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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는 관악산에 생채기를 내고 있었습니다. 하늘 높이 솟아 오른 건물들은 관악산 연주봉과 키를 겨누려는 것일까요. 막 콘크리트를 붓고 있는 곳도 몇 군데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서울대학교에 건물 지어주는 경쟁을 하고 있는 듯도 했습니다. 교정 깊숙한 곳까지 건물들이 들어섰으니 버스가 순환도로로 한 바퀴 돌아나갔습니다. 교수회관에서 있었던 은사님의 정년퇴임식에 참석했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버스를 탔습니다.

마을버스는 대학 후문을 통과하여 낙성대 쪽으로 내려가다가는 뜻밖에도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산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잘 포장된 그 길은 분명 내가 살던 그 마을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마을은 20년이 지난 요즘도 꿈에 나타나는 서글픈 삶의 공간입니다. 꿈에서도 그리던 내 젊은 날의 그 마을을 나는 그날 뜻하지 않게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20년 전 내가 고단한 학부시절을 그 마을에서 보낼 때 그 길은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불거져 나온 황톳길이었습니다. 낙성대 입구 정류소에서 그 마을까지는 걸어서 25분이 걸렸습니다. 중간에 낙성대가 있고 그 앞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개울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산쪽을 우러러보면 영화 세트같은 우리 마을이 수풀 사이로 보였습니다. 거기서도 한참을 더 걸어가야 했습니다. 짐을 들고 걸어가기에 너무 힘든 거리였을까요. 그 지점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마태복음> 구절이 적힌 팻말이 서 있었지요.

그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대학촌'이라 불렀습니다. 대학생이라고는 나 하나뿐인 그 마을을 대학촌이라 부르는 것이 처음에는 잘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도시재개발에 의해 쫓겨난 사람들이 몇 달만에 산의 중턱에 이룬 마을. 전화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공동수도를 이용했는데 물이 잘 나오지 않아 마을 앞 밭 한가운데 있던 우물물을 길어와 허드렛물로 써야 했습니다. 나의 자취방에는 온돌이 없어 겨울에는 방 안에 떠놓은 약숫물이 꽁꽁 얼었습니다. 이웃 동네의 사람들은 그 마을을 '철거민촌'이라 불렀습니다.

얼마 뒤 대학이 고개 너머로 이전해왔습니다. 그러자 이 마을 사람들은 아들 딸들을 그 대학에 입학시키는 대신 본인들이 직접 대학으로 갔습니다. 청소부, 요리사, 수위 등의 자리를 얻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마을을 대학촌이라 당당하게 불렀습니다. 철거민촌이라고 그 마을을 깔보던 사람들도 그 마을 사람들의 자존심을 더 이상 건드리지는 않았지요. 대학이 교수나 학생, 행정 직원만으로 꾸려지는 것만은 아닐진대 이들의 자존심은 정당하다는 사실을 나는 그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거의 매일 치러지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밤마다 거창하게 일어나는 부부싸움이었습니다. 한 집에서 싸움이 시작되면 이웃들이 몰려가 구경을 했습니다. 부부싸움은 너무나 과격한 것이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을 졸이게 하고 섬뜩한 예상을 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주먹으로 뺨을 후려치는 것은 보통이었고 팔꿈치로 아내의 명치를 가격하거나 발로 허벅지를 짓밟다가는 몸통을 들어 마당으로 내팽개치기까지 하였습니다. 멀리서 구경하던 남자들은 느긋한 자세로 짜릿한 대리만족을 충분하게 한 뒤에서야 조금씩 다가가 그 싸움을 말렸지요.

남편으로부터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생계를 꾸려가던 그 마을 아주머니들과 나는 친하게 지냈습니다. '서울'로 가는 황톳길이 아득히 내려다 보이는 구멍가게에서 우리들은 아침마다 만나 얼굴을 익혔기 때문이겠지요. 주로 두부나 콩나물을 사러 갔습니다. 나는 삶에 찌든 그들의 표정을 아침마다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누추한 시골집에서 느끼는 안도감과 별 차이가 없는 감정이었습니다. 그 아주머니의 표정과 처지는 내 어머니의 그것들과 너무나 닮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서 지난 밤 남편들에 의해 만들어진 생채기나 멍을 발견하고는 연민의 정을 누를 길 없었습니다. 내 남근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주머니들은 내가 학교식당에서 식기를 들고 줄을 서 있으면 그 수많은 학생들 중에서 용케도 나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와 반갑게 웃으며 '우리 동네 학생'이라 자랑하며 반찬을 더 얹어주었습니다. 나는 우리 동네 아주머니들의 자존심이기도 했습니다.

