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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급 타는 날은 결석하는 날이었다. 30리 길을 걸어 면사무소에 가면 고맙게도 밀가루와 쌀을 받아올 수 있었다. 5남매가 한 달 동안 연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식.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0여년 동안 점심 도시락을 싸갈 수 없었다.’
대구 남구 대명동 영남대학교 병원 앞에 위치한 ‘손정가든’대표 박상해(37) 씨는 ‘배고픈 한(恨)’을 풀기 위해 요리사를 평생의 직업으로 삼았다. ‘돌’이 지나기도 전에 겪은 아버지의 소천(召天).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시작된 그의 ‘한 많은 인생’은 그뿐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입학식을 앞둔 어느 날, 소년 박상해는 ‘쥐불놀이’를 하다가 그만 산불을 내고 말았다. ‘입학 허가 취소’. 그는 동장 및 주민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2년 뒤 10살이 되어서야 초등학교에 재 입학할 수 있었다.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학교수업에서 배우는 것이 전부인 오지의 산간 마을. 전기와 수돗물조차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배고픔을 이겨야하는 겨울밤은 그에겐 너무도 길었다.
“그 시절엔 월말이 되면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편지봉투’에 쌀을 넣어오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죠. 그때는 어려운 사람이 어찌나 많았던지 쌀을 가져오는 사람도 적었을 뿐 아니라 그 쌀의 혜택을 받는 사람도 몇 안되었죠.”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영세민에게 나오는 배급이 중단되었기 때문. 점심시간이면 늘 운동장의 수돗가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워야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엔 늘 책이 있었다. ‘전교 수석·우등상·학생회장’ 등의 수식어가 그나마 배고픈 자리를 메꿔 주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고3.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그 많은 직업 중 요리사를 선택했다. 방과후 요리학원에 다니면서 짜장면 배달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음식과의 인연은 군대로 이어졌다. 취사병으로 근무하면서 남은 부식을 가난한 농가에 전해주다가 헌병대에 끌려간 일은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로 남는다.
그는 군 제대 후 서울·부산 등 유명 음식점 7군데서 주방장을 하며 음식별 장점을 모두 익혔다. 그리고 ‘손정가든’에서 주방장 인생을 새로 시작했다. 지난해 손정가든을 인수하며 대표가 된 것은 ‘음식귀정’의 결과라며 웃는다.
양념비법이 담긴 갈비요리가 그의 전문. ‘한우고집’은 말할 것도 없고, 고추·마늘 등 기본 재료는 고향에서 직접 재배, 공수한다. 경기침체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사업비결은‘가격과 맛의 경쟁력’때문. 그는 요리비법을 알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비법을 전수한다. 욕심을 버렸기 때문이다.
직원들에게 매출장부를 공개하는 것도 그의 독특한 경영방식. ‘모든 수익은 공평하게 나눈다’는 것이 그의 사업철학이기 때문이다. 밑바닥부터 시작한 일인만큼 함께 잘살아야 한다는 게 그의 변함없는 원칙이다.
잊기조차 힘든 배고픈 시절. 기억의 저편에 있는 그 시절을 기억하며 그는 배고픈 이들을 남몰래 돕는다. 몰래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말하기를 꺼리는 그. 어린시절은 힘들었지만 그의 청년기는 진정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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