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오마이뉴스 노순택 |
보림재(寶林齋).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대한매일 기자와 북한문제연구가인 정창현 중앙일보 기자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현대사자료실'(한글회관 302호)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정면 벽에 붙어 있는 작은 현판이 눈길을 끈다. 그 현판에 양각(陽刻)으로 부조(浮彫)되어 있는 글씨가 바로 '보림재'이다.
그렇다면 '보림재'의 뜻은 무엇일까. 정운현 기자는 그 의미를 '임종국 선생을 보배처럼 모시는 연구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보림재(寶林齋)'라는 것이다.(임종국의 한자 성은 '임(任)'이 아니라 '임(林)'이다.)
여기엔 전고(前故)가 있거니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에 이와 관련해 시사적인 대목이 등장한다.
전남 강진에는 천하명필로 알려진 추사 김정희가 정약용을 기리며 쓴 현판이 있다고 한다. 추사체로 멋들어지게 쓰여진 '보정산방(寶丁山房)', 이름하여 '정약용을 보배처럼 모시는 산방'이란 뜻이다.(정약용의 한자 성은 '정(鄭)'이 아니라 '정(丁)'이다.)
다산보다 24세 연하였던 추사는 다산을 자신의 학문적 스승으로 섬기며 이런 현판을 남겼다고 한다.
보담재(寶覃齋)는 김정희의 또 하나의 호. 그것은 자신이 또 한 분의 학문적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청나라 학자 담계 옹방강을 기린 것이었다. 그런데 또 그 옹방강은 소동파를 보배처럼 모신다는 뜻에서 자신의 서재를 '보소재(寶蘇齋)'라 했다고 한다.
보소재 → 보담재 → 보정산방 → 보림재. 이것이 바로 한 사설 연구실에 '보림재'라는 별칭이 붙게 된 사연이다.
<친일파-그 인간과 논리>, <친일파>(2권, 3권), <친일파죄상기>, <창씨개명>, <중국-대만 친일파재판사>, <서울시내 일제유산답사기>,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등의 수많은 친일문제연구서를 낸 정운현 기자. 그는 1998년 한국 신문 중 최초로 친일파의 행적을 파헤친 '친일의 군상'을 대한매일에 연재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역시 한국 방송 중 최초로 '라디오 반민특위'를 SBS 라디오를 통해 방송하기도 했다.
그런 정운현 기자가 연구실 이름까지 이름을 따서 지을 정도로 '보배처럼 모시는 스승' 임종국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실제로 '보림재'라고 쓰여진 현판 바로 위에는 한 초로의 사나이가 각종 서책과 자료가 가득 쌓인 서재를 배경으로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가 바로 오늘 소개하려는 고(故) 임종국 선생(이하 존칭 생략)이다.
정운현 기자는 이미 1998년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아웃사이더' 11인을 소개한 <세상은 그를 잊으라 했다>(삼인)에서 임종국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상세히 언급한 바 있다. 이 기사도 상당 부분 그 글에 힘입어서 쓰여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임종국. 그는 제도권이나 기성 역사학계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외면해 온 한국현대사 연구의 '금단구역'이었던 친일파 문제를 평생 혼자 구석방에 틀어박혀 낡은 옛 서적과 씨름하며 연구한 독보적 인물이다. 그러나 '임종국'이라는 이름 석자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우선 그의 짧은 이력서를 작성해 봤다.
● 1929년 경남 창녕에서 출생했다. 천도교 간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상경한 10대 시절, 그는 시인을 꿈꾸던 문학소년이었다. 1952년 고려대 정치학과에 입학할 무렵에는 판사나 검사가 되려고 고시공부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문학으로 '귀향'해 시인 이상(李箱) 연구에 몰두했다.
