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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어딜 가나 다 똑같다.

서울 한복판의 명동거리를 가나 베이징의 번화가인 왕푸징거리를 가나 그 느낌은 별반 차이가 없다. 거리의 풍경이나 건물들의 모양, 사람들의 언어와 생김새만 조금씩 다를 뿐이지 도시에서 풍기는 ‘거만한’ 자태나 ‘사람의 향기’를 좀체로 맡을 수 없는 건조하고 메마른 도시의 공기는 서울이나 베이징이나 매한가지이다.

도시는 그 나라의 경제성장을 압축하고 있는 대형건축물과도 같다. 얼마나 높고 우람한 건물들이 많이 치솟아 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겉모습’이 폼이나는 법이다.

일찍이 서구의 ‘근대화론’자들은 모든 국가의 경제발전은 단계적인 산업발전의 과정을 거쳐 결국에는 그 정치 경제적인 발전의 양상이 동질화되고 서구화된다라고 하는 다소 ‘오만방자한’ 이론들을 주장한적이 있다. 그들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가치편향적 오류들은 제껴두더라도, 일단 도시만을 보게 되면 확연하게 그 획일적인 발전의 과정들이 느껴진다.

베이징 거리에서 토종 베이징문화를 접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 자고 일어나 보면 밤사이 새 건물들이 어느새 올라가 있고, 온갖 외국인들과 각지의 지방 사람들이 북적대는 도시이다 보니 애써 명승고적들을 찾지 않는 한 베이징거리에서 옛 베이징의 정취를 느끼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그러나, 얼핏 획일화된 ‘성냥갑 도시’인 것 같은 이 베이징에도 조용히 그들만의 둥지를 틀고 있는 라오(老)베이징의 모습과 그곳에서 대대로 토박이 베이징인으로 살아오고 있는 사람들의 골목이 있다.

‘후통’(湖洞)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작은골목’이란 뜻인데, 그곳은 마치 베이징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이 후통 안에는 베이징의 옛 주택양식과 베이징 고유의 사투리 그리고 토박이 베이징 서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른 여름, 후통으로 가는 버스 안

다시 돌아온 토요일 아침.
주말이라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잊어버린 지 오래지만, 그래도 모처럼 어딘가를 ‘쏘다니고’ 싶다. 여행을 갈 때나, 시내 나들이를 갈 때 늘 ‘동행’이 없어서 심심하지만 어떤 때는 ‘혼자’라서 오히려 편할 때도 있다. 동행이 있을 때는 내가 굳이 가고 싶은 곳이 아니더라도 그 친구를 위해 예의상 함께 가줘야 하는 곳이 있고, 난 걷고 싶은데 상대방은 그걸 싫어하는 눈치면 또 굳이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되는 때도 있어 차라리 혼자가 맘 편할 때가 많다.

‘어디를 가볼까’하고 한참을 궁리하다가, 며칠 전 왕푸징 서점에서 사온 작은 후통 여행책자가 생각이 난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그 거야!’하고 결정을 내렸다.

책자에 나와 있는 동 시청취 후통가를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타니 후끈한 열기가 온 얼굴로 ‘후우욱’ 하고 몰려온다. 오늘도 온도가 35도를 넘는다는 아침뉴스를 보아서 단단히 더위에 대한 ‘결전’을 준비하고 나왔지만, 이 더위란 놈은 생각밖으로 아주 강적이다.

에어콘 시설이 없는 낡은 버스에 앉아 그 더위를 다 받아들이고 있자니 슬슬 짜증이 나고 그만 다시 내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 더위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나의 ‘게으름’이라는데 생각이 미치면서, ‘시원한 냉커피가 있는 안락한 우리집’을 계속 속삭여대는 그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다시, 운동화끈을 질끈 묶던 초심으로 되돌아간다. 그래도 맘은 계속 집쪽으로 향한다. 생각해보면 그건 내 ‘게으름’ 탓이 아니라 순전히 그놈의 더위 때문이다.

내가 내릴 곳은 버스의 종점인 용허궁이다. 우리집이 거의 출발지이기 때문에 종점까지는 족히 1시간은 달려야 할 것이다. 버스 안에서 신문이나 책을 읽는데 습관을 들이지 못하는 나는 중국에 온 이후 ‘사람구경’하는데 새로운 취미를 붙였다. 한국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잠을 잤지만, 중국버스는 잠을 잘 수 있는 환경이 조금 열악하다보니 ‘잠’대신 매 정거장에서 새로 승차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재미를 들였다. 이런 이상한(?) 취미는 사실 중국사람들한테 배운 것이기도 하다.

