주의는 본국에서 자본 축적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대외적으로 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을 찾아 주변의 약소국들과 아시아-아프리카 등지로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확대과정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 열강간의 식민지 확보를 위한 치열한 경쟁을 유발하였고,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식민지 쟁탈전쟁으로 비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류 초유의 세계대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은 해소되지 못하고 오히려 증폭되었다. 결국 1920년대 말 이후 불어닥친 세계적 대공황은 무제한의 침략과 대외팽창을 목표로 하는 파시즘이라는 팽창적 제국주의 만들어내었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종말을 고하였다.

19세기 말 미국에 의한 개항과 함께 국제 사회에 발을 내딛은 일본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해 나가는 단계에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상당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천황을 국체로 하는 부국 강병의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일본 군대는 중앙정부와 분리되어 독자적 기구로 성장하였고 서양식 군제개혁을 통해 동아시아 최강의 군비를 확보함으로써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비한 군대에서 오히려 대외 팽창을 위한 침략적 기구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근대화 이데올로기는 같은 동아시아에 있는 중국의 자강운동이나 조선의 개화론 등과는 상달히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이른바 탈아론, 정한론을 근대화 이데올로기로 삼았는데 이는 인접 국가들에 대한 침략논리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첫 번째 실험대상은 조선과 대만이었다. 그들은 대만과 조선 침략을 발판으로 삼아 비서구 사회에서는 유일하게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876년 조선에 대해 강화도 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강제하여 미국이 그들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 의도를 노골화하였다.

청 일전쟁은 그들에게 대외장창의 확고한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대만과 요동반도 점령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의 대외 팽창 가도에 재동을 걸었고 이에 따라 이 두 지역을 반환하고 절치 부심하던 일본 군부는 1904년 마침내 러 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쟁취하게 되는데 그 이면에는 영국과 맺은 영 일 동맹 그리고 미국과 맺은 가츠라-테프트 밀약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일본은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착착 진행시켜 나감으로써 여기에서 얻어지는 식민지 경영 이익을 자신들의 자본주의 본원적 축적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1920년대 말 세계를 휘감은 경제공황은 당시 후발 자본주의국가였던 일본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였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일본의 재벌과 군부는 천황을 국체로 삼고 주변국들에 대한 무제한의 침략과 대외팽창을 감행하는 그들 특유의 군국주의의 파시즘체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는 결국 대미, 대소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자멸의 길을 걷게된다.


왜 다시 군국주의인가?

1945년 패전직후, 일본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과 함께 일본의 군국주의는 종막을 고하였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근대화 시도는 일단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일본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복구함과 동시에 전후 처리를 통해 군국주의 사회 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 구성의 패러다임을 모색하여야만 했다.

이를 위해 주변국에 대한 침략의 상징이었던 천황 중심의 군부 정권을 민주적인 정치구조로 재편시키고, 과거 군국주의 주도 세력에 대한 과감한 숙청 작업과 과거사 반성을 통해 앞으로의 역사에서 그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여야 했다.

일본의 전후처리는 일본을 점령한 미국에 의해 주도되었다. 미국은 극동 국제군사법정 곧 도쿄전범재판을 통해 전범처리를 진행함과 동시에 '맥아더 헌법'이라 불린 평화헌법을 강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후처리는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인 주변국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점령국인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 맞게 상당히 뒤틀린 모습으로 진행되었다. 군국주의 일본을 지탱하던 전시 사회 체제의 해체와 인적, 법적 청산은 당연한 과정이어야 했다.

일본의 전후처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어야 했다.
첫째, 주변국에 대한 침략주의의 상징이었던 천황 일인 중심의 봉건적 정치구조를 민주적인 구조로 개편하는 것이었고 둘째, 과거 군국주의 인사들에 대한 광범위한 인적청산을 통해 사회의 민주적 구조를 정착시킴으로 앞으로의 역사에서 그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전후처리는 이러한 당연한 과정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 첫 단추는 제국주의 일본의 전범들을 역사적 심판대에 올린 극동국제군사법정, 이른바 도쿄전범재판의 불철저한 진행에서부터 잘못 끼워지고 있었다.

