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일 오전 11시 대구지법 김천지원 앞, 해가 머리꼭대기를 지나고 있는 시간인지라 머리카락 사이로 쉴새없이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김의식이를 데리고 나오든가, 우리를 지나가게 해주든가. 집회도 아닌데 왜 길을 막아." 경찰 60여 명이 박일영(56) 씨의 앞길을 막고 벌써 10여분이나 넘게 대치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84년 10월 청송감호소에서 교도관들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한 고 박영두의 맏형이며, 김의식은 박영두를 죽음에 이르도록 폭행한 교도관 중에 한 사람이다.
"아니, 이게 말이나 되냐고. 국민을 보호해야 할 공무원이 사람을 때려죽인 것도 말이 안 되는데. 그 놈이 아직까지 공무원 짓을 하고 있으니…. 니들은 지금 살인자를 보호하는 거야!" 박 씨 얼굴은 숨이 턱턱 막혀오는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차오르는 분노 때문인지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박 씨는 이날 민주화정신계승국민연대 활동가들과 울산·광주·대구 지역 열사정신계승사업단 활동가들과 함께 김천지원을 방문했다. 동생을 죽이고도 버젓이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김의식을 만나보겠다'는 생각 하나로 경남 통영에서 달려왔다.
그러나 김천지원을 방문한 30여명은 법원입구조차 가보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기동대 2개중대가 법원 앞 도로 4개 차선을 완전히 봉쇄하고, 1∼2명씩 법원으로 들어가려는 것조차 막고 있기 때문이다.
"저희는 법원이 요청해서 나온 것뿐입니다. 저희는 아무 것도 몰라요." 기동대 지휘관이 사무적으로 반복하는 대꾸에 사람들은 짜증만 더해갔다. "아니 모르긴 뭘 모른단 말이오. 텔레비전도 못봤소? 김의식이가 나와서 '내가 피해자'라고 말하는 거 못 봤소?" 정말 속 터질 노릇이었다.
휴가 간 가해자, 김의식·김명겸
20분이 넘는 실랑이 끝에 박 씨와 가족 한 명이 법원에 겨우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이 법원에 들어가 알아낸 사실이라곤 김의식이 20일부터 21일까지 '휴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는 사실뿐. 사람들은 화가 치밀다 못해 허탈하기까지 했다. "경찰 아저씨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오. 내 김의식이를 만날 때까지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계속 올테니 그리 아시오."
박일영 씨의 말투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김천은 다음에 다시 오기로 하고 청송으로 갑시다." 계승연대 이은경 사무처장이 입을 뗐다. 청송 제2교도소는 고 박영두를 폭행한 또 하나의 가해자 김명겸이 근무하고 있는 곳이다.
지난 6월 고 박영두가 '교도관에게 타살됐다'는 의문사진상규명위 발표 후 계승연대는 7월에 들어 법무부와 대구지법에 질의서를 보냈다. 박영두를 살해한 가해자들이 아직도 교도소와 법원에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무부로부터 돌아온 답신은 더 더욱 놀라웠다. "청송교도소에서 사망한 박영두가 교도관들의 집단 폭행에 의해 사망한 '의혹'이 있다고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법무부 답변서 첫 머리다. 의문사진상규명위에서 '타살'이라고 발표한 사실을 법무부는 '의혹'이라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오후 5시가 다 돼 청송 제2교도소. 쇠철문은 굳게 닫혀 있고 경교 20여명과 교도관 40여명은 문 뒤에 빼곡이 모여 또 하나의 장막을 치고 있었다.
차라리 김천에서는 핑계라도 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청송에서는 모든 것이 '벽' 그 자체였다. "얘기 좀 해봅시다", "김명겸이는 어디 갔오?" 쏟아지는 질문, 어느 하나에도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뒤쪽에 서 있는 교도관들은 '불청객'들이 신기했는지 자신들의 앞에 펼쳐진 광경을 구경하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답답함과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급기야 철문을 흔들다가 끝내는 넘어가기도 했다. 이때서야 교도관들이 유가족 대표와 대화를 시작했다. 돌아온 대답은 '김명겸이 휴가 갔다'는 것. 그리고 자신들은 "박영두 사건과 관계 없는 사람들이므로 당신들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이들은 살인자와 함께 근무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에요." 청송교도소 직원사택을 돌며 김명겸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계승연대 이은경 사무처장은 말했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는 일이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 될 수는 없죠."
박영두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7월 20일, 고 박영두를 죽인 김의식과 김명겸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날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청송교도소와 대구지방법원이 "옛날 일이다, 당사자가 없다"며 애써 외면하려는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 영두가 땅 속에서 지켜보고 있어요. 17년이나 참으며 진실을 밝혀낸 일입니다. 영두 영전 앞에 그 사람들의 사과는 꼭 받아낼 겁니다"고 박영두의 맏형 박일영 씨의 다짐이다.
덧붙이는 글 | ▶ 고 박영두 의문사 사건의 진실(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정리)
·1980. 8. 1 전과 3범이란 이유로 박영두씨 삼청교육대에 입소. 보호감호 2년 선고.
·1981. 12. 28 삼청교육대내 폭행 근절 요구하다 소란죄로 육군본부고등군법회 회부. 징역 10년 선고.
·1983. 3. 22 청송 제1보호감호소로 이감
·1983. 11 '교도소내 폭력근절', '보호감호 철폐'를 요구하며 소내 단식농성. 특별사동으로 전방조치
·1984. 10. 11 청송교도소의 열악한 인권실태 등을 외부에 알릴 난동 사건을 벌이려다 미수에 그침.