중국사람들은 유난히 무슨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길거리 ‘쌈’구경이야 말할 것도 없고 기차 안에서 해바라기씨 까먹으며 옆사람 흘끔흘끔 구경하기, 심지어는 버스 안에서 소매치기 당하는 장면도 그냥 ‘구경’한다. ‘구경’하기 좋아하는 것이야 ‘남의 집 불구경이 최고’라고 말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중국사람들의 이 ‘구경꾼’ 심리속에는 구경은 하되 절대 ‘남의 일에는 간섭 안한다’는 조금은 독특하면서도 견고한 ‘불간섭주의’가 엿보인다.

지난해 여름, 톈진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삼륜자전거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형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주변에서 ‘우루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저마다 한마디씩 뭐라고는 떠드는데 누구 하나 나에게 휴지나 손수건을 건네주며 다리의 피를 닦으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게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나를 에워싸고 구경하는 것이 너무 끔찍해서 상대방 운전자와 잘잘못을 가릴 정신도 없이 피가 질질 흐르는 다리를 끌고 ‘후다닥’ 택시를 잡아 도망쳤던 기억이 있다.

그 사건 뒤로 중국사람들의 이 ‘불간섭주의 구경꾼’ 심리에 대해 조금은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나, 이렇다할 만한 명확한 설명은 구하질 못했다. 그러던 차에 지난해 겨울, 우연히 서점에 들려 린위탕(林語堂)이 1934년에 쓴 ‘중국인’(中國人)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는데, 마침 그 책에 중국인들의 이러한 심리의 근원에 대해 쓴 내용이 있었다.

린위탕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항상 당부하는 말은 “다른 사람의 일에는 절대 관여하지 말거라”란다. 중국의 어머니들은 아들에게 왜 이런 당부를 하는 것일까. 린위탕의 설명에 의하면, 개인의 인권이 법률에 의해 보장받지 못했던 구전통사회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바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안전한 ‘처세정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처세정책을 ‘소극적인 사회회피’(消極避世)라고 부르고 있다. 일종의 보신주의(保身主義)인 셈이다.

이 ‘소극적인 사회회피’가 생겨난 역사적 근원을 좀더 따져 들어가고보니, 166-169년(한말)사이 일단의 문인학사들이 국가의 정책뿐만 아니라 황제에게까지도 적극적인 비판운동을 행했는데, 결국 이것이 황제의 노여움을 사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고 이 당시 온집안이 몰살당하거나 유배, 감금된 학자만 2-3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른바 ‘당고’(党錮, 다른당들의 정치활동을 금하는 것)라고 불리는 이 사건 이후, 중국지식인 사회를 중심으로 사회나 정치문제보다는 술, 여자, 시 그리고 도가(道家)의 신비주의에 탐닉하게 되는 ‘소극적인 사회회피’현상이 생겨났다는 해석이다.

린위탕이 계속 설명해준다. 영국인들이 외출할 때 습관처럼 우산을 들고 나가는 것처럼, 정치적 기후가 불안정했던 중국에서는 문밖을 나설 때는 항상 ‘남의 일에 참견 안하는 것’을 철칙으로 여겼다고. 혹자는, 현대로 넘어와서는 이러한 현상이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인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도 한다

한 20여분을 달렸을까. 한 정거장에서 노랗게 물들인 머리에 레게파마 비슷한 걸 한 젊은 아가씨와 그녀의 친구인 듯한 여자 한 명이 탑승을 한다. 버스 안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들에게로 집중된다. 내 시선도 그녀들에게로 ‘꽂힌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복장이 너무 야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독한’ 햇빛이 내리쬔다고 하기로서니 그렇게 야하게 입을 수가... 거의 속옷을 입었다.

버스 안 사람들은 마치 공범이라도 된 듯 한통속이 되어 그녀들을 훔쳐본다. 좀더 뻔뻔한 남자들은 아예 몸을 옆으로 돌려서 다리를 꼬고 노골적인 ‘감상’을 한다. 한 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계속 그녀들을 노려보고 있다. 처음엔 그녀들의 차림이 재밌다가 조 금뒤에는 구경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더 재미있어서 나는 다시 그 구경꾼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승차한 후 가는 길이 조금 덜 지루해졌다.