이러한 불철저한 전후처리의 원인으로는 점령군 사령관인 맥아더의 전횡과 더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의 기조였던 냉전 체제의 구축에 있었다. 미국은 당시 일본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천황제의 유지로 일본 국내의 보수 우익과 손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으며, 동시에 전범으로서 천황에 대한 제재도 가해야 했다.

이런 가운데 나온 타협점이 천황에게 인간선언을 시키면서 동시에 천황제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었다. 결국 신헌법의 제정과정에서 천황제가 존속하게 된 것이다. 최대의 전범인 히로히토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다른 전범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는 만무한 것이었다.

A급 전범 중 사형선고를 받은 7명(야스쿠니 신사에 이들의 위패가 봉안되었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몇 년 안에 석방되었다. 전범에 의한 패해자와 전범처리의 주체가 다른 데서 오는 당연한 그러나 비극적인 결말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한반도 이북을 점령한 소련이 세력을 확대하고 중국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장악함으로써 미국을 긴장시켰다. 미국은 이에 맞설 반공의 보루와 한반도 유사시 군수지원을 위한 병참기지를 필요로 하였다. 일본은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킬 미국의 대아시아 전진기지가 되기에 충분하였고, 또 일본 군국주의자들이야말로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동반자가 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전범처리는 지연되기 시작했다.

전범 재판의 결과 A급 전범 중 7명만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다른 이들은 몇 년 사이에 차례로 석방되었다. 그 후 이들은 보수 정객으로 일본 정치계에 복귀하여 이른바 친한파 또는 친미파로 자처하며 전후 일본 정계를 장악함으로써 군국주의 부활의 불씨는 살아남게 된다.

한국전쟁과 월남전은 일본 전후 경제 재건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군비증강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고, 이후 1990년대 걸프전을 통해 국제질서서 일본의 대외적 군사 역할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 일본은 미국의 확고한 반공보루로 인정을 받았고 이러한 '필요성'에서 1954년 자위대(自衛隊)가 창설되었다 처음 7만 5천명규모로 시작된 자위대(自衛隊)는 아시아에서 반공보루와 유사시 병참기지가 필요했던 미국은 이를 방조하였다. 지금 자위대는 25만명 규모의 정예병력과 최첨단 무기들로 무장한 세계 제2위의 군사력을 갖춘 군대가 되었다. 현재 정예병력 25만과 첨단의 군비를 자랑하는 세계 제2위의 군대로 성장하였다.


자위(自衛)를 넘어 '타위(他衛)'로 - 신 가이드라인


일본이 진정으로 과거사를 반성하고 군국주의 구조를 청산하였다면 지난 사실들을 역사 교과서에 기록하고 교육을 통해 후손들로 하여금 지난 과오를 알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것을 이념적으로 떠받치고 실천하였던 인물들은 청산되지 않고 현실 정치에 '보수 우익'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전반에 복귀하였다. 일본과 주변국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 예를 들어 역사 교과서의 왜곡이나 과거의 침략 전쟁을 부인하는 소위 '망언'사건,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자위대의 군비증강과 해외파병, 그리고 부전 결의(평화헌법에 따라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의회의 결의) 반대와 최근의 기미가요-히노마루 법제화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군국주의 부활"이라는 전후 일본의 현대사 전개과정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아닌 것이다.

헌법상 일본은 다른 나라에 군사개입을 할 수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전후 54년, 수 차례의 '편법 개헌'으로 만신창이가 된 일본의 평화 헌법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4월 일본의 중의원을 통과한 신 가이드라인 관련 법안이 그것이다.

사실 자위대는 발족 이후 군대가 아니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오로지 자국의 방어에 한하여 병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전수방위(專守防衛)의 개념은 퇴색한지 오래 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용인한 것은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 따른 것이다.

