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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뜨는 시각이 빨라졌는데도 늦잠을 자는 일이 많아진다. 유리창이 눈부시게 햇살을 받고 있는 데도 말이다. 아침을 빨리 시작하면 하루가 길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나 며칠 전부터 집 근처 천변을 걷기로 했다.

헬스클럽이나 산행을 주로 하긴 했지만, 운동을 위한 운동이 아니었나 싶어 생각하면서 걷는 운동을 하기로 했다. 아침바람은 보드랍고 철망 사이로 삐죽 나온 장미나 찔레꽃, 개망초 들이 천변을 지나는 출근길 차들을 넉넉하게 바라보고 있는 중랑천 변.

오늘도 어김없이 7시가 조금 못되어 길을 걷는다. 흙길이라면 오죽 좋을까마는 이 동네처럼 낮게 흐르는 중랑천이 있고, 동네를 아우르는 아담한 뒤산이 있는 곳도 서울 시내에선 드물지 않을까. 사람들은 일찍부터 나왔는지 열심히 뛰고 있다.

천변을 오가는 여러 풍경은 중랑천을 따라 바람에 흘러가는데, 그 풍경을 보자면, 우툴두툴한 허술한 포장과 갈라진 길 사이를 자전거나 개를 데리고 산책하기도 한다. 주인의 뒤를 따라 요리조리 꼬리를 흔들며 걸어가는 녀석은 어린 꼬마의 재롱 같다. 말끔한 매무새로 며느리 말을 하는 할머니와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등을 토닥여주듯 고개를 끄덕이는 할머니. 일찍부터 깔끔하게 나와 계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 슬쩍 이야기를 엿듣고 싶었지만 흘끔 쳐다보기에 그냥 스친다.

찔레꽃 향기에 취해 걷는지 조차 헐렁한 생각인데 정자에 빨간 이불이 눈에 뜨인다. 때절은 이불 속엔 허름한 구두의 주인인 듯한 사람이 머리카락만 내보인 채 잠들어있다. 정자 주위엔 박스와 그의 살림같은 몇 가지 것들이 정자 아래와 옆에 놓여있다. (그는 운동이 끝나 돌아가는 그 시간까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쌩쌩 출근 차량의 속도가 빨리 출근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불 같이 흐른다. 노숙자일까. 사람들은 그저 그의 일이거니 하며 쳐다만 보고 간다. 잔뜩 먼지에 휩싸인 그의 찌그러진 구두가 그의 노숙 생활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도 누군가의 가족일텐데 말이다.


어느 노숙자의 넋두리

내 한 몸 누일 곳 여기보다 더 좋을까. 희끗희끗한 실밥머리 까치가 알을 품겠다. 길쭉날쭉 코털과 턱수염을 보아라. 시푸르딩딩한 눈 주름살은 또 어떠냐. 내게서 봄은 어디로 도망갔나. 어둠 짙은 나약함이 저 중랑천을 덮는다. 나는 거울이 없어도 보이지. 향긋한 꽃 냄새가 중랑천을 타고 올라와 내 볼을 씻어주는 걸. 후줄그레한 옷매무새는 아직도 철 모를 겨울이야.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부자동네 가봤더니 내 발에 맞는 구두 얼마든지 있더라. 아아 일어나고 싶지 않다. 누가 나를 건드린다해도 일어나고 싶지 않다. 세월을 지지고파 아아 지지고파. 심심한 하루여. 두리번두리번 새끼손가락보다 더 짧은 꽁초 한 대 아쉬운데, 지나가던 남자가 휙 던져주누나. 아아 고마운 사람.

뒤로 돌아 누워볼까. 저 놈의 개새끼는 머리와 꼬리에 색깔도 고웁다. 에이 비러먹을. 내 팔자는 개보다도 못하다. 울어매 나 낳고 미역국 먹었다는 데 밥값은 커녕 하늘 아래 숨 끊어진 줄 알지도 못한다. 으으으으 중랑천의 새벽은 계절이 없다. 해야 뜨든 지 말든 지 빨간 이불 둘둘 말아 세상을 안볼란다. 내게 시간을 묻는 자 없을 테지만 내가 아는 시간은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낄 때뿐이다.

우우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여름이다. 가끔은 코 끝을 쑤셔대는 사람들의 고기 굽는 냄새. 나는 그 냄새보다 그들의 땀냄새와 이야기 냄새가 좋아. 때론 허리가 꺾이도록 웃다가 때론 눈알이 빠지도록 울다가. 나도 생각하며 걷고 싶지. 저 개새끼도 주인따라 왔다갔다 하지만 결국 주인 곁을 떠나지 않지. 어어 오른 다리 올리고 오줌을 누는가. 뒷다리로 흙을 파는 녀석아. 여긴 내 자리여. 내 집이라구. 이 개같은 놈아.

언제고 자리에 임자가 있었던가. 우리들 그럭저럭 하늘 아래 고개들고 함께 살아가는 것을. 누가 내 이불을 들추며 일어나라 해줄까. 누가......



우리들 사는 모슴은 이래저래 다양하다. 다들 말은 없어도 자기의 생각을 실천하며 살고 분수껏 살고자 한다. 하지만 가끔은 가진 자들의 보이지 않는 횡포에 목이 마를 때가 한 두번인가. 그저 꽃 피면 꽃 보고 비 오면 비 맞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내내 이불을 감고 있는 남자가 일어나 팔돌리기라도 하길 바랬다. 아니 중랑천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만 있어도 좋았다. 꽃향기가 묻은 아침 바람을 그는 이불 속에서 느낄까. 그에게 희망은 둘둘 말았던 이불을 개어놓고 일어나는 것 부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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