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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자금 제공에다 부실공사 논란까지 말 많고 탈 많은 경부고속철도의 1단계 완공이 3년 앞으로 다가왔다. 당초 5조원이면 충분할 것이라던 공사비는 18조를 훌쩍 넘어섰고 대구역사 지하화 논란까지 겹쳐 과연 이 예산으로도 완공이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건설중인 고속철도 공사구간을 지켜보면 굳이 부실공사나 로비자금 탓이 아니더라도 왜 이렇게 엄청난 공사비가 들어갈 수 밖에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고속철도공단이 밝힌 대로 경부고속철도는 산을 뚫고 강을 건너 최대한 직선으로만 건설하는 탓에 노선의 태반이 터널 아니면 다리다. 비전문가의 눈으로 봐도 프랑스처럼 평지가 많은 지형에 맞추어 개발된 TGV가 산이 많은 한국의 지형을 달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쉽게 이해가 된다.

문제는 경부고속철도나 호남고속철도는 어떻게든 무리를 해 완공을 한다 해도 장항선, 전라선, 경춘선 등 간선철도에 연결된 수 많은 지선들의 경우 장차 이런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TGV식 공법을 고수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경부선 하나만 제때 완공해도 우리의 재정형편을 생각할 때 거의 기적이나 다름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

한국이 TGV만을 고집하며 수십 조의 예산을 퍼붓고 있을 무렵,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는 틸팅 기술을 도입한 X-2000이라는 독특한 열차를 개발해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고 있었다.

지금은 봄바디에로 합병된 독일의 아드트란츠라는 회사가 처음 개발한 이 열차는 곡선구간을 달릴 때 마치 모터사이클 선수처럼 열차를 옆으로 기울여 탈선의 위험 없이 최고 275Km에 이르는 고속으로 달릴 수 있다. 따라서 이 방식을 도입할 경우 굳이 고속철 전용 노선을 새로 건설하지 않고서도 기존 철도를 개량해 얼마든지 고속으로 달릴 수 있는 것.

지난 해 기자는 유럽 여행 중 실제로 이 방식을 이용해 운행 중인 <시살피노-Cisalpino>라는 고속전철을 탈 기회가 있었다. 이태리의 베니스를 출발해 밀라노를 거쳐 스위스의 제네바까지 운행하는 이 고속전철은 알프스의 험준한 지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최고 시속 200Km에 이르는 빠른 속도로 달린다.

기관차 앞에 달린 센서가 곡선구간을 미리 감지하면 제어신호를 각 열차에 전달해 자동으로 열차를 좌우로 기울인다. 구간에 따라서는 틸팅 기능이 부드럽게 이루어지지 않아 멀미를 느낄 때도 있었지만 <시살피노>는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고속으로 내달려 밀라노-제네바 구간을 약 2시간 만에 주파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경부고속철도처럼 완전히 새로운 노선을 건설하느라 엄청난 예산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속도를 얻을 수 있었던 것.

신규노선의 건설 없이 철로개량만으로도 획기적인 고속운행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널리 알려져 틸팅 열차는 세계 곳곳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이태리 외에 스웨덴이 웁살라, 괴테베르그와 남부의 휴양도시 말뫼를 잇는 노선에 X-2000을 운행 중이고, 호주가 시드니와 캔버라 구간에 이 열차를 투입했으며, 미국의 암트랙은 <알스톰-봄바디에> 콘소시엄이 공동개발한 <아셀라>라는 틸팅 열차를 보스턴-뉴욕-워싱턴DC 구간에 운행 중이다.

암트랙의 아셀라는 뉴욕-워싱턴DC 구간을 최고 240Km에 이르는 빠른 속도로 달려 약 2시간 40분 만에 주파한다. 공항을 오고 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비행기와 거의 대등한 여행시간에다 비행기 2등석에 준하는 서비스, 저렴한 요금으로 아셀라는 이 구간을 운항하는 국내선 여객기의 막강한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다.

틸팅 열차는 TGV에 비해서는 속도가 느린 것이 한 가지 단점이다. 스웨덴의 X-2000의 경우 최고속도가 275Km에 그쳐 최근 시속 500Km 시험주행을 성공리에 마친 TGV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환경파괴를 수반하는 값비싼 전용철도 건설 없이 기존노선을 개량하는 것만으로 고속철도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면 경부-호남선 등 간선 철도 외에 기타 노선에는 충분히 고려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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