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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총련 4기 의장 정명기 씨가 출감을 며칠 앞두고 편지를 한 통 보내왔다. 지난 7월 27일 심재춘 씨 이름으로 오마이뉴스에 올린 '출감 앞둔 한총련 4기 의장 정명기'라는 글에 대한 일종의 답 글 형식이다. 정 씨는 오는 8월 3일 출감한다.

이 글은 한총련 의장 출신으로서 처음으로 일반 언론에 쓴 에세이라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으나, 부득이 본인의 이름으로 올리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이 글에서 언급하는 '형'은 현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년6월형을 살고 있는 심재춘 씨를 말한다. 정 씨는 '김경환 심재춘 석방을 위한 모임'에 작은 힘이나마 보탬을 주고자 이 글을 작성했다. 다음은 정 씨가 보낸 글의 전문이다.


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 대학 강사, 민혁당 사건…. 내가 처음 형을 봤을 때, 이런 일련의 약력으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선입견 없이 사람을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범인(凡人)에게는 명함이 주는 위력이 만만치 않은 법이다. 게다가 운동으로 다져진 건장한 체구는 문무를 겸비한 지사형 선비를 연상시켰다.

지난 겨울 어느 날이었다. 이런 형을 만나 우리가 처음 공모했던 일은 사과쨈을 만드는 거였다. 어렵사리 취장에서 설탕과 소금을 구하고 거금을 들여 사과 3봉지를 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며 조리사가 되고 싶어했던 형이 모든 과정을 주도했다.

드디어 사과가 익어 흐물흐물해지자 소금과 설탕을 열어본 형이 결정이 작고 예쁜 것을 골랐다. 형은 능숙한 조리사처럼 족히 1리터는 됨직한 통의 절반 분량을 가볍게 사과 속에 부었다. 몇 번 휘젓고는 형이 맛을 보았고 우리는 참새 새끼들처럼 "형, 맛있어?"를 연발해댔지만 형은 마치 우리를 놀리듯 심각한 어조로 "가만 있어봐"라고만 하는 거다. 그리고는 또 한 번 떠 먹었고...

먹는 것 앞에서는 양보를 모르는 성질 급한 내가 한 숟갈 가득 입에 넣고 나자 그제서야 태연하게 웃으며 형이 말한다.
"맛이 왜 이러냐?"
"이거 소금이잖아!"
얼굴이 벌개진 나를 보고 형이 던진 엽기 한마디.
"이 설탕 한 통을 다 넣으면 다시 달지 않겠냐?"
그리고는 정말 설탕통을 드는 것이다. 이를 간신히 말리고 끝내 미련을 못 버린 형의 첫 작품을 나는 야멸차게 내버렸다.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이런 형이 양심수들뿐만 아니라 사동의 수인들에게도 심지어는 교도관들에게까지 자문위원역할을 한다. '나를 만나는 사람은 모두 기쁨이 샘솟도록 하라(見我衆生 歡喜發心)'는 말을 실천하려는 사람이다.

게다가 모기장을 네트로 만들어 놓은 징역테니스에도 능하다. 능할 뿐만 아니라 사실 얄밉다. 그리하여 우리가 붙여 놓은 형의 별명은 '노숙한 악동'이다. 형용모순인 이 말 외에 골목길 개구쟁이의 능청과 학자적 성찰과 능숙함을 표현할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감옥은 아주 드물게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과 정말 법이 없어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다. 따라서 순박한 수인들은 옥담 안에서 또 하나의 벽을 쌓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쌓아 놓은 벽이 사방(舍房)의 시찰구 마냥 수인의 시각을 묶고 외부의 감시와 영향은 차단하지 못해 결국 자신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 때 수인은 절망에 빠진다.

형은 솔직하다. "징역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나가도 옥살이의 반은 성공한 것이다"고 한다. 징역을 살고 나간 사람들 중에는 강철처럼 단련되어 나가는 사람이 있고, 겨릅대처럼 썩어 나가지도 않겠지만 강철처럼 단련되어 나가지도 않을 줄 안다. 형은 솔직하고 소탈하며 여유로운 인간을 꿈꾼다.

나는 형이 미치지 않고 살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가 꿈꾸는 이상과 희망이 형을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겨울에 독야청청한 소나무가 행복해 보이지 않듯이 고난은 사람을 풍부하고 여유롭게 만들진 않는다. 십오 척 담장을 뛰어 넘는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형은 늘 옥담 밖을 생각하고 잠을 설쳐가며 뒤척인다. 하루는 형이 구속되고 난 이후 부쩍 야윈 형수 생각이 났던지 "나, 어제 많이 반성 했다. 이제 먹는 걸 줄여야겠다" 이러는 거다. 앞서도 밝혔지만 나는 먹는 것을 두고 타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체 위대(胃大)한 사람이라 형의 기분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형의 몫까지 열심히 챙겼다.

결국 침만 삼키던 형이 아주 조금 손을 댔다. 나는 내 몫을 빼앗긴 것 마냥 험상궂게 눈을 부라리며,
"왜 먹어!"
멋쩍은 형, 씩 웃으며,
"괜찮아, 저녁에 들어가서 또 반성하지 뭐."
능청스러운 형은 반성할 게 참 많다. 단 하루도 성찰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이런 성찰의 긴장 속에서 형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글귀가 있다.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고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며 태산같은 자부심을 지니되 누운 풀처럼 자신을 낮추어라.'

형은 옥담 밖과 연대하기 위해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으며 끊임없이 손짓하고 있다. 분단의 극복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부여안고 많은 세월을 뒤척였을 그를 위해, 사회적 격리와 단절의 극복을 위해 이제 옥담 밖 우리가 함께 뒤척여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김경환 심재춘 석방을 위한 모임> 

김경환 심재춘 씨 사면을 위해 사랑과 관심을 주십시오. 마음을 보태주실 분은 인권실천시민연대 홈페이지(www.hrights.or.kr)에 마련된 서명란에 서명을 해 주십시오. 

김경환 심재춘 씨 석방을 위한 서명용지를 보냈더니 어떤 분이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핏볼테리아라는 아메리카대륙 태생의 개를 좋아하는데, 이 개는 싸움에서 지는 경우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으며, 최소한 비긴다고 하더라."

이번 일에서 비기는 일은 사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경희 이문희 두 사람의 가정을 평상시처럼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 일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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