베이징 토박이들의 고향, 후통

드디어 버스가 종점인 용허궁에 도착했다.
그 소책자에는 쫑구러우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용허궁에 도달하는 후통여행을 권하고 있는데 나는 그 반대의 행로를 가게 된 것이다. 일단 버스에서 내리니 어디로 가야할지 잠시 방향감각을 모르다가 지도를 꺼내 용허궁 입구로 가는 길을 확인한다.

10여분을 걸으니 용허궁으로 가는 입구가 나온다. 그곳에서 바로 맞은편 골목으로 꺽어들면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동 시청취 후통가로 연결되는 꿔쯔졘(國字監) 거리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막상 용허궁 입구까지 오니 이왕이면 그 사찰도 구경하고 싶어졌다.

외국인들을 가득 실은 여행버스들이 즐비하게 들어서는 걸 보니 속으로 좀 ‘괜찮은 절인가보다’라는 생각을 하며 입장료 15위안을 내고 용허궁 관람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30여분을 ‘휘익’하고 한번 대충 둘러본 뒤 돈 아깝다고 투덜거리면서 나와버렸다.

역시 나에게는 그런 고상한 고(古)사찰을 감상할 수 있는 소양이 없는가 보다. 그 사찰은 청조 건륭제 때 지어진 베이징 최대의 티벳 라마교 사원이라고 하는데 막상 안에 들어가보니 사찰의 지붕이나 글씨, 문양 등이 조금 다를 뿐이지 내 눈에는 그저 여느 절과 다를바 없다. 게다가 날도 더운데 사람까지 바글바글해서 그다지 세밀하게 구경하고픈 의욕도 안 생긴다.

내 머릿속의 고사찰은 역시 속세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채 깊은 산속에 ‘은거’하고 있으면서, 초연한 목탁소리가 바람소리에 은은하게 실려오는 작은 암자같은 절밖에 없다.

사기 당한 느낌으로 용허궁을 빠져나와 원래의 행선지였던 꿔쯔젠 후통가로 들어섰다. 용허궁에서 바로 길을 건너 맞은편 꿔쯔졘 골목으로 들어서니 거대한 나무들이 지붕을 만들어 이글거리는 해를 가리고 있다. 나무들에 가려진 지붕 사이로 드문드문 햇살이 비치면서, 그 기세등등하던 불볕은 하늘을 반쯤가린 나무지붕 아래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역시 전통적인 후통거리답게 거리의 풍경이 번잡한 시내와는 확연히 다르다. 거리 양 옆으로 베이징의 전통가옥들이 쭈욱 이어져 있고 길 사이사이 마다로 후통들이 나 있다. 그리고 그 후통을 따라 베이징 토박이들의 누추한 집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후통이란 단어의 어원은 원래 몽고어의 호토그(Hottog)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말의 뜻은 ‘우물’을 의미하며, 당시 우물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살다보니 중국으로 건너와 후통으로 변한 이 단어는 곧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을 지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해석에 의하면, 이것은 훠투완(火疃)이라는 단어에서 변형된 것이라고도 한다. 칭기스칸이 베이징에 수도를 정하고 원나라를 세울 당시, 주민들의 거주지역을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서 몽고인들이 관할하게 되었는데 각 구역과 구역 사이를 긴 통로로 분할했다. 이 통로는 사람들의 보행로였을 뿐만 아니라, 화재가 났을 때에는 주민 격리지역으로서의 역할도 했다고 하는데, 이 통로가 몽고어에서는 훠투완이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호토그이든 훠투안이든지간에, 어쨌든 후통이란 단어가 몽고어에서 나온 말임에는 확실한 듯하다. 원나라 때에는 400여개에 불과했던 이 후통은 그후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치면서 점점 그 수가 늘어났고, 현재까지도 베이징을 대표하는 전통의 상징이 되고 있다. 그러나 도시의 현대화가 빨라지고 있는 요즘은 이 후통들도 높은 빌딩과 현대적인 건물들에 밀려나면서 몇 군데 문화유적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 이외에는 차츰 사라져 가고 있는 추세이다.

