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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내 고향 강원도는 이미 겨울입니다. 엊그제 노랗게 물들었던 낙엽송들이 벌써 제 잎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이 바람에 맞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일요일 새벽에 일어나 마당가로 나가보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하얗게 서리를 덮어쓴 채 떨고 있었습니다. 김장 배추를 심어놓은 텃밭으로 달려가 보니 속이 꽉 찬 배추가 서리에 색이 바랜 채로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무를 뽑아보니 역시 윗 대궁이 얼어 있었습니다.

그날 낮, 부랴부랴 무를 뽑아 땅에 묻었습니다. 배추는 얼었다 녹았다 해도 덜하지만, 무는 얼어버리면 더 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야 그저 아버지께서 김장에 쓸 만큼만 심었으니 별 문제가 아니지만, 주변의 밭에 가득 심은 다른 농부의 무와 배추는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걱정입니다.

"보고 있는 내 마음이 이런데 농사 지은 사람들 마음은 어떨고?"
아버지는 끝 간 데를 모르게 펼쳐진 배추밭을 바라보며 그런 말을 하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에 트럭 몇 대가 밭으로 달려왔습니다. 친척 동생들과 초등학교 동창 몇이 무 출하 작업을 위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무를 사기로 한 업자는 몇 개의 무를 뽑아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가버렸습니다. 그 밭은 친척 동생이 지난 여름 내내 땀흘리며 무와 배추를 심은 곳입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동생은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다행이에요. 김치공장에서 가져가기로 했거든요. 한 차에 70만 원 받기로 했어요."

동생 말대로 시장에 무를 내다 팔아야 하는 사람들의 밭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출하 시기를 넘긴 배추와 무들이 시들어 버리거나 너무 굵게 자라 밭에서 썪고 있습니다.

▲ 시장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배추들(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노순택


그러나 이제는 얼어버린 동생네 밭의 무와 배추 역시 김치공장에서 사갈 리가 없으니, 난감한 일이 돼버린 것입니다. 무를 실으러 왔던 트럭은 가버리고, 농사꾼 마음처럼 시들시들 햇살도 가라앉는 골짜기 배추밭가에서 술추렴을 하던 사람들이 나를 불렀습니다.

여름 내내 땀흘려 지은 농사를 망치게 된 울분을 소주와 막걸리로 달래던 동생들과 동창들이 저마다 속내를 한마디씩 털어놓았습니다.
"이게 다 그놈의 김치 냉장고 때문이야. 김치 냉장고가 대량 보급되니 김장을 따로 할 필요가 없어진 거야."
"김치 냉장고 회사는 돈 벌고, 우리 같은 농사꾼은 죽어라 죽어라 하는 거지."
"요즘 도시 사람들 입맛도 문제라니까. 그저 인스턴트 식품이나 좋아하지, 어디 푹 곰삭은 김치의 깊은 맛을 알기나 하나."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나자 동생이 씁쓸한 경험을 털어놓습니다.
"며칠 전에 트럭에 한 2톤 남짓 배추를 싣고 가락 시장에 직접 올라갔었어요. 그런데 도대체 사겠다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한 가게에서 '십만 원에 내려놓을 테면 내려 놓고...'하며 별 관심 없다는 듯 한마디하데요."

결국 동생은 10만 원을 받고 배추 한 트럭을 그 집에 버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배추 값을 빼고도, 운임과 상차비, 하차비 등의 비용만 쳐도 24만 원은 받아야 본전인데, 겨우 10만 원에 '버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하는 동생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배어 나왔습니다.

그 말을 듣던 초등학교 동창이 불쑥 이런 말을 했습니다.
"까짓 것, 천만 원짜리 과자 사먹은 셈 치지 뭐. 언제 농사꾼이 제대로 대접받는 거 본 적 있어?"
그 친구가 버리게 된 무, 배추 값이 천만 원이랍니다.

울분을 안주 삼아 마신 술에 취한 동생과 동창들이 휘적휘적 걸어가는 골짜기 너머로 꼴깍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삶보다 쓸쓸한 그림자를 끌고 배추밭 가를 지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더없이 지쳐 보였습니다.

도시가 꽃이라면 농촌은 뿌리라고 합니다. 그 뿌리가 썩어 버린다면 우리 모두의 삶도 결코 안락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 여름 내내 뙤약볕에서 흘린 땀방울이 아무 보람없이 스러져버리는 이 계절은 얼마나 잔인한가요?

그들이 내려간 빈 골짜기를 나는 그저 텅 빈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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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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