대학 졸업 후 출판사인 신구문화사에 2년 남짓 근무했는데, 이것이 그의 유일한 직장 생활이었다. 1959년 <문학예술>에 시 '비(碑)'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이후 <사상계> 등에 많은 시를 상재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이 체결된 1965년 그는 친일문제연구가로 변신했다. 이듬해인 1966년 명저 <친일문학론>을 발간한 이후 징용, 징병, 정신대, 독립운동사, 일제침략사 등 전반에 걸쳐 조사, 연구, 집필에 주력하면서 <일제침략과 친일파>, <밤의 일제침략사>, <친일논설선집> 등 14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논설과 시론을 남겼다.
1980년 지병인 천식이 폐기종으로 전이되자 충남 천안으로 귀농했다. 그러나 그의 왕성한 연구와 집필 활동은 지칠 줄 몰랐고, 그만큼 그의 건강도 악화돼 갔다. 그는 결국 평생의 숙원인 '친일파총서'(전 10권 예정)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후학의 숙제로 남겨놓은 채 환갑의 나이를 갓 넘긴 1989년 11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오늘 우리가 불현듯 임종국을 기억하려는 것은 그의 12주기가 며칠 후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임종국은 현재 천안공원묘지 무학지구 철쭉 4단 1번 묘지에 묻혀 있는데, 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후학들이 만든 '민족문제연구소'(소장 한상범) 주관으로 11월 11일(일) 바로 그곳에서 추모식 행사가 열린다.(문의 02-969-0226, www.banmin.or.kr)
친일문제연구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임종국은 원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다. 특히 1950년대 중반인 대학시절 세기말적 절망감 속에서 이상의 작품과 친해졌다. 지도교수이자 청록파 시인인 조지훈의 권유로 문학평론 <이상론>에 이어 1956년 3권 분량의 <이상전집>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임종국은 <이상전집>을 내면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한 뒤, 그것을 토대로 체계적인 비평을 가하는 방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았다. 실제로 그가 방대한 자료수집을 통해 엮은 이 책이 출간되면서 평론계에서는 이상의 작품 수보다 더 많은 작가론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친일문제를 연구하면서 발휘된 그의 '철저한 자료 조사와 분류'는 이미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일제시대 전기간에 걸쳐 발행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일일이 뒤져서 정치, 사회, 문화별로 기사를 색인화하고 있었으며, 그 작업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다른 신문으로 확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분류되고 정리되지 않은 자료는 자료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문학사회학'의 관점에 입각한 임종국의 1차적 노력이 있었기에 문학계의 이상 연구도 심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강준만 교수의 '기록과 평가를 통한 실명비판' 작업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발언과 행위를 기록한 1차적 자료에 대한 분류와 평가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기초적 힘이 아닐 수 없다. 임종국이야말로 바로 이 '기록과 평가'의 전통을 수립한 선구자였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임종국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자료쟁이' 후학 중에서 강준만, 박원순, 정운현의 작업을 어깨 너머로 잠깐이나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기록과 평가'를 둘러싼 그들의 곡진한 사연을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꼭 한번 소개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임종국의 친일파 연구와 현대사 연구는 일종의 '외도'인 셈이지만 '불륜'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문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역사'와 조우한 임종국은 역사와의 깊은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한 것이다.
| 그가 남긴 저서들.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질곡을 꿰고 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 앞에서 언급했듯이 임종국이 친일파연구가, 재야사학자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게 된 계기는 1965년에 타결된 굴욕적인 한일회담이었다. 그는 이 일로 "내 인생의 근본이 바뀌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당시 임종국은 <매일신보> 색인을 정리하며 발견한 대한민국 지도층 인사들의 충격적인 친일행각을 정리하면서 한일회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국 정부 대표라는 사람이 토해낸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반드시 한일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퍼뜩 20년 전의 일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1945년 퇴각하던 한 일본군 상등병이 17세였던 소년 임종국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20년 뒤에 반드시 다시 돌아오고야 말겠다."
