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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의 H초등학교 학부모들은 말할 곳이 없었다.
학생이 학교에서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는데,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느니 '스스로 먹었다'느니 하는 헛공방이나 했으니 오죽 답답했을까. 이것이 논쟁할 일이었나? '먹으라고 해서 먹은' 것보다 '스스로 먹은' 게 더 끔찍한 일이다. '먹으라'고 한 것은 실수가 될 수도 있지만 '스스로 먹은' 것은 그 교실이 얼마나 '닫혀' 있었는지 말해준다.

믿어지지 않지만 H 선생님이 학부모에게 '한 번 찍히면 6학년까지 꼬리표 달고 간다'라고 했다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아이가 토한 걸 도로 먹은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요즘 유행하는 조폭영화에서나 들을 말이지 교사에게 들을 말은 아니다. 학부모들과 H선생님은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관계로 보인다.

20년 넘게 교직에 몸담아온 나도 내 자식의 담임선생님(고 3때, 수학담당인데 도대체 실력이 없었다) 때문에 속이 타도 어디 말 한마디 할 곳이 없었다. 그 선생님에게 '공부 좀 하라'할 것인가? 그런 교사한테 고3 담임을 맡기는 교장선생님 보고 '교장 노릇 잘하라' 할 것인가? 말해봐야 내 속만 더 뒤집어질 뿐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수학과외를 시킬 수밖에 없었다.

학교운영위원회가 잘 운영되면 이런 갈등도 풀어나갈 수 있지만 그런 학교는 별로 없다. 일반 학부모들은 학교운영위원회가 무엇 하는 기구인지도 잘 모른다. 내가 학교운영위원으로 일하면서 보니 대부분 학부모 위원들이 자신들의 법적 권한이나 임무를 모르고 있었다. 학교가 추천하니까 들어와서 학교측에 밉보이지 않을 연구나 하며 자리를 채워주고 거수기 역할이나 한다. 다른 학부모 단체 대표들이 그런 역할을 맡기는 힘들다. 그들은 자식에게 약한, 따라서 학교에 약한 한국의 어머니일 뿐이다.

상황이 이러니 이 나라의 학부모들은 학교나 교사 때문에 쓰린 속을 미장원이나 반상회의 '카더라' 방송에 풀어놓고 만다. 험담은 확대 재생산되기 마련이고 전파도 빠른 법이다.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안타까운 현상이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기는 교장 선생님이 더 심하다.
"체벌할 사람은 사표 써놓고 하라고 했다."
교사들에게 이런 막말을 했다고 밝히는 사람이다.
"잔반 안 남기는 반이다."
아이들이 토한 걸 도로 먹는 것도 '지도를 엄격하게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학교의 '급식지도'에서 아이들은 '수단'으로 전락했다.

"옛날에는 선생님이 왕이라 했다, 요즘에는 왕이란 말을 쓸 수 없지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선생님에게 절대적 권한이 있는 거다. 그 안에서 어떠한 것을 하든 간에 선생님 철학, 선생님 교육관 가지고 하는 건데..."
교사에 대한 평가는 '교장 자격증'을 가진 자신이나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사건을 취재하러온 방송국 PD를 대하는 교장선생님의 태도를 보아도 그가 얼마나 권위적으로 학부모들을 대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학부모들이 이런 교장선생님과 대화가 가능했을까?

"교장선생님이 '엄마는 선생님에 대해 안 좋은 소리만 듣고 다녀? 진실이고 뭐고 집어치워. 엄마들이 건방지게 뭐를 안다고 학교에 대해 말이 많고... 와서 가르쳐 보라 그래... 그 선생님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난리야'라고 했다."
"작년에도 학부모들이 H 선생님의 폭력적인 행동에 항의해 서약서까지 받았지만 학교장이 관련 학부모들을 하나씩 불러 '교사를 돕지 못할망정 교사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을 해서야 되겠느냐'며 사태를 무마했다."
학부모들의 말이다.

이 교장선생님은 자신의 권한이 어디까지인지 모르는 분 같다. 교육자로서는 아이들의 선생님이고, 행정가로서는 학교 관리자이다. 학부모들을 가르치는 것은 그의 권한 밖에 있다. 학부모들이 원한다면 교육 전문가로서 자신의 지식이나 견해를 말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들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 학부모들에게는 선생님이 아니고 공무원이다. 공무원이 국가의 주인인 국민을 꾸짖을 수는 없다. 크든 작든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것의 한계를 자의적으로 넓힘으로 발생하는 사회 곳곳의 병폐를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아왔다. 모든 종류의 권력의 꼭대기에 국민이 존재해야 민주주의 아닌가?

이 사건은 교장 선생님이 학부모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해명할 것은 해명하고 잘못 된 것은 이해를 구해야 할 일이었다. 필자의 전 기사 '내 가슴속의 스승'의 K 교장 선생님이라면 일을 이렇게 망가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힘으로 학부모들을 제압하려 했다. 그들은 교장선생님에게 분노했고, 권위적인 사회구조에 절망했다. 그러나 이 절망을 통해 그들은 학부모에서 시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민의 눈으로 대자보라는, 인터넷이라는 길을 찾아낸 것이다.

