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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 위를 마음놓고 걸을 수 있는 3시간

대전 중앙로. 대전역-충남 도청 1km. 왕복 8차선. 대전이 '교통의 도시'라면 대전의 중앙로는 '교통의 거리'다. 일례로 이곳을 지나지 않는 시내버스는 거의 없다.

23일 오후 7시. 이 거리에 네 바퀴 달린 차대신 사람들이 들어섰다. 한밭문화축제의 하나로 열린 '한밭 거리축제'가 시작된 때문이다. 두리번 두리번 차도에 내려서기를 주춤 거린다. 낯설고 신기한 때문이다.

서로가 차도를 걷는 다른 사람들의 무리를 보고 또 보고 확인한다. 그제서야 안심하며 내려서서 걷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8차선 전체가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다. 1년 내내 차가 달리던 그 거리에 두 다리를 내딛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신나는 축제다. 비롯 3시간뿐이지만.

'체육대회 입장식' 같은 '거리행렬'

도로를 걷기 시작하자마자 밀려오는 거리행렬단. 할 수 없이 사람들은 '걷기'를 중단해야 했다. 대전역 쪽에서 대형 트럭과 대형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길놀이 풍물패-월드컵 응원단-월드컵 장식차량이 뒤를 따랐다. 이번엔 동구 행렬단이, 그 뒤엔 유성구-대덕구-중구-서구 순으로 줄줄이다.

행렬단의 차림새가 천편일률이다. 동구행렬단은 풍물패를 앞세웠고 그 뒤를 체육대회 유니폼 같은 단체복을 입은 사람들이 줄맞춰 걷는다. 유성구 행렬단도 풍물패와 판굿패를 앞세우고 그 뒤를 단체복을 입은 사람들이 뒤따른다. 대덕구, 중구, 서구 행렬단도 풍물패-단체복 순이다. 인도쪽으로 밀린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행렬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비껴서서 보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도 혹 그럴듯한 가장 행렬단이 지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거리문화 축제다운 맛이 없네요. 거리에 나온 시민들과 함께 행진할 수 있도록 해주던지요.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인도로 밀어붙이고.. 체육대회 입장식 같은 느낌이 들어요. 왜 행렬식을 하는지를 모르겠어요."

장준희(37. 중구 선화동) 씨의 불만은 모처럼의 차도를 걷는 즐거움을 빼앗아간 가장 행렬식에 모아졌다. 장 씨는 "금쪽 같은 1시간을 볼 것 없는 거리행렬단이 다 잡아 먹었다"고 몇번을 푸념했다.

어김 없이 등장한 기관장'님'들

거리 행렬단이 도착한 곳은 중앙로 한복판인 동양백화점 앞 네거리였다. 이 곳에 대형 연단이 만들어졌고 낯익은 기관장들이 자리를 잡았다.

대전시장, 충남경찰청장, 대전시교육감, 5개 구청 구청장... 갑자기 대형 엠프가 한껏 소리를 토해낸다. '기관장님들'이 등장한 이유는 '화합의 횃불 점화식'과 '월드컵 성공기원 축구공 증정식' 때문이었다. 각 기관장들이 한 명씩 등장해 수 십여개의 축구공을 나누어 주고 불 점화식을 가진 후 축포가 터졌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기관장님들. 꼭 이래야만 하는 걸까? 그 짧은 거리문화 축제에까지 2002년 대전월드컵 성공기원을 위한 의식적인 행사를 해야만 하는 걸까? 왜 월드컵 경기가 한밭문화제 거리축제의 주제가 되야 하는 걸까?

'그 밥에 그 나물'

기관장 행사를 빠져나와 색다른 행사를 찾아나섰다. 1km 구간 전체에 행사장은 모두 5곳. 각 구청에서 만든 행사장을 돌아 보았다.

- 대덕구 마당/ 풍물놀이, 소고춤, 민요
- 유성구 마당/ 풍물놀이, 농악판제, 대전월드컵 성공기원 합창
- 서구 마당/ 스포츠 댄스, 째즈댄스공연, 태권도 시범
- 중구 마당/ 청소년 페스티발, 푸전째즈
- 동구 마당/ 풍물놀이, 마당놀이(극)

잠깐 지켜보는 듯하던 사람들이 이내 어슬렁대기 시작했다. 마당극과 청소년 페스티발, 잠깐 동안 있은 째즈댄스 행사장 외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았다. 엉성한 준비, 뻔한 레퍼토리에 식상한 사람들은 어슬렁대다 곧 인도로, 지하상가로 움직였다.

"2시간을 꼬박 돌아다녔어요. 처음엔 도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는데 걷는 것 외에 볼만한 행사가 없네요. 가는 곳마다 뻔한 행사뿐이네요."
서구 도마동에서 왔다는 한 가족은 다시 지하상가를 찾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거(차 없는 거리) 있는 줄 알았으면 애들 좀 다 불러 모을 걸 그랬어요. 판 좀 벌이게... 평소 연습한 우리 춤 실력 좀 발휘하는 건데 ..."
고딩이라고 자신을 밝힌 한 학생은 못내 아쉬워 한다.

대학 거리축제보다 못한...

오후 8시 30분. 눈에 띄게 사람이 줄기 시작했다. 배회하다 한 곳에 붙어 서기보다는 미련 없이 떠나는 분위기다. 인근 술집으로, 유흥가로, 찻집으로, 집으로...

8차선 도로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채 두 시간도 잡아 두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혹 이런 것 때문은 아니었을까? 유니폼 입고 줄 맞춰 걷는 가장행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기관장 등장 행사, 특색 없는 구별 행사. 빈약한 내용. 어긋난 주제의식...

"우리 학교 축제 때 구경 한번 와봐요. 학교 거리문화제도 이보다는 훨씬 다양해요. 재미도 있고..."
중앙로를 빠져 나가는 모 대학교 학생들의 말이다. 거리 축제를 준비한 대전시 공무원과 행사 관계자들이 '대학가 거리축제'를 벤치마킹 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이들 대학생들만의 생각이었을까.

두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거리축제가 아닌, 행사가 끝난 뒤에도 여운이 남아 심야에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게 하는, 그런 신나는 축제를 만나 보고 싶은 것이 혼자만의 생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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