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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진정으로 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은, 궁궐 안의 정사나 권력자들 간의 암투나 왕위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아니라 백성들의 심성에 흐르고 있는 올바르지 못한 것에 대한 끈질긴 저항정신과 이 땅에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민초들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애환과 처절함이 역사의 행간에 버려진 채 방치되거나 괄시를 받는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민중의 숨소리를 들을 수 없게 한다. 이름 없는 그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고 이름을 붙여주고 족보를 만들어 역사의 행간에서 건져 올려 모양을 만드는 일도 소설이 해야 할 중요한 작업 중의 한 가지라 생각한다."활빈도"는 그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씌어진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김주영 작가의 말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정서를 한 (恨) 과 정(情) 이라고 말합니다. 언제 생각해도 참으로 마땅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양학문을 전공하면서 짧지 않은 시간동안 관련서적을 공부하고 읽고 영어권사람들을 많이 만나보고 그들로부터 강의를 들었지만 어느 책 , 어느 그 누구에게서도 한 (恨) 과 정(情)에 관한 이야기를 보지 못했고 듣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한 (恨) 과 정(情)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둘이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는 맘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정이라는 것이 풍부한 가운데 여분의 것을 타인에게 주는 것이 아닌 핍박받고 한이 서린 자신의 중요한 정수를 남에게 기꺼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feeling이나 give에는 눈 닦고 봐도 이런 깊은 속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한 (恨) 과 정(情)은 누구의 것이었는가요? 이것은 명백히 왕과 사대부로 대변되는 지배계층의 것이 아니라 다분히 민초라고 불리던 일반 백성들의 몫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을 대변하는 것은 바로 이 민초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고통받으나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바퀴였던 민초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왕건을 보노라면 마치 장군몇명이 성을 함락하고 승리를 얻어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왕건이 나주를 함락할 때 그에게는 요리를 준비하던 요리병도 없이 제 혼자 적을 물리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역대왕조의 권력다툼을 다루는 책은 수없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고 잘 팔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화두가 되는 것은 늘 왕후장상이지 민초들이 아니며 후백제를 통일한 것은 왕건이지 실제로 피를 흘리며 목숨을 버린 일개 병졸들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껍데기 천국에서 우리에게 <활빈도>나 <장길산>이라는 대하소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활빈도나 장길산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옛이야기를 담담하지만 처절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뭄이 들면 자신의 아이를 버려야만 했고 그것을 특별히 아픈 기억으로 여길 여유 조차 없는 사람들, 주먹밥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어야 했던 사람들, 양반들의 가축대우를 받고서도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했던 옛 우리 어른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활빈도는 탐관오리들의 탐욕과 외세에 고통받던 구한말, 시대의 모순과 아픔을 극복하려는 동학군의 잔당, 남사당패와 같은 늘 찬밥신세였던 민초들의 삶과 투쟁을 다룬 이야기이며 장길산은 구월산의 녹림당들이 펼치는 활약상을 그린 기념비적인 의적소설입니다.

활빈도나 장길산 모두 한 (恨) 과 정(情)을 무기로 의(義)를 추구하지만 결국엔 역사에게 버림을 받아야 했던 아픈 도적이지만 의적이었던 민초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서로 닮은 점이 많습니다.

특히 장길산을 읽다보면 차라리 하나의 문학작품이라기 보다는 왕과 귀족들이 아닌 고통받던 일반 백성들의 일상생활과 그들이 이야기하던 사연들의 보고(寶庫)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설 곳곳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우리 할
배들의 일상생활과 풍습들이 빼곡이 차 있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수많은 세태와 풍속들의 한 단면들이 홀로 버려져 있지 않고 모두 날날이 전체줄거리에 엮여져 있다는 점은 더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장길산이나 활빈도에서 만날 수 있는 또다른 즐거움은 우리들의 정겨운 우리말들을 거의 매 줄에서 수두룩하게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항아리병, 개호주, 강조밥, 기직, 톹, 뜸베질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사실 이러한 아름다운 우리말들은 웬만한 국어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너무나 귀중한 문화재입니다. 특히나 장길산에는 역시 그 어느 국어관련 서적보다 풍부한 절묘하고도 정감어린 우리들의 옛 속담들이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장길산이 총 열 권이고 활빈도가 오 권으로 꾸며져 있으니까 서점에서 이 책들을 집어드는 것이 용기가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굳이 두 권 중에 어느 것을 먼저읽을까?하는 질문을 한다면 저는 장길산을 선택하겠습니다. 분량이 두 배이듯이 책장 넘어가는 속도가 아마 두 배가 될 것이며 활빈도도 참으로 가치 있는 책이지만 장길산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안타까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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