보통 학부모들이었을 그들은 이 사건이 이렇게 커지기를 처음부터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장 선생님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정하게 처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면 일이 이렇게 확대되지도, 학부모나 교사가 서로 고통스럽지도 않았을 것이다. TV를 본 대부분의 교사들은 '교장이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말했다.

교장의 잘못으로 H 선생님은 정말 너무 큰 상처를 입었다. 교육청의 조치가 어떻게 되든 그가 교직의 목표로 삼았던 승진은 이제 물 건너갔다. 승진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지 학교 밖에서는 잘 모른다. 내가 교무부장 할 때 교무실과 교실 사이를 뛰어 다니다시피 했다. 내 능력부족 탓도 있었지만 그만큼 일이 많았다. 담임을 맡지 않고 교과전담이었는데도 너무 바빴다. 교장은 물론 교감이 일손 한가하다고 도와주는 일은 드물다. 일부 학교에서는 교무부장이 입학식이나 졸업식의 교장연설문 까지 써줘야 한다.

H 선생님은 교감승진을 앞둔 교무부장이다. 그는 아이들이나 학부모보다 교장의 심중을 읽어야 했다. 그가 교감이 되느냐 못 되느냐는 오로지 교장의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이들을 정성껏 가르쳐도 교장의 눈밖에 나면 소용없다. 아이들과 교사 사이의 감정의 교류를 읽어내고 그것을 가장 중요한 평가항목으로 삼는 교장도 있지만, 일부 교장들은 교실이 조용한가, 급식 잔반은 적은가, 교실정리는 잘 되고 깨끗한가, 조회 때 줄을 잘 서나 따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평가한다. 보통에 못 미치는 교장들은 폐품 많이 내는가, 어린이신문 많이 구독시키는가, 도서 많이 걷어내는가, 자신에게(국가가 아니다) 얼마나 충성하는가 따위도 평가한다. 그런 교장들은 교사가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느냐하는 것은 관심 없다.

'평가'가 '내용'을 결정한다. 교장의 '평가'가 교사의 교육활동의 '내용'을 결정한다. 교사들은 교장의 평가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특히 승진을 앞에 둔 교사는 '평가'에 목을 맨다. H 선생님은 교장이 원하는 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아이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개 같은(개나 도로 먹는다는 뜻이다)일이 벌어진 것이다. 승진이란 '목적'을 위해서는 교육을 '수단'으로 전락시켜야하는 왜곡된 제도가 이 사건 발생의 원인이다.

H 선생님은 학부모들에게는 기피대상이었지만 교장에겐 모범 교사였다. 그가 학부모들에게 한 사직 선언은 교장에 의해 번복되었다. 교장에겐 너무 아까운 교사였던 것이다. H 선생님의 경우 '교장의 눈에 든다'는 것은 '학부모의 눈밖에 난다'와 이음동의어였다.

학부모들은 홍 선생님을 '교단에서 추방하겠다'고 한다. 내 생각이지만 그럴 필요 없을 것이다. 홍 선생님 역성들려는 것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교육청으로부터 조치(징계)를 받으면 교감 승진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교장의 눈에 들 필요가 없어지고, 아이들은 자연스레 홍 선생님의 '수단'에서 '목적'으로 돌아올 것이다. 멀쩡하던 교사가 승진에 마음을 뺐기는 순간 자신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걸 많이 봤다. 학부모들이 본 홍 선생님의 모습은 본래 그분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몹쓸 '교장 자격증' 제도에 순응하려다 이런 사고를 낸 것이다.

수요자가 배제된 공급자의 자체평가, 그 평가에 따라 받은 '교장 자격증'을 소지한 교장의 평가, 그 평가에 따른 승진. 현재의 교장 '자격증' 제도로는 '자격미달' 교장의 출현을 막을 수 없고 이런 불행한 사고는 계속될 것이다. 학부모와 학생에게 아무리 원성을 사는 교사라도 교장 눈에만 들면 승진할 수 있는 이 정의롭지 못한 제도를 바꿀 때가 됐다.

공급자의 권한이 비대한 사회는 후퇴한다. 교육 공급자로서 교사의 교권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교권을 사전적으로 보면 '교사의 권리와 권위'가 되겠지만 명확한 의미규정이 필요하다. 권리와 권위가 구별되어야 하며, 특히 권리는 명확한 규정이 필요하다. 교사들이 생각하는 교권과 교장이 생각하는 교권이 다르고 학생이나 학부모가 생각하는 교권이 또 다를 것이다(교사의 권리와 권위에 대하여 다음 기사에서 다루려 한다). 교육공동체를 위해 교권의 한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말이다. 교권이 뭔지 모른다면 어떻게 그걸 지키겠는가.

학부모들은 내년에도 그 선생님이 담임을 할까봐 문제를 터뜨렸다고 했다. 1년은 참을 수 있지만 더 이상을 안 된다는 거다. 이게 문제다. 학부모들은 학년초가 가까워 오면 아이 담임이 누가 될지 걱정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한다.

학부모들에게 담임 선택권을 주자는 말이 아니다. 학부모들의 의사를 어느 정도 반영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자는 말이다. 학교운영의 전권을 교장이 가지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반복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교사가 자기 아이의 담임이 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가 학부모에게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H초등학교 사건 같은 불행한 사태의 재발을 막고 대다수 양심적인 교사들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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