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를 시작하며 - 나는 현재 기독교방송(CBS) 아침 프로인 <변상욱의 시사터치>(진행 변상욱 제작부장, 연출 정혜윤 PD)에 매주 금요일 고정 출연하고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10시 35분∼11시 30분에 방영되는 이 시사프로에서 내가 담당하고 있는 것은 그 주에 화제가 된 인물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시사인물파일'. 일주일 동안 화제가 됐거나, 주목해야 하거나, 숨어있는 인물의 파일을 만들어서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게' 소개함으로써 그 인물을 통해 세상 보는 안목을 키워가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이번 주부터 방송이 끝나는 대로, 미처 방송에서 다하지 못한 말까지 보강해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올릴 예정이다. 아울러 그날 방송한 내용도 링크해 놓아 직접 들을 수 있게 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시사인물파일'을 통해 소개했던 인물들 ―박원순, 이석연, 홍창수, 김환희(창비무명인), 한화갑, 안택수, 이문열, 조정래, 이승엽도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해 올릴 것을 약속한다.
새로운 형식으로 시도하는 '말과 글로 엮는 사람 이야기'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란다. <변상욱의 시사터치> 생방송은 표준 FM 98.1 MHz / AM 837 KHz에서 들을 수 있다.
| ▲ 권노갑 씨 ⓒ 오마이뉴스 노순택 | 한편 어제(11월 2일) 방송한 인물은 권노갑과 박지원이었다.(존칭 생략) 공식적 직함으로는 '민주당 전 최고위원'과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불리는 두 사람을 이번 주의 시사인물로 선정하는 데는 크게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두 사람이 한주 내내 '뉴스 태풍'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태풍의 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이긴 했지만.
그러나 어제 방송에서 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제한된 시간에 두 사람을 다루다 보니, 준비한 내용을 미쳐 다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통령 김대중과 두 사람의 '특수관계'에 대한 각종 비사를 자세하게 소개한다는 것이 그만 준비해 두었던 두 사람에 대한 비판적 쓴소리는 정작 방송에 내보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방송은 정말 할 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마이뉴스에서는 권노갑 한 사람만 다뤘으며, 방송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부분도 포함시켰다. 박지원 파일은 다음 기회에 정리해 올릴 생각이다. CBS 방송 내용을 링크하기로 약속했는데, 혹시 기술적 문제로 다소 늦어질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의 이해와 아량을 바란다. 다음주부터는 방송이 끝나는 대로 곧바로 글을 올릴 것을 약속드린다. 행복한 주말 보내시길.
11월 1일자 신문에 권노갑, 박지원 두 사람의 실명이 구체적으로 거론되면서 이른바 '쇄신정국'은 점입가경을 이루었고, 민주당 내부 각 세력의 신경전도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한나라당이 아니라 민주당 개혁파에 의해 두 사람의 이름이 아래에 소개된 것처럼 신문 1면 톱기사에 올랐다는 것도 흥미롭다.
<초선 10명, 권노갑·박지원 씨 은퇴 촉구>(한겨레)
<"권노갑·박지원 은퇴" 여 쇄신파>(중앙일보)
11월 2일 아침 신문을 보니, 경향신문과 한겨레가 사설을 통해 즉각적인 인적쇄신을 주장해 쇄신파의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김옥두 의원을 선봉으로 한 동교동계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음은 물론이다. 특히 당직자 전원 사퇴라는 초강수의 결정이 나오면서 공은 김대중 대통령에게로 넘어간 상태이다.
왜 지금 권노갑·박지원이 문제인가.
우선 두 사람은 '한국에서 가장 센 인물'인 대통령 김대중(디제이)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올해 <시사저널>이 여론주도층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그런 결과가 나왔거니와, 권노갑(46.2%)과 박지원(38.3%)이 각각 1, 2위를 차지했다.
3위와 4위에는 각각 한화갑(26.4%)과 한광옥(23.9%)이 올랐는데, 1, 2위 그룹과 3, 4위 그룹이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6, 7위에 이상주(대통령 비서실장), 이희호(부인), 김홍일(장남)이 뽑히긴 했지만 5위만이 10%에 턱걸이했을 뿐 6위부터 10위까지는 한자리수에 머물렀다.
그런데 박지원은 청와대에 있으니까 그렇다 치고, 권노갑은 지금 무슨 대단한 벼슬(?)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좀 억울하지는 않을까? 사실 권노갑은 디제이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변변한 자리에 오른 적이 없다. 작년 8월 최고위원에, 그것도 지명직 최고위원에 임명된 것이 고작인데, 그나마 소장파의 정풍운동 직격탄을 맞고 4개월만에 불명예 퇴진을 해야 했다.