한적한 지방 소도시의 한 골목길 같은 꿔쯔졘 거리에는 유명한 후통들뿐만 아니라 지금은 베이징 수도박물관으로 개명된 콩쯔미아오(孔子廟, 공자사당)와 그 거리의 ‘문패’이기도 한 꿔쯔졘이 자리하고 있다. 꿔쯔젠은 원, 명, 청조 삼대에 걸쳐서 최고학부의 역할을 했던 곳으로, 태학문(太學問)내 ‘피용‘(闢雍)정이라는 곳은 현재 중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대 ’학궁‘(學宮)이라고 하며, 원래는 건륭제가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 거리를 따라 계속 걷다보면 지극히 서민적인 풍경들과 고풍스러운 거리들을 끝없이 만날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탠다면 베이징의 전통적인 주택양식인 쓰허위안(四合院)을 맘껏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쓰허위안의 구조는 가운데 정원을 두고 사방이 모두 봉쇄되어 있는 구조로 봉건사회의 가족제도 및 계급 계층구조를 그대로 반영해주는 건축양식이기도 하다. 즉 상하간의 위계와 남녀의 구별 등이 심했던 중국 봉건사회에서 이 건축구조는 이러한 위계질서를 상징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인 및 직계 가족들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이 쓰허위안의 봉쇄구조는 이러한 위계질서를 명확히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데에도 매우 효율적이었다고 한다.

꿔쯔졘 후통거리에서부터 시청취까지 이어지는 거리에는 이러한 쓰허위안들이 많이 있다. 고관대작들이 살았던 대규모 쓰허위안에서부터 서민들의 소형 쓰허위안까지, 이 쓰허위안에서는 옛 베이징 사람들의 향취가 그대로 묻어난다.

이 거리에는 꿔모루(중국 현대의 시인이지 작가)나 송칭링(손문의 부인) 등과 같은 유명인들이 거주했던 고가(古家)들도 잘 보존되어 있어서, 역시 전통적인 쓰허위안의 양식을 띄고 있는 그들의 고가를 방문해서 한번쯤 그네들의 삶의 흔적들을 음미해보는 것도 괜찮다.

특히 송칭링의 고가가 있는 후통은 여느 후통거리와는 달리 좁은 통로를 따라 5분여쯤 들어가면 마치 별세계인냥 큰 호수가 나타나면서 낚시를 하고 있는 강태공들도 볼 수 있다. 그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마을의 분위기도 여느 후통거리와 다르다. 베이징에선 좀체로 보기 어려운 옛 베이징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일반 서민들이 사는 작은 쓰허위안은 말만 잘하면 그냥 들어가서 그네들의 집구조나 사는 모양 등을 구경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요즘에는 문화유산으로 보존된 쓰허위안들이 많이 개방되어서 그리 힘들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사람’이 없는 횡덩그레한 건물은 재미가 없다.

송칭린 고가가 있는 후통을 나와서 얼마쯤 더 걸어가니 제법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골목이 보인다. 주로 노인네들의 모습이 많다. 바둑을 두는 노인네들도 있고 옆에서 구경하는 노인들, 앉아서 부채질을 하고 있는 노인들 등등.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그 골목을 돌아다니자니 그 ‘어르신네들’이 나를 자꾸 쳐다본다. 아침부터 한 네시간여를 줄창 걸은 탓에 어디 ‘퍼질러’ 앉아 얼음동동 띄운 냉수 한사발 시원하게 들이키고 싶다. 다소 인자하게 보이는 할머니 옆으로 가서 들고 있던 지도를 깔고 ‘철퍼덕’주저 앉았다.

할머니는 별로 놀라지 않는 기색이다. 주름이 ‘쪼글쪼글한’ 얼굴에서 할머니의 표정을 읽기란 참 어렵다. 그냥 나를 ‘찬찬히’ 바라보고 계신다. 내가 먼저 할머니에게 말을 걸어야 하나보다.

“할머니, 여기에 오래 사셨나요?”
할머님이 잠시 ‘생뚱’하고 날 보시더니 “아가씨 화가야?”하고 동문서답을 하신다. 내 인상이 어딜봐도 화가처럼 보일 리는 만무하고, 게다가 무슨 그림그릴 도구들을 지닌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화가’냐고 물으시는게다.
“저 화가 아닌데요...”
“그럼 사진사야?”
“아뇨...그냥 관광객인데요..”
“음.. 관광...여기 뭐 볼 게 있다고...”

