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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유월(6.29 삼풍참사)이 오면, 삼풍유가족의 마음에 피는 꽃이 있다. 빨간꽃(119구조대), 녹색꽃(수방사 및 경찰), 하얀꽃(의료진) 등 이다. 비록 자신들의 자식들은 잃었지만 "그들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며, 매해 그들의 다복을 빌고 있는 것이다.

지난 96년 삼풍참사 1주기추모위원회(위원장 심영규)에서 당시 현장에서 수고한 이들에게 149개의 감사패를 전달한 것도 잊을 수 없는 고마움의 징표였다.

그러나, 빛깔도 이름도 없는 초라한 꽃이었지만, 향수보다 진한 냄새를 풍겼던 꽃도 있었다. '삼풍민간인명구조대가 그들이다.

목숨 걸고 미친 듯이 생존자를 찾아다녔던 이들.... 그러나, 공인된 구조대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은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대책반에서조차 이들을 달갑게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참사 6주기를 즈음해서 그들의 소중한 인간사랑을 조명해 보기 위해서 6년 동안 취재파일로만 묻혀 있었던 민간자원구조대의 생생한 자료(생명포기각서)를 오마이뉴스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한다.

이들 대부분은 처음에는 큰 사고가 났다고 해서 구경 나왔다가 막상 참상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현장에 뛰어 들었던게 그들의 공통된 점이였다.

이들의 무용담은 당시 구조에 참여했던 119구조대원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들은 때로는 생존자를 찾아냈고, 더러는 갈기갈기 찢긴 주검을 추스리며 울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대책반과의 싸움으로 시작해서 싸움으로 끝났다.

"안전 때문에 민간구조대의 출입을 허용할 수 없다"는 대책반과 "목숨을 잃어도 좋다. 저 현장을 목격하고 어떻게 가만히 있느냐"며 울부짖던 그들의 대립은 수시로 반복되었다.

보다못한 한 일간지 기자가 "왜 이들을 무시하냐"며 고성으로 항변 하기까지 했을까. 결국 이들은 하나 둘씩 현장을 떠나고 말았다. "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포기각서까지 쓰고, 생면부지의 주검을 추스렸던 이들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95년 7월12일. 홍일점인 자원봉사자 강수연 씨가 기자에게 한 통의 편지를 건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아래 편지는 당일 통신에 올려져 많은 네티즌의 심금을 울렸다.


무어라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이글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민간 자원봉사 구조대원 여러분.
여러분을 뵌지도 어느덧 13일째가 되어갑니다.

그동안 함께 먹고 마시며 때론 동생이 되어 또 때론 누나가 되어 여러날을 지냈습니다. 우리중에 동생을 찾으러 온 분 그리고 누나나 매형을 찾으러온 분도 계셨습니다.

하나씩 둘씩 모아진 명분은 있었으나 뚜렸한 통제나 지휘없이 두서없이 활동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행동을 보여야 할 곳, 보이지 말아야할 곳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으며 말을 해야할 곳, 하지 말아야 할 곳도 가리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제 나름대로 이성을 잃지 않으며 여러분을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감성이 제 이성을 지배해버려 저는 서야할 곳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어 돌을 나르고 무슨 뚝심이 있어 시체를 져 나르겠습니까만은 제 나름대로 작은 힘이나마 여러분을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서서히 떠나야 할때가 온 것 같습니다.
저희가 시시때때로 부딪혀 왔던 크고 작은 벽들 그리고 무관심, 방관, 이기주의들... 이 모든 것이 곳을 떠나며 우리만이라도 버리고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뜻에서 모였기에 구타를 당하고 심지어 도둑으로 몰려도 우린 참고 인내했습니다. 행여나 시신을 상할세라 이쪽을 파보고 저쪽을 파보고 눈으로 들어가는 땀을 느끼지도 못한채 모든일에 매달렸습니다.

"대접도 못받는 곳에 뭐하러 가느냐?"는 식구들의 말도 뒤로하고 우린 몇 번이고 뭉쳤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의욕만 앞설뿐 많은 현실이 우리를 뒷받침해 주질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건물에 들어갈때마다 허락을 받으라고 하는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없었더라면 기계작업으로 구조작업이 더 빨랐을 거라는 가족의 원망 아닌 원망도 듣고 있습니다. 이런말을 듣는다고 눈하나 깜짝할 우리다 아니라는 것 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우리들의 조언과 노력으로 두명의 생명이 새로 태어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여러분 누가 구해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여러분 모두는 누군가가 생존해서 구출되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발굴되는 모든 생존자와 시신은 우리의 노력이 1%라도 들어가 있는 분들입니다. 어느팀이 구했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 이쯤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 어떨까요. 저는 가지만 남아 계신 여러분들 중에서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도 계실겁니다. 더 이상 우리가 이곳에 남아서 여러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순수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많은 오해와 억측을 받아왔습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우리의 잘못을 먼저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제게 욕을 하셔도 좋고 원망을 하셔도 좋습니다. 우리들 중 아무도 이곳에서 발길이 떨어진는 사람이 없을 줄 압니다. 우리가 이곳에 왔었던 것처럼 용기를 내어 이곳을 떠납시다. 더 이상 이곳을 지키며 우리 스스로 우리를 욕되게 만들지 맙시다.

우리모두 이곳에 와서 생존자와 시신을 구해낸 것 보다 아직 때묻지 않고 죽지않은 아름다운 우리의 영혼을 많이 보고 마음 흡족해 할걸로 만족합시다. 그것으로만 만족합시다.

다만 우리세대에서 또다른 삼풍을 만들지 않도록 서로 관심을 갖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열심히 생활해서 다음 세대에서 만큼은 이런 분노와 모멸감을 조금만 (아주 없으면 더 좋겠지만) 느끼도록 해줍시다.

떠나야 할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우리 용기와 결단을 내립시다. 그리고 잊고 삽시다.
꼭 잊지 말아야할 것은 기억하며 말입니다.

가족보다 더 끈끈하게 멪어진 우리 서로에게 상처주며 떠나지 맙시다.
그리고 또다시 이런일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분들...사랑합니다.

1995년 7월 12일
삼풍 민간구조대 유일한 홍일점 강수연

덧붙이는 글 | 10인의 민간구조대원 중, 이병철 씨는 지난 98년 봄 본업인 건축업에 종사하다가 안전사고로 운명했습니다. 30대 초반에 짧은 인생을 마친 고 이병철 씨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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