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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서구 성당동 아미사우나 이용원 ‘헤어디자이너’ 권홍식(48)대표는 비장애인도 도전하기 힘들다는 국제기능올림픽 경기대회에서 무려 4차례나 입상을 하며 끊임없이 자기 발전을 위해 도전하는 집념의 장애인이다.

1998년 국제기능올림픽 지방기능경기 대회 장려상, 1999년 지방경기대회 동상, 2000년 4월 지방경기대회 금상, 2000년 9월 제 35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전국대회 은상 수상이 그의 노력하는 삶을 보여준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앤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기술을 배울 수 없다는 편견의 벽이 너무나 컸어요. 몸은 비록 불편하지만 정상인 못지 않은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게 좋은 결과를 가져 온 것 같아요.”

기억조차 희미한 네 살 바기 유년시절, 걸음마를 배워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그에게 ‘소아마비’가 찾아왔다. 2급 장애라는 멍에와 함께 부자유스러운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는 장애학교보다는 정상인들과 함께 공부하는 일반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다리를 절었지만 사고력(思考力)만큼은 ‘장애’로 가두어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북 의성의 대자연속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는 인생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2남 4녀 중 장남, 더 이상 가족과 동생들에게 부담을 지우기 싫었다. 독립선언, 17살의 나이였다. 천직으로 삼을 만한 기술을 배우기 위해 그가 찾은 곳은 ‘이용소’. 학원도 있었지만 현장의 살아있는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기본적인 허드렛일부터 찾아서 배워나갔다. 머리감기, 면도 등 장애인이란 수식어가 붙지 않도록 비장애인보다 더 열심히 했다. 1년 후, 고향을 떠나 대구로 나온 그는 규모가 큰 이용소에 취업을 했다. 더 나은 기술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한 곳에서 근무하기를 10년 여. 이용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적은 월급이지만 부지런히 모아 동생들에게 학비도 보냈다. 그리고 1만5천원하는 월세방도 얻고 개업도 했다. 고향에서 사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것도 그때였다. 27살의 나이였다.

“햇볕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장애인이 밖에 나가면 비장애인들에게 불편함을 준다는 생각들 때문에 집에만 있는 경우가 많죠. 앉아서 일하거나 공동 작업장에서 수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이죠. ”

장애인라는 이유 때문에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격지심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경제활동을 할 수 있으며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떳떳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 말이다.

권씨는 지난 1990년에 ‘연수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대구 새마을 연수원에서 함께 교육을 받은 이용업계의 13명이 모여 만든 ‘봉사단체’다. 이용업의 정보를 함께 나누고 무료이발봉사를 한다는 게 주목적이다.

대구 동구 반야월에 위치한 일심재활원은 연수회 회원들이 매달 넷째 화요일이면 어김없이 방문하는 곳이다. 150여명의 장애인들이 모여있는 재활원에 도착하면 오전 9시. 봉사활동이 끝나면 오후 6시가 훌쩍 넘는다. 조금 무리하면 불편한 다리가 아파 오기도 하지만 봉사활동 후에만 맛 볼 수 있는 흐뭇함은 그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준다.

기능올림픽 후진양성, 이용업 면허시험장 감독, 이·미용선수권대회 심사위원을 맡으면서도 틈틈이 공부해 스포츠마사지와 발 마사지 자격증까지 획득했다. 늘 도전하는 삶을 사는 그의 최대목표는 이용업계의 명장인 ‘기능장’이 되는 것. 그 꿈을 위한 도전은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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