미국은 60년 미-일 안보조약을 체결한 후 유사시 대응 지침을 만들어 왔는데 이것이 이른바 가이드라인이다. 1978년에 만들어진 구 가이드라인만 해도 일본의 역할은 미국의 병참과 군수 지원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94년 이른바 북한의 핵 위기를 계기로 96년에 다시 만든 신 가이드라인은 유사시 주변지역에 대한 일본의 자동 개입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규정한 '주변 지역'의 핵심이 한반도가 될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우리가 일본의 군사대국화에 관심을 가지고 제동을 걸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군국주의와 한반도

최근까지도 일본의 과거사 부인 발언이나 자위대의 군비 증강과 이에 대한 필요성의 주장, 유사시 핵무기로 전용이 가능한 플로토늄의 도입 그리고 한-일 합동 군사훈련 같은 기사들이 심심치 않게 신문지상을 장식하고 있다.

21세기 동북아시아의 세계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부활하고 있는 일본의 군국주의는 한반도의 대외관계와 통일, 안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일본이 군사력 증강의 최대 이유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이고 보면, 이것이 한반도 장래의 평화 구축과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요 동 북아 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복잡한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혹여, '지금 세상에 과거와 같이 가혹한 식민지 지배가 다시 오랴?'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또는 일본의 팽창정책에 '딴죽'을 걸기보다는, 세계적인 경제대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신대동아 공영'을 구상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정부가 일본의 군사적 팽창을 용인하고, 더 나아가 이에 편승하여 한-미-일을 중심으로 하는 안보축을 강화하려 한다면,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통일은 더욱 멀어질 것이고, 또한 21세기에도 분단과 대결을 바탕으로 하는 냉전적 질서가 한반도에 계속됨으로써 분쟁의 불씨만 더욱 확대될 것이고 이는 21세기 우리가 지향해야할 동아시아 평화 체제와는 거리가 멀다.

최근 개정된 미-일 방위협력지침(신 가이드라인)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징후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그 골자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美·日방위협력지침(신 가이드라인)법안


미국의 군사작전을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한 미·일방위협력지침(신 가이드라인) 관련 법안이 지난 7월27일 중의원을 통과하였다. 그 법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변사태는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일본에 대한 직접 무력 공격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는 경우 등 일본 주변 지역에서 일본의 평화와 안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사태다.
- 유사시 일본군은 미군에 대한 물품. 용역과 편의를 제공하는 후방지역 지원과 미군 병사를 구조하는 후방지역 수색 구조를 실시한다.

-후방지역지원과 수색구조의 자위대 활동 실시는 국회의 사전승인을 원칙으로 하되 긴급 시는 사후 승인하며, 승인이 없을 시는 활동을 종료한다.
-주변사태 기본 계획위 결정, 변경 시에는 국회에 보고하고, 종료 후에는 대응조치의 결과를 보고한다.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민간에 대한 협력의뢰가 가능하다.
-후방지역자원과 수색구조에서 자위대원은 정당방위를 위해 무기 사용이 가능하다.
-해외 자국인 구출 시 현행 자위대기와 함께 자위대함의 사용도 가능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법안에 나오는'주변사태'라는 개념이다. 일본정부는 이를 '일본의 평화와 안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태'라고 모호하게 활동범위를 확대해 놓았다. 다만 한국, 중국 등 인접국가의 반발을 피하는 동시에 군사적 억지력을 높이는 의미에서 6가지 유형을 제시했으나, 그 활동지역을 구체적으로 명기하지는 않고 있다.

또, 이 법안은 주변사태 발생 시 일본이 취할 대응책으로 자위대의 후방지역 지원 및 수색활동을 인정하고 있고, 그 해당지역으로 일본 영역과 전투행위가 벌어질 가능성이 없는 공해상 및 상공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이는 일본 헌법에서 금지된 집단자위권 행사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실상 일본에게도 국제분쟁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한국 중세사를 연구했었습니다. 또 저는 생태 환경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 분야의 글도 가끔은 쓰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디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글을 많이 또 취재를 해가면 쓰는 사람은 아니고 가끔씩 저의 주장이나 생각을 논설형식으로 쓰려고 생각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