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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정희를 변덕이 심한 사람,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는 사람, 그리고 몹시 폭압적인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5. 16쿠데타를 일으키며 내걸었던 '혁명공약'의 마지막 항인 '민정 이양' 약속을 스스로 어기고 (군정 연장, 군대 복귀, 대선 출마를 놓고 여러 번 결심을 번복한 끝에) 마침내 정치인으로 나선 것도 좋지 않게 보고 있었지요.

그가 정치인으로 나서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3대 의혹 사건'이며 여러 가지 부정한 일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기분 나쁜 일은 일본에 대한 '굴욕외교'였지요. 일본에 대한 굴욕 외교(구체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청구권 문제 등) 때문에 빚어졌던 1964년의 '6.3사태'를 강제 진압할 때 박정희가 보여줬던 무서운 폭력성도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1967년의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가 한 말 한가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4년 가지고는 부족하다. 대통령으로서 벌여놓은 많은 일들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4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국가 발전의 초석을 닦는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호소를 했던 거지요.

윤보선 후보 쪽에서 박정희 후보가 재선을 하게 되면 틀림없이 '삼선 개헌'을 시도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박정희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누차 강조를 한 것은 물론이고….

그러나 박정희는 재선에 성공하고, 같은 해 6월 8일에 실시되었던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2/3의 의석이 넘는 압승을 거두게 되자, 장기 집권욕에 눈이 어두웠던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장기 집권을 위한 삼선(三選)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1969년 국민투표 형식을 빌어 단행한 다음 1971년 드디어 삼선 대통령의 길에 나선 거지요.

(삼선을 허용하는 헌법개정안을 1969년 8월 9일 공고하고, 9월 14일에 국회의 동의를 얻고는 10월 17일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했음. 그러므로 나의 지난번 글 「1969년 삼선개헌 국민투표에 대한 기억 ―고독한 반표(反票」①과 ②에 기술된 '11월 초순'과 '11월 만추'라는 표현은 오기임을 밝힙니다. 그날 투표하러 갈 때의 '낙엽'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런 오기가 빚어진 것 같습니다.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1967년의 대선에서 '삼선 개헌'을 극력 부인했던 박정희의 거짓말도 문제지만, 자신의 장기 집권욕 때문에 헌법을 멋대로 고치고 하는 것은 참으로 큰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번 정해진 것은 그대로 지키는 것이 더 옳은 일이라는 생각이었지요. 이미 정해진 법을 한 번도 지켜보지 않고, 그렇게 권력자가 자기 욕심 대로 고치고 하다보면 그것이 자칫 버릇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런 면에서는 나는 보수주의자입니다. '한번 정해진 합리적인 법은 그대로 지켜나가야 한다. 집권자 쪽에서 바꾸려드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것이 내 신념이니까요.

독재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악법까지 고수하려 드는 수구 세력 ―보수의 본질적 가치도 모르는 가짜 보수주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른 거지요.

그런데 박정희 씨는 아주 일찍부터 영구 집권의 길 ―'유신헌법'을 생각하고 그것의 전초전으로 삼선개헌을 계획했는지도 모릅니다. 유신체제가 사실은 너무도 엄청난 것이어서, 국민들로 하여금 미리 고치고 바꾸는 것에 대한 일종의 관성을 갖게 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유신으로 가기 위한 확실한 징검다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삼선개헌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는 얘기죠.

그러나 이것은 증거를 찾을 수 없는 내 추정에 의한 변설이므로 긴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씨는 삼선개헌을 아주 일찌감치, 어쩌면 재선을 노린 1967년의 선거 무렵에 이미 생각했었는지도 모릅니다. 15만 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신승을 했던 1963년의 대선 때와는 달리 무려 110만 표 차이로 낙승을 한 1967년의 대선 직후에 실시되었던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 ―이른바 '6. 8선거'에 총력을 기울였던 사정이 나로 하여금 그런 심증을 갖게 합니다.

'6. 8선거'라는 명칭으로 내 기억 속에 입력되어 있는 1967년의 국회의원 총선거는 우리 나라의 선거 역사상 가장 추악한 선거였습니다. 막걸리와 고무신과 돈봉투가 난무했던 최대의 부정 선거였지요. 관이 나서서 몰래 저질렀던 자유당 시절의 '표 조작 선거'와는 성격이 다른 무제한적으로 돈을 살포하는 선거였다는 얘기지요.

나는 그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직 선거권도 가지지 못한 어린 청소년이었지만, 너무도 많은 실상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했지요. 비록 어린 청소년이었지만 내 눈에 비친 부정선거의 실상이 너무도 참담해서, 나는 그 실상의 단면과 뼈아픈 마음을 시(詩로) 적기도 했지요.

나는 그때의 시를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내 개인 홈피 <글나라>의 '시의 나라'에 올려놓고 있기도 하답니다.

사상 최대의 부정선거 덕택으로 제7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박정희는 비록 한동안 전국적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꼬리를 이었지만(고등학생들까지 참가할 정도로 그 시위는 대단한 강세를 보였지만), 그 와중에서도 국회에서의 압도적인 우세를 발판삼아 삼선개헌을 단행할 계획을 확실하게 세웠는지도 모릅니다. 총선 압승을 위해 민주공화당 정권이 벌인 그 가공할 물량적 부정 선거를 생각하면 그런 유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박정희는 국민투표 형식으로 삼선개헌을 확정한 다음 치러지는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 때는 또 이런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국가 발전을 위한 원대한 사업들을 차질 없이 잘 추진하기 위해서는 8년 가지고도 부족하다.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4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이번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 국민 여러분이 나를 믿고 이번 한 번만 더 밀어준다면 국가 발전을 위한 원대한 사업들을 잘 마무리하고, 영원히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을 자신이 있다. 그것이 내 마지막 꿈이다."