그리고 정확히 20년 후 대한민국 정부 대표가 '제2의 이완용'을 운운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임종국은 갑자기 전율을 느꼈다. 그는 나중에 회고문에서 "이거 이대로 보고만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고 술회했다. 그런 분위기에선 '제2의 이완용과 송병준과 박춘금'이 얼마든지 생겨날 것이라는 두려움도 엄습했다.
그래서 쓴 것이 바로 <친일문학론>이었다. 원고지 2천매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탈고까지는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임을 염두에 두면 엄청난 속도였다. 그러나 그에겐 이미 '시인 이상(李箱)의 시대(〓일제시대)'를 연구하기 위해 조사해 놓은 1차적 자료가 축적돼 있었다.
그러나 친일문제연구의 길은 영광이 아닌 형극의 길이었다.
당시가 어떤 시대였는가. 무엇보다 먼저 일본육사를 나온 만주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가 철권통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친일파가 한일회담의 대표로 나섰고, 국사편찬위원장이 되었고, 독립유공자를 심사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제호 위에 일장기를 달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던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역사적 단죄를 받기는커녕 사죄 한 마디도 없이 '민족지'를 자처했다.
학계의 내로라 하는 역사학자, 정치학자들이 숨을 죽이고 있던 시절, 임종국은 친일파 연구라는 이 '금기의 성역'에 겁도 없이 단기필마로 뛰어들었던 것이다.(그러나 제도권 학자들은 자료발굴을 위해 헌책방을 뒤지는 등 고투하는 재야학자들을 '넝마주이'라고 조롱했던 것이 당시의 형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스스로 '넝마주이의 가시밭길'을 선택했던 것일까.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민족사를 가장 크게 그르친 자가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말았다. (한국전쟁 당시) 패주 행렬 속에서 본 젊은 죽음들, 그들을 그 꼴로 한 장본인이 친일파였다. 제2의 매국 반민법을 폐기한 것도 친일파였다. 한말 가렴주구로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제1의 매국을 했고, 총독부에 영합하면서 친일을 했다. 해방 후에도 개과천선은커녕 반민법을 폐기하면서 독재와 부패 끝에 유신을 불러들였다."
결국 임종국은 제2의 매국, 제3의 매국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도 제1의 매국인 친일문제를 반드시 국민들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 임종국의 임종을 지켰던 제자 김대기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3년간 독일의 점령 하에 놓인 프랑스는 종전 후 수만명의 부역자들을 처단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제국주의 침략기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며 민족적 단죄 또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들의 해악이 넘쳐흘러 이 땅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으니 실로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도 손을 못댄 성역이 되고만 친일의 배족사를 선생 한 분이 개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임종국이 1966년 발표한 <친일문학론>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있었던 것일까.
이 책은 당시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불러일으켰는데, 우선 이광수(香山光郞), 최남선, 김동인(東文仁), 김동환(白山靑樹), 김팔봉(金村八峯), 노천명, 모윤숙, 유진오, 이무영, 이효석, 정비석, 주요한(松村紘一), 채만식, 최정희, 백철, 조용만 등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쟁쟁한 명사들이 일제시대 당시 썼던 글, 즉 '천황과 일제를 위해 바친 매국과 매족의 증거물'들이 고스란히 발굴되어 실려 있었다.(괄호 안의 한자는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
더욱이 임종국은 자신의 부친인 임문호(천도교 당수, 조선농민사 사장)과 대학 은사인 유진오(고려대 총장, 대한민국 헌법 기초자)마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렸다. 백철, 조용만, 조연현도 당시 부친과 절친한 친구였지만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임종국의 역사학자로서의 냉정한 균형감과 공정성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임종국은 친일파 연구라는 외로운 작업을 필생의 테마로 잡은 집념의 인물이다.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그의 연구와 집필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했었던 것일까. 세상을 뜨기 2년 전 그는 이런 절규를 유언처럼 남겼다.