할머님 말에 따르면, 매일 그 후통에 나와 바람을 쐬고 있으면 가끔씩 그림그리는 사람들이나 사진사들이 와서 한참을 뭘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는 걸 보고 또 ‘그림을 그리려나 보다’라고 추측하셨다는 게다.

할머니는 베이징 토박이라고 하신다. 워낙 베이징 고어를 많이 써서 거의 반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충 눈치껏 알아들은 내용에 의하면 ‘영감님’은 벌써 오래전에 먼저 저세상으로 가고 지금 그 후통거리에서 큰 아들네와 같이 산다는 것이다. 손자들도 다 커서 이제 자기는 ‘죽는 날만 기다리는 쓸모없는 노인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말이 조금 슬프고 쓸슬하게 들리기보다는 그저 습관처럼 되풀이하는 의미없는 후렴구처럼 느껴진다.

갑자기 할머님이 몸을 일으키시며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신다. 물 한잔 주신다는 게다. 이렇게 황송할 수가.. 그러나 할머님이 들고 나오신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모리화차(자스민차)였다. 그것도 거의 한 사발이나 된다. 아....! 할머님 정말 죽겠습니다. 더워서...
물론 속으로 한 말이다. 나는 그 할머님의 마음을 생각해서 기필코 그 뜨거운 모리화차를 ‘즐겁게’ 다 마셔야 하리라.

결국, 나는 그 사발에 든 모리화차를 반밖에 마시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떴다. 다 마시고 싶었지만 솔직이 양도 너무 많고 날도 너무 더웠다. 일어서는 나에게 할머니는 베이징에서는 만리장성이나 고궁같은 데를 가야 한다며, 이런 후통에는 볼 게 없다고 주의(?)를 주신다.

할머니가 있던 그 후통을 나오니 더 이상 걸을 기력이 없다. 다리가 뻐근해온다. 맞은편에 있는 버스정류장 광고판에서 내가 좋아하는 홍콩 영화배우 정이졘(鄭伊建)이 모 회사 핸드폰을 들고 나를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다. 시간이 있으면 전화 한통 하라는 그윽한 표정이다. 시간은 많은데 전화할 데가 없다, 임마.

시간은 4시를 향해 가고 있다.
문득, 무더운 여름날 꼭 그 시간쯤 학교 뒷건물 응달진 곳으로 중요한 일이 있다며 나를 ‘꾀어내’ 시원한 맥주 한잔을 하곤 했던 선배가 생각난다. 사실 그 선배보다는 그 때 그 냉장 잘된 맥주가 그리운 것이다. 입에서는 더운 모리화차의 향기가 아직도 남아있는데, 머릿속으로는 시원하게 거품이 올라오는 맥주를 떠올리고 있다. 집에 가서 꼭 차가운 맥주 한잔을 마시리라 다짐한다.

베이징 후통으로의 여행은 가을이나 겨울이 더 좋을 듯하다. 여름에는 온 후통마다 웃통을 ‘훌렁훌렁’ 벗은 아저씨들을 보기 십상이기 때문에, 여름이 막 떨어지려고 하는 초가을이나 눈내리는 겨울날 가는 것이 훨씬 더 정취가 있을 것이다. 혹시 중추절이나 설날 등 중요한 명절에 이 후통을 여행하게 된다면 위에삥이나 찌아오쯔 등 그네들의 전통음식들도 얻어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중국사람들도 음식인심은 아직 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될 수있으면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대충 보는 것보다는 무작정 걷는 것이 가장 좋다. 걸으면서 쉬엄쉬엄 베이징 전통거리 풍경도 감상하고 또 가능하다면 후통에 사는 토박이 베이징 사람들과 두런두런 얘기라도 할 수 있다면 만리장성이나 고궁을 가는 것보다는 훨씬 더 알싼 베이징 여행을 할 수 있으리라.

이른 여름, 한가한 토요일을 온종일 소비하면서 다닌 베이징 후통에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사람사는’ 평범한 모습이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또 오랜 세월 그 후통가 사람들의 온갖 풍상을 보아왔을, 쓰허위안 앞의 무성한 홰나무들처럼 말없이 베이징의 변화를 증언하고 있는 ‘늙고 피로한’ 베이징의 모습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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