그는 이번 삼선이 '절대적으로' 마지막이라는 말을 선거 유세장에서, 기자들 앞에서 누누이 강조하곤 했지요.

박정희의 그런 말은 이미 간단한 상대가 아닌 김대중 신민당 후보가 유도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후보는 이미 69년의 삼선개헌 국민투표 때부터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지요. "만약에 국민 여러분이 삼선 개헌을 허락해 주면 박정희 대통령은 삼선개헌으로 그치지 않고, 다음에는 장기 집권이 아닌 영구 집권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의 그런 말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발을 사는 것 같았습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설마 그럴 리가…'라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는 것 같았지요. 어느 시대고 간에 '예언자'는 고독한 법이라고 했던가….

김대중 씨의 그런 '예언' 때문에 민주공화당 사람들은 더욱 길길이 날뛰는 본새였지요. 김대중 씨가 너무 심한 거짓말을 한다며…. 김대중의 그 말이 그 시점에서는 '결과론'적인 것이 아님에도….

그런데 김대중 씨는 1971년의 대선에 와서는 그 예언을 확대재생산하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민 여러분이 만약에 이번에도 박정희 씨를 당선시켜 준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번에도 박정희 씨와 민주공화당 사람들은 김대중 씨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였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면서….

말도 안되는 소리를 일삼는 김대중의 입을 꿰매야 한다는 말은 그때도 나왔지요, 아마…. 소설가 출신 국회의원 김홍신처럼 김대중 대통령의 입을 공업용 미싱으로 꿰매야 한다고 하는 식의 무지막지한 발언은 아니었지만….

생각하면 참 재미있기도 합니다.
김대중 씨의 그 예언은 그후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김대중 씨의 그 예언을 거짓말이라고 했던 사람들의 말이 결국 거짓말이 되고 만 거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씨의 무수한 거짓말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무수한 거짓말들을 들어 알게 되어도 별로 문제 삼지 않습니다.

반면에 결국은 거짓말을 한 사람들에 의해 거짓말쟁이로 매도되기 시작했던 김대중 씨는 그가 지금까지 해 온 정치적인 거짓말보다 몇 배로 뻥 튀겨진 이상한 상황에 의해 완전히 거짓말쟁이로 굳어져서 급기야는 김홍신으로부터 그런 극악한 말까지 듣게 되고 말았으니….

김대중 씨의 그같은 경우는 내게 더욱 크고 오묘한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김대중 씨의 그런 경우는, 현대에 와서 정치인들에 의해 지역감정이 최초로 유발되었고, 오랜 세월 지역감정의 덕을 가장 많이 누렸으며, 그 망국적인 지역감정이 계속 유지된다면 역시 가장 큰 덕을 보게 될―현실적으로 가장 큰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경상도 쪽보다 호남 쪽의 상대적 지역감정이 더 많이 부정적으로 지목되어 온 사실―더 나아가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이상한 편견까지 생겨나게 된 것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그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어떤 이들은 지역감정 문제를 논함에 있어 그림을 너무 크게 그립니다. 이를 테면 전삼국과 후삼국의 그림이죠. 거기다가 고려 시대부터 있었다는 전라도 지방에 대한 차별 이야기가 보태지고, 조선 시대에는 대표적인 유배지였다는 설이며, 동학 농민전쟁 등 민중 봉기 등이 추가되기도 하지요. 그리고 지리적인 그림, 이를 테면 소백산맥이 그려지기도 하지요.

나는 역사적 사실과 그것으로부터의 연유성 따위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인정합니다. 또 지리적 문화적 여건 따위에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에 오늘의 지역감정 문제의 근원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지역감정을 논함에 있어서 그림을 너무 크게 그리고 그것을 전적으로 문제 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현대의 정치사와 밀접히 연관되는 부분입니다. 오늘의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이용해 온 사실과, 지리적 문화적 여건이 전혀 장벽이 될 수 없는 오늘에도 계속적으로 그것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슬픈 현상을 문제 삼으려는 것뿐입니다.

인간의 '애향심'은 원초적 정서로써 참으로 소중한 가치이며 미덕입니다. 순수한 애향심은 곧바로 양질의 애국심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애국 애족의 바탕이 애향심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애향심은 다른 지역의 애향심을 인정하고, 다른 지역도 함께 사랑할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폐쇄적인 애향심은 진정한 애향심이 아니지요.

애향심이 지나쳐서 지역 차별과 지역 대결을 낳고, 지역 패권주의로까지 연결된다면 그것은 사회 공동선을 파괴하고 애국 애족의 정신까지 훼멸시키는 짓이지요.

내가 이 글에서 문제 삼는 지역감정은 우리의 현대 정치사와 연관되는 부분임을 거듭 밝히며, 지역감정에 대한 좀더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논급은 차후 다른 이름의 글에서 다룰 것임을 미리 말씀드려 둡니다.

나는 지역감정이라는 말만 떠올려도 가슴이 미어지리만큼, 이 시대를 사는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도 '아픈 가슴'을 안고 산다는 말씀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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