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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영화제에서 관람한 마지막 영화가 되었습니다. 일주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이제 다음해를 기약하는 전주영화제,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자신만의 색체를 가진 모습으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아듀, 전주.
집시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악기는 무엇일까요? 세계 곳곳을 방랑하는 이들이니 만큼 피아노처럼 크고 무거운 악기보단 작고 휴대하기 좋은 것이라야 하겠죠. 그들의 슬프고 고된 역사를 반영할 수 있을 만큼 울림이 크고 슬픈 음색을 나타낼 수도 있어야 할테구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악기는 바이올린이고 그 다음으로는 기타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거의 이 두 가지 악기만으로 얼마나 훌륭한 음악을 만들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알제리 출신인 감독 토니 갓리프는 집시를 소재로 하는 영화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 자신도 집시문화에 경도된 사람이구요. 그래서 이 영화는 삶 속에 녹아 있는 집시문화를 보여주는 데 능숙합니다.
그러니까 영화나 공연장에서 성장을 한 무희들에 의해 양식화된 방식으로 공연되는 연주와 플라멩고가 아니라 식당에서, 바에서, 길 위에서, 거리에서, 파티에서 즉석으로 벌어지는 춤과 음악은 넋이 나갈 정도로 강렬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음악이 너무 좋아서 그걸 듣느라 스토리를 놓칠 정도지요. 아닌게 아니라 세자르 영화제에서 음악상을 수상했군요.
집시들의 피에는 음표들이 녹아 돌아다니는 게 아닐까 느껴질 정도로 그들의 음악적 능력은 대단합니다. 아무 반주없이 단순히 손뼉을 치며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주위를 압도하는가 하면 손에 잡히는 물건은 뭐든 악기가 되지요. 그게 유리잔이어도 그렇고 앉아 있던 의자라도 그렇고 나무상자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되풀이되는 파티에서 불리는 노래의 가사들은 하나같이 슬픈 내용을 담고 있지요.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이 내뿜는 정열과 터질 듯한 생명력을 생각한다면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만 원래 노래라는 것은 오랜 시간을 지나온 그네들의 삶이 묻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꼭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군요.
집시는 한번도 환영받은 적이 없는 민족이죠. 그들만의 나라도 없고, 그런 것을 가질 필요성을 느낀 적도 없고, 그래서 항상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온갖 오해(질병을 몰고 다닌다, 악마의 부하들이다, 부도덕한 존재들이다 등등) 속에서 살아야 했으니까요.
근대에 들어서는 많은 수가 히틀러에게 희생되기도 했고 자본주의적 물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구요. 그래서 그들의 음악이 더 슬프게 들리는 건지도 모르죠.
감독은 사라지는 집시문화와 집시 공동체에 대해 안타까운 눈길을 보냅니다. 문화의 존재를 알려 소멸의 시간을 늦출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적 스토리 자체는 아주 단순한 이 이야기를 이렇게 풍성한 집시문화의 향연으로 만들어 놓은 것일테죠.
카코는 계파간의 알력다툼에 희생양이 된 어린 딸 페파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합니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동생 마리오가 반대파 카라바키오파 우두머리의 동생을 죽이고 도피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카라바키오는 마리오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의 아들이자 카코의 조카인 디에고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유혈사태를 원하지 않는 카코는 원만한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만 일은 그리 쉽게 끝나질 않습니다. 그의 의도와는 달리 피의 악순환이 계속 되는거죠.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영화에서 음악은 거의 인물들의 대사와 동일한 무게를 지닙니다. 가끔은 음악이 화면을 먹어버릴 때도 있구요. 심지어 자동차 정비소의 소음까지 플라멩고의 리듬이 되어 피흘리고 쓰러진 카코의 몸 위로 흐를 땐 탄성까지 나오지요. 저렇게 음악을 쓸 수도 있구나, 하구요.
이 영화를 뮤지컬로 부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집시들은 일생을 훌륭한 뮤지컬 배우로 살아가는 셈이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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