바로 여기에 권노갑의 정치적 딜레마, 혹은 정치적 함의가 있다. 디제이 정부 하에서는 그가 어디에 있든지 영향력이 막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권노갑 스스로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운명적 굴레'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디제이는 왜 권노갑을 내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 즉 권노갑의 정치적 함의는 대통령 디제이와의 '특수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권노갑 파일을 작성한 뒤 면밀하게 분석해 보니, 이런 결론이 나왔다.
"권노갑은 디제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그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성서에 나오는 '달란트'란 말이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을 텐데, 권노갑은 디제이가 가지고 있지 못한 달란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권노갑이 디제이에게 내침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이자, 비리연루 인사개입 등 국정농단 혐의에 대한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민주당 회생의 번제물로 오를 수밖에 없게 된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부메랑 효과' 같은 것으로, 권노갑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수 있겠지만 알고 보면 자업자득의 측면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자 이제 권노갑 파일을 열어볼 시간이다. 그의 인생역정을 '디제이와의 특수관계라는 창(窓)'을 통해 분석해 보기로 하자.
권노갑은 1930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다(72세). 이 지역의 명문인 안동 권 씨 가문 사람이다. 부친이 안동에서 농사를 짓다 목포 개항 때 이주해 사업을 했는데, 식용유 공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디제이의 최측근 권노갑이 경북 출신이라는 것은 한국의 후진적 정치풍토에서 보면 의미심장하다. 반호남이라는 패권적 지역주의의 수렁에 빠진 디제이의 약점을 보완해 주는 측면이 있다.
권노갑의 취미는 운동이다. 실제로 권노갑은 "어린 시절부터 공부보다는 운동에 관심이 있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야구와 농구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173cm라는 당시로서는 비교적 큰 키를 가진 그의 농구 포지션은 '포워드'였다. 그리고 그는 지난 40년 동안 정치 경기장에서 '디제이의 포워드'로 뛰었다), 유도와 복싱은 전라도 대표선수로 활약했을 만큼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디제이는 목포상고를 수석으로 입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디제이는 학벌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류대를 나온 또 다른 김 씨와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지적 수준을 국민들에게 보여준 바 있다. 수천 권의 책을 읽었다는 '똑똑한 정치인' 디제이에게 권노갑의 단순할 정도로 우직한 뚝심은 소중한 자산이었을 것이다. 권노갑은 취미마저 디제이의 보색(補色) 역할을 해주고 있다. 보색이란 옆에 있는 색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색을 말한다.
권노갑이 디제이의 목상(목포상고) 4년 후배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초등학교(목포북교) 때부터 선후배 사이였다. '똑똑한 선배' 디제이에게 매료 당했던 권노갑은 1961년 인제 보궐선거에 출마한 디제이의 선거운동원으로 결합했다. 디제이의 정치인생 45년(1956년 민주당 입당 기준) 중 무려 40년을 동고동락한 후배이자 동지였다.
권노갑의 디제이에 대한 '충성심'은 절대적이다.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에 실린 회고기에서 그는 "죽어서도 '충성' 그 하나로 대통령을 모신다는 각오로 오늘까지 왔다" "나는 지금껏 김대중이라는 인물과 동일한 생각과 사고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더욱이 그는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무구생이해인(無求生以害仁) 유살신이성인(有殺身以成仁)'이라는 대목까지 동원해 김대중을 '절대적 존재'로 추앙했다. 이 말의 뜻은 "삶을 구하여 인을 저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는 것이다. 권노갑에게 디제이는 '인'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 말보다 주군(主君)에 대한 가신(家臣)의 절절한 충성심을 잘 드러낸 것이 있을까?
권노갑은 1963년 디제이가 의원에 당선된 뒤 정식으로 국회에 등록한 '김대중 의원 비서'가 되면서 디제이의 '정치적 분신'이 된다. 그는 1987년 김대중 평민당 총재 비서실장, 1991년 김대중 신민당 총재 특보, 1995년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비서실장으로 활동했다.
권노갑이 자식들에게 "내 묘비명에 단 한 줄, '김대중 씨의 비서실장'이라는 말만을 적어달라"고 말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1999년에 냈던 책 이름도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한 40년>이었는데, 실제로 권노갑은 디제이가 고난의 길을 걸을 때 항상 그 옆에서 '버팀목' 역할을 했다.
박정희, 전두환 등 군사정권의 최대 정적이었던 디제이에게 언제라도 비수가 되어 돌아올 수 있는 '조직'과 '자금'을 관리한 것이 바로 권노갑이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그는 나름대로의 생존술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음은 권노갑의 술회.