·1984. 10. 12 청송교도소 상황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의무과 연출을 요구했으나 이잠술, 박수호, 김의식, 김명겸 등 7-8명의 교도관들로부터 소위 비녀꽂기, 통닭구이 상태로 집단 폭행을 당함
·1984. 10. 13 위 상태로 특별사동에 방치된 채 사망
·1984. 10. 14 김철규 부검의사 심장마비로 사인발표. 최북성 지휘검사 사건 은폐. 뒷산에 가매장
·1985. 9. 25 박영두사건 폭행교도관 고발 등을 요구하며 재소자 소요발생
·1988. 7. 8 동료재소자, 박영두 사건 관련 교도관들을 고소, 고발. 의성지청 무혐의 처분. 재정신청 역시 무혐의 처분조치.
·2001. 1. 13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직권조사 결정
·2001. 6. 25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박영두씨가 교도소내의 부당한 인권탄압에 항의하다 교도관들의 폭행으로 숨졌다고 진실을 공표하고, 박영두 및 유가족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금 등 심의 요청. 그러나 공소시효가 지나 고발 고소하지 않기로 결정.
지난 7월 14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방영된 박영두 사건에 대한 방송 중 직접 구타에 가담한 사람과 은폐에 참가한 사람들의 말
■ 직접 구타자들의 말
·김의식 교도(현 대구지방 김천지원 접수계장) : "몸싸움이 있었는데 폭행으로 볼 것인지 정당한 업무집행으로 볼 것인지…. 그것 때문에 사망했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내가 피해자다"
·김명겸 교도(현 청송제2교도소 배치부장) : "나는 현장에도 없었다"
·박수호 당시 관구부장(86년 사망)
·이잠술 관구주임(현 과테말라 거주)
■ 은폐자들의 말
·김명식 교도소장(현 퇴직) : "내가 말할 필요가 없어. 더 이상 어떻게 솔직해."
·서장권 보안과장(현 퇴직) : "15년전에 누가 죽은 일을 어떻게 기억하냐? 박영두? 나는 모른다"
·이상렬 보안주임(현 대구교도소 보안과장) : "사실을 은폐한 적 없다"
·김철규 부검의사(현 개업의) : "외상은 없었다. 법으로 해라"
·최북성 지휘검사(현 변호사) :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하냐. 기억에 없다"
진실을 외면하는 가해자와 공권력을 역사와 국민은 용서하지 않는다!
독재정권 시절에 권위주의적 통치하에 많은 사람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사고사나 자살로 위장되었고, 이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작년 10월에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했습니다. 그리고 80여건의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히기 위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6월 25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그동안 조사해왔던 사건 중 1984년 10월 12일, 청송제1보호감호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박영두 사건에 대해 교도관에 의해 고문,폭행을 당해 살해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번 박영두 사건에 대한 조사를 보면서 우리는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들의 태도를 보고 분노합니다.
현재 청송제2교도소에서 재직 중인 가해자 김명겸은 거짓 진술로 일관했고, 현재 김천지방법원 접수계장으로 재직 중인 가해자 김의식은 진술을 거부했습니다. 이들이 자신이 자행한 반인류적 범죄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것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들을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현재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는 지난 권위주의 정권에서 자행된 수많은 죽음들이 이대로 덮여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다시는 우리 사회에 '의문사'라는 억울한 죽음을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역사와 국민이 이름으로 이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법무부와 대구지방법원, 청송제2교도소 등에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들에 대한 파면을 요구합니다.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 반인륜적이고 패륜적인 범죄를 자행한 사람이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다는 것은 인권국가라고 하는 이 나라의 수치이며, 온 국민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하지만 이들 기관은 법적 판단이 끝난 사건이기에 이들에 대한 문책을 고려한 바가 없으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요청이 있을 경우 이를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잘못이 있었다면 이를 반성하고, 박영두 사건의 해결에 적극 나서서 이번 기회를 통해 달라진 모습들을 보여주어야 할 '국민의 정부'의 기관들이 여전히 잘못을 덮어두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절절한 마음으로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 김명겸과 김의식에게 호소합니다.
우리는 과거 권위주의적 정권 하에서 수많은 공무원들이 자신의 개인적 의지와는 무관하게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행위에 연관될 수밖에 없었음을 가슴아프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과거의 자신의 행위로 인한 양심의 가책으로 수많은 세월동안 고통받아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비록 업무상의 과실이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한 것이든 자신이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 행위에 가담한 아픈 과거를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여야 합니다. 오직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방법도 없습니다.
김천지방법원과 청송제2교도소에 요구합니다.
아직도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출두까지 거부하는 김의식과 김명겸은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김천지원 민원접수계장과 청송제2교도소 배치부장으로 재직중입니다.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할 그들은 자신들의 범죄가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반성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김천지방법원과 청송교도소가 이들 공무원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며 그동안 발행한 많은 재소자들의 죽음의 진상을 밝혀야 합니다. 또한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방지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시민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사람을 죽여놓고 그 사인을 조작한 채 버젓이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김의식, 김명겸에게 나라 일을 맡기시겠습니까? 게다가 그들은 진실을 밝히는 데 협조하기는 커녕, 자신의 죄를 덮기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시민여러분, 이들이 역사와 국민 앞에 나서서 사죄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십시오.
우리의 요구
1. 가해자 김의식, 김명겸은 진실을 밝히고, 역사와 유족 앞에 사죄하라
2. 김천지원과 청송교도소는 김의식과 김명겸을 파면하라.
3. 반인륜적 범죄 의문사 가해자에 대한 공소시효를 중지하라!
4.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반민주적 제도와 기구를 청산하라!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