"혼이 없는 사람이 시체이듯이 혼이 없는 민족도 죽은 민족이다.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되며 진실만을 밝혀서 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15년 걸려서 모은 내 침략, 배족사의 자료들이 그런 일에 작은 보탬을 해줄 것이다. 그것들은 59세인 나로서 두 번 모을 수 없기 때문에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자료와 그것을 정리한 카드 속에 묻혀서 생사를 함께 할뿐인 것이다."
그리고 1989년 11월 12일 0시 40분 임종국은 눈을 감았다.
그의 타계 소식이 알려진 뒤 정부와 언론의 반응은 어땠을까. 우선 정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준 그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으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친일전력이 있는 신문들은 그의 죽음을 1단으로 짧게 처리하거나 외면해 버렸다.
그것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불의한 권력에 아부하고 친일을 한 것이 드러났고, 더욱이 스스로 그것을 자백하고 인정까지 했던 미당 서정주의 죽음에 대한 우리 사회의 '화려한 배웅'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친일행각은 친일행각이고 '문학적 업적'은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는 해괴한 변명을 내세우며 요란스럽게 보도하고 숭모했던 언론, 그런 인물들에게 생전이나 사후에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하기에 바빴던 정부. 그러나 그들의 숨겨진 과거를 실증적 자료를 통해 밝혀낸 임종국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임종국의 '현재적 의미'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MBC 시사프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반민특위-승자와 패자>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프로의 마지막 부분에는 경남 통영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직후 반민특위 위원이었던 김철호 씨에 대한 억울한 사연이 나온다. 김 씨는 당시 친일행위를 한 친구 서모 씨를 민족법정에 세우려 했으나 반민특위가 깨지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김 씨는 친구 서 씨에게 거꾸로 '빨갱이'로 몰린 채 학살당하고 만다. 그 '반공투사'로 변신한 친일파의 아들은 지금 서울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다.
그동안 '과거완료형' 정도로 취급되었던 친일파 논쟁이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다시 불거지고 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부친의 일제시대 공안검사 전력 논란, 한나라당의 반박성 폭로로 불거진 김대중 대통령의 창씨개명 논란, <조선일보> 친일행각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 박정희 기념관 건설반대 논란 등 한국사회의 가장 큰 치부이면서도 철저하게 공백으로 남아있던 비밀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각종 변명과 반박 등 '별 이상한 논리'도 무수히 쏟아지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소설가 이문열의 '상황론'을 동원한 '친일파 옹호론'이다. 그는 '생계형 친일'과 '출세형 친일'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다 생계형 친일인 것처럼 몰아가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와 관련, 임종국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친일문제가 항상 우리에게 무거운 짐으로 눌려오는 것은 그것이 '생존을 위한 친일'이었다기보다, 대부분 부와 지위를 더하기 위한 '자발적 친일'이었다는 데서 연유한다. 1910년 병합되기 전 이미 넘어갈 자들은 다 넘어갔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지 말자."
임종국. 생전에 자료 수집차 일본에 한번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교통비가 없어 뜻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던 그가 사후에 남긴 것은 집 한 채와 평생 모은 친일파 관련 자료 더미뿐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임종국은 성공한 인생인가, 실패한 인생인가.
물론 세속적 잣대로만 본다면, 실패한 인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메인스트림'과 '승자'가 되어야만 대접받는 세상에서 역사에 대한 신념, 소신, 지조를 가지고 영욕의 현대사를 달려온 임종국에게 우리는 새로운 개념의 성공의 면류관을 선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일궈놓은 옥토에서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와 정운현 기자 같은 후학들이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고 튼실한 열매가 열리는 날. 민족사를 바로 세우려는 사람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날. 한반도 방방곡곡이 모두 '보림재'가 되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가 CBS라디오 <변상욱의 시사터치>(진행 변상욱 제작부장, 연출 정혜윤 PD)에 매주 금요일 출연해서 방송한 내용을 바탕으로 재정리해 올린 것입니다. 월∼금요일 오전 10:35∼11:30에 방송되는 <변상욱의 시사터치>는 표준 FM 98.1 MHz / AM 837 KHz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