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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시나브로 가는지 탑골 공원을 지나는 아침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로 가득하다. 아마도 사람들 발자욱이 많아서인지도 모른다. 유난히 서성대는 사람들이 많은 탑골공원 앞에는 오늘도 여전히 우물쭈물 갈 곳 몰라 하는 노인들과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 앞에서 너른 책상 몇 개를 붙여놓고 여러 개의 간판과 함께 서명을 받는 엄마들이 보인다.
한낮도 못되는 시간에 사람들의 오고감에 서명하고 가라는 엄마의 팔 잡아당기기는 아직은 서툴다.
"서명하고 가요."
"일본 역사 교과서 침략 삭제 왜곡 승인 규탄, 일본 상품 불매 서명운동 - 일본 역사 왜곡 온 국민이 강력히 대처하여 민족 정기 바로 세우자.(과소비 추방 범 국민 운동본부)-"(서명용지 맨 위의 글)
크고 작은 간판에는 색색의 글씨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며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하자는 이야기들이 씌여 있다. 하지만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 몇몇만이 서명을 할 뿐 대부분 시큰둥한 반응이다. 마치 "학생 헌혈하고 가요"하는 사람들처럼 붙잡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아직은 서명이라는 것에 익숙지 못해서일까.
마침 지나가는 여고생에게 서명하고 가라고 말해보았다. 머쓱해하며 서명을 하고 가는 그들을 붙잡고 몇 마디 물었다.
- 방금 서명을 했는데 어떤 마음으로 했는가?
"음... 일본이 나쁘다는 생각을 했어요."
- 일본의 역사 왜곡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자신들이 아는 대로 말해본다면?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철도를 놔준 것이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서라고 했는데 그것은 자신들이 중국을 침략하러 갈 때 편하게 갈려고 만든 거라는 거구요. 종군 위안부 할머니가 돈을 받고 위안부 일을 했다는 거요."
- 일본이 우리 역사를 왜곡해온 사실은 식민지 사관을 통해 알았는데, 이번에 또 다시 일본이 그들의 역사 교과서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려고 한다. 그 내용에 대해 알고 있는가?
"음... 음... (네 명의 학생 중 세 명은 한 학생이 말할 때마다 고개만 끄덕일 뿐 자세히 알진 못했다.) 첫째는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시켜 놓고서 우리나라가 원해서 합방했다고 말한 거구요. 둘째는, 가장 중요한 건데요 종군 위안부 할머니가 돈을 받고 (스스로 원해서) 그 일을 했다고 말한 거예요."
- 지금 서명한 내용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실에 대한 항의와 일본 상품 사지 말자는 내용인데 자신들이 지금 갖고 있는 것 중에 일본 제품은 얼마나 되는지?
"많구요. 특히 볼펜 같은 것은 많아요."
- 그렇게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것보다 훨씬 좋아요. 우리나라 것은 쉽게 망가지지만 일본 것은 좋구요 예뻐요. 그리고 아이들이 멋진 걸 사오면 보게 되는데 거의 다 일본 거예요."
- 이번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실에 대해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말이 있는가?
"없어요. 어떤 선생님도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아요. 학교에서 가르쳐 주면 좋겠어요. 아무도 말 안하니까 모르는 아이들도 많아요."
- 그렇다면 학교에서는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별로 이야기는 없구요. 시험이야기 많이 해요."
-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 주로 주고 받는 이야기 소재는?
"뭐, 대학 이야기죠. 그리고 공부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서서 이야기하는 사이 사람들의 부딪힘이 많아진다. 하지만 썰렁한 서명 책상. 마지막으로 그들의 꿈을 물어보기로 한다. 놀라운 것은 고3의 경우인데도 구체적으로 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없단다. 한 학생은 사회가 전문직을 우대하기 때문에 그저 전문직업을 갖기 위해 대학만 가면 된다고 생각한단다.
나머지 세 학생의 꿈은 수의사, 과학자, 천문학자로 나타났는데, 우선 시급한 것은 대학 입시고, 변덕스러운 교육부장관의 방침으로 자신들이 시대의 실험대상 같아 희생양 같다며 왜 우리만 억울하게 당해야하냐면서 학교에서도 우리나라 교육 상태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곤 한단다.
그래도 이 학생들은 솔직한 것 같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말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관이 나름대로 서 있다고 볼 수 있으니, 하지만 몇 발자욱만 움직이면 귀에 구멍을 두세 개씩 뚫고 엷게 화장을 하고 짧게 올려입은 치마와 뾰족 튀어나와 올라선 운동화를 신은 청소년들도 있다. 과연 그들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실에 대해 알기나 할까.
서명 책상에 앉아 있다 우리의 이야기에 끼어든 엄마는 "내가 왜 이렇게 나와서 서명을 받고 일본 상품 안 사고 안 쓰자고 하는지 알겠냐"며 제대로 잘 알고 실천하기 바란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나도 그들에게 몇 마디 당부하기로 한다. 세월을 조금 먼저 보낸 선배로 말이다.
하나는, 자신의 삶을 오늘 하루뿐이라고 살아보자는 것. 아침이면 새로 태어나 열심히 살다가 저녁에 흐뭇한 미소로 잠들 수 있어야 내일을 활기차게 맞이할 수 있다는 것. 또 하나는, 세상은 저지르는 자의 것이라는 것이며 저지르는 자만이 성공과 실패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
나 자신도 지켜가려고 노력하는 일이기에 더 더욱 절실한 당부였다. 서명 한 줄이 우리나라의 자존심이 되고 나아가 그들의 얼토당토않는 일을 저지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우리의 할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서명 책상에 앉아 계시는 분에게 언제부터 이 운동이 있었냐고 물으니 벌써 20여 일이 넘었다고 한다.
세상엔 정말 일어나선 안 될 일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일어난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한 사실도 마찬가지다. 부끄럽게도 내 손에 일본산 디지털카메라가 쥐어 있다. 언젠가 고교 시절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나라의 물건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면서 우리나라는 이에 아랑곳 없이 외제라면 정신을 못차린다면서 국민성 이야기를 해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민족성 불감증에 걸린 우리들. 여기저기 돌아보면 그냥 스쳐서는 안 될 일들이 많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것이다. 최소한이라도 사실을 알고 이 사실의 잘못됨을 널리 알리고 그들이 제대로 된 역사를 통해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하고 정직한 역사를 그들의 후손에게 물려주길 바란다. 거짓말보다 무서운 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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