"그 생존술 중의 하나가 수첩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이었다. 웬만한 전화번호 2백여 개 정도는 외우고 있었으며, 암기되어 있지 않은 전화번호는 전화번호부 책을 이용했다. 더구나 경리장부를 갖는다는 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웬만한 것은 모두 머리 속에 넣고 다녔다. 수첩이나 장부가 빌미가 되어 고문을 해대면 아무리 암호문이라도 불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었다."(<대통령을 만든 사람들> 42쪽)
덕분에 권노갑은 사람 이름이든 전화번호든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해 주었고, 그것은 다시 '조직의 귀재'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비결이 됐다. 권노갑은 디제이가 그런 자신에게 "자넨 참으로 독특한 능력을 가졌어"라고 격려하면서 '인명사전'이란 별명을 지어준 것을 자랑스럽게 회고한 적도 있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권노갑이 '한보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된 것도 어찌 보면 그가 디제이의 정치자금을 담당한 업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디제이 의중을 가장 정확히 읽을 줄 아는 측근'이 된 권노갑은 언론이 붙여준 수많은 별명을 가지게 된다. '김대중 대리인' '동교동의 금고' '동교동 맏형' '노갑이 형'(혹은 '노갑이') '권부' 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노갑이'라는 애칭 때문에 성이 노씨 아니냐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권부'라는 말은 '권 부총재'의 줄임말이다.
'김대중 대리인'과 '동교동 금고'로서의 권노갑의 면모는 앞에서 살펴봤다. 그렇다면 '동교동 맏형'으로서의 권노갑은 어떤 인물인가. 동교동은 '동교동 178-1번지'라는 행정구역 명칭을 뛰어넘어 상도동과 더불어 한국정치의 1번지라는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이곳에서 '정치식객'으로 상주하면서 정치인 디제이를 온몸으로 옹위한 사람들을 '동교동계 가신'이라고 일컫는다.
동교동계 가신그룹 계보에는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60년대 결합), 설훈, 남궁진, 최재승, 윤철상, 이석현, 배기선, 배기운(80년대 결합) 등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최근 권노갑, 김옥두, 남궁진, 윤철상 등의 구파와 한화갑, 설훈, 배기선, 배기운 등의 신파로 갈리면서 모양새가 구겨지기는 했지만, 최근까지 권노갑은 명실상부한 디제이 가신그룹의 '맏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에 로비를 하려는 사람들, 한자리 얻으려고 기웃거리는 군상들이 권노갑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자명하다. 자의든 타의든 권노갑은 디제이의 권력의 후광(後光)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게 돼 있다.('후광'은 디제이의 호(號)이다) 권노갑의 별칭 중의 하나인 '권부'(權副, 권 부총재의 줄임말)의 의미도 서서히 권부(權府, 권력의 심장부)로 인식돼 갈 수밖에 없었다.
권노갑은 인사문제 등 각종 권력형 비리와 관련해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다. 그럴 때마다 그는 결백과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적었다. 실제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대통령과의 40년 인연 동안 단 한번도 의견이 어긋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은 예로, 당직자 인선 때나 선거 공천 심사 때도 대통령은 내 의견을 인정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대통령께 어떤 일을 문의하면 일단, '권 의원에게 가서 상의해 보시오'라고 말씀하셨을 정도였다."
비리의혹, 인사개입, 비선라인 독점 등의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권노갑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쇄신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여기게 하는 대목이다. 공인(公人) 권노갑과 관련해 제기되는 공적인 문제는 결코 사인(私人) 권노갑의 개인적 양심의 호소만으로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물론 권노갑은 정권교체 이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에게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무엇인가를 보상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말을 즐겨해 왔다.
그러나 정권교체 이후 권노갑은 각종 '명예'를 '보상'받았다. 경기대 명예경제학박사(1998년), 동국대 명예정치학박사(1999년), 미국 페어리디킨슨대 명예경제학박사(2000), 제주대 명예경영학박사(2001), 자랑스러운 목포상고인(2000), 자랑스런 동국인상(2001), 마틴루터킹 인권평화상(2001)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상복(賞福)이 어찌 권부(權府)로서의 그의 정치적 위상과 무관하다 할 것인가.
권노갑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동락(同樂)을 위해 그 분과 반평생을 동고(同苦)하지는 않았다. 다만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이 나라를 위해 반드시 훌륭한 일을 해 내리라는 믿음과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염원으로 그 어려운 세월을 참고 견디며 살아왔다. …(중략)… 이제 우리의 염원대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도 이루었고, 대통령으로서 그 분이 뜻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대통령이 우리들의 선생님만이 아닌 국민의 대통령으로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음지에서 도와야 한다. 사실 그것이 우리가 그 어려운 세월을 담보로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일이 아니겠는가."(<대통령을 만든 사람들> 50∼51쪽)
김대중 정부는 지금 위기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김대중의 가장 오랜 정치적 측근이자 동지이기도 한 권노갑은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한국정치의 '뜨거운 감자' 권노갑·박지원 문제의 해결은 이제 디제이에게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정작 이 문제의 가장 큰, 최종적 책임자는 디제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1년 11월의 한국정치는 그들의 선택과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