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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댐은 북한의 금강산 댐 건설에 따른 국가안보상의 위해를 예방하기 위한 시설이었으며 당시로서는 대응 댐 건설이 정부가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대응방안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84년 9월께 북한에서 북한강 상류에 80만㎾ 규모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한다는 사실이 노동신문, 평양방송 등을 통해 수차 보도된 바 있어 저들이 공표한 발전용량을 근거로 저수량을 역산해 본 기술진의 검토결과 최대 저수량 2백억t에 달하는 초대형 댐을 건설하고 있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이러한 대규모 댐 건설은 하류에 있는 우리측의 수자원 및 발전량 감소를 초래함은 물론 인위적으로 파괴하거나 또는 자연붕괴될 경우에 10여시간 후에는 수도권 일대가 대부분 수몰되는 등 우리 국민의 생존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으며 특히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악랄한 반대와 방해공작을 펴오던 북한으로서는 무슨 일을 저지를 지도 모르는 위험하고 급박한 상황이었음은 국민 여러분도 상기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86년 10월께 수차례에 걸쳐 북한측에 국제관례를 무시한 금강산 댐 건설을 중지하도록 촉구하였으나 북한측이 이를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하여 86년 11월께 국가보위를 위한 자위 조치로서 수공을 방지할 수 있는 대응 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국민들의 성금으로 건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평화의 댐은 당시 정부의 정보 판단에 따른 최선의 대응방안이었으며 정권유지 차원에서 금강산 댐의 위험성을 과장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음을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이 기회에 분명히 말씀드린다면 우방이 제공해준 항공사진 등 여러가지 정보 자료에 비추어 이 댐은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하여 축조 중이었음이 확실하며 그 뒤 북한이 댐 공사를 중단한 것은 우리가 평화의 댐을 축조함으로써 저들의 의도가 사전 봉쇄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1989년 말 국회에 출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금강산댐 계획의 경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이후에도 전 전대통령은 대국민성명, 감사원 특별 감사 등을 통해, 같은 주장을 되풀이한다.
혼미한 정국 속에 정권안보 댐 필요해
단일사건으로 최대의 대학생구속자를 발생시킨 건국대 항쟁 등으로 민심이 어수선하던 1986년! 이규호 건설부장관은 북한이 서울을 삽시간에 쓸어버릴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금강산댐을 건설한다는 내용의 대 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전국은 즉시 반북, 반공의 열기로 휩싸였고, 온 국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호응 속에 평화의 댐 성금 모금 행사가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코흘리개 유치원생부터 칠십 노인까지, 국민들은 앞다투어 성금을 냈고 이러한 열기는 다음해인 87년 6월 항쟁 직전까지 계속된다.
그로부터 14년 후인 2000년. 그토록 우려했던 금강산댐이 완공되었으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서울도 물에 잠기지 않았다. 우리의 평화의 댐은 산천 수려한 강원도 비수구미골 한가운데 폐사처럼 생뚱맞게 서있다.
1993년 문민정부 탄생 후 금강산댐 사건은 감사원의 특별감사와 국정조사를 통해 5공 말기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정권의 위기돌파용으로 치밀하게 준비된 조작사건으로 결론지어졌는데...
이번 주 금요일 밤 9시 55분 방송되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는 86년 금강산댐 수공 위협설을 공식 제기했던 이기백 당시 국방부장관, 안기부 산하 <금강산댐 대책본부>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이학봉 당시 안기부 2차장, <대책본부>에 참여하여 금강산댐 수공 위협설의 근간을 마련했던 학계 전문가, 관계기관 공무원 등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86년 후반 전국을 공안 상태로 몰아 넣었던 이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알아보고, 금강산댐 착공 당시 댐 건설 전문가로서 금강산댐 건설과정을 지켜보았던 탈북 과학자를 통해 금강산댐의 실체를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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