귀가하던 처녀가 마을 동구 어디쯤에서 성폭행을 당하여 나무에 목을 매달았다는 소문이 흉흉하던 어느 날 밤, 나는 잠결에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다급한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주인집 아저씨를 부르고 있었으나 안방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습니다. 대문을 대신 열어준 나는 동네 아주머니들로부터 일이 일어났다는 급박한 이야기를 듣고서 주인집 리어카를 꺼내어 건넛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아이들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사내는 문 앞에 버티고 서서는 "그냥 내버려 둬"라고 취한 목소리로 외쳐댔지요. 자기집 일은 자기가 해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그 어이 없음은 인간성에 대한 실망과 불신으로, 마침내 분노로 변했습니다. 사내를 밀어제치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방안에는 아주머니가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 몸의 온기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서서히 식어가는 듯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화장한 얼굴을 그때 처음 보았습니다. 평소의 그 꾀죄죄함을 얼굴에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남색 명주치마에 비단 저고리를 차려입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시집올 때 마련한 그녀의 유일한 나들이옷인 것 같았습니다.

같이 간 동네 아주머니들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리어카로 옮겼습니다. 깔아놓은 요 위에 그녀를 눕힌 다음 얇은 이불을 덮었습니다. 리어카 뒤축 밖으로 발등이 삐쭉 나왔습니다. 아주머니의 발등이 달빛을 받아 더 하얗게 보였습니다.

관악산 중턱에 있는 이 마을에는 전화조차 없으니 응급환자가 생길 경우 그렇게 생선 싣는 리어카로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삐쭉삐쭉 머리를 내밀고 있는 돌부리를 힘겹게 피하면서 달빛 밝은 황톳길을 달렸습니다. 소쩍새는 땅 위에 깔린 아카시아의 하얀 꽃잎 위로 새빨간 피를 토해내는 양 울어댔습니다.

길은 끝이 안보였습니다. 나는 그 가련한 여인을 저승길로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며 더 세차게 달음질쳤습니다. 허둥대느라 신이 벗겨지고 단추가 떨어져 나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얼마나 갔을까요. 멀리서 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택시였습니다. 타고 있던 승객의 양해를 구하고 그녀를 실어 보냈습니다.

나는 안도하며 그 집으로 다시 갔습니다. 그 집의 아이들은 울다 지쳐 잠이 들었고 공장에 다니는 큰 딸만이 넋을 잃고 앉아 있었습니다. 큰 딸이 들려준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큰 딸은 집의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하는 데 보태고자 공장으로 나가 일을 하였습니다. 가장 노릇을 하지 못하는 실업자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식당일을 하는 그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얼마 전부터 아버지의 술주정이 심해졌고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저녁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여자와 함께 걸어가는 아버지를 목격했답니다. 큰 딸은 젊은 여자를 그렇게도 다정스럽게 대해주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전날 밤 어머니에게 잔인하게 주먹질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합니다. 너무나 분하여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 뒤로도 아버지의 폭력은 계속되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전날은 아버지의 행동이 두려울 정도로 잔인해졌고, 이에 어머니는 마침내 그 젊은 여자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날 목욕을 하고 돌아와서 나들이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법사에게 어린 자식들을 부탁하고 종적을 감춘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날 한 사내의 타락한 욕망과 자포자기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인간생명에 대한 외경심조차 말살케 하는 부끄러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부부 간 은근한 약속의 파기가, 여자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격에 대한 모욕이, 가난한 여인에게, 사무치는 생활고 못지 않게 절망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단한 여인의 가슴 속에 숨겨져 있던 비수가 발등으로 흘러나와 달빛에 번쩍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저승길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에게, 아니 대부분의 우리 가난한 이웃에게 저승이란 이승의 삶으로부터 배반당하였을 때 최후로 떠올릴 수 있는 꿈이요 유토피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승으로 간다는 것은, 혹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평소보다 조금 더 몸을 깨끗이 하고 소중하게 간직해둔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서 긴
여행을 떠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이상도 이하도 생각할 수 없는 우리 이웃의 서러운 한계를 보았습니다.

그날밤 나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저승을 택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소중한, 이승에서의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나의 저승길을 위해 나는 과연 어떤 옷을 예비해두고 있는가, 내가 거쳐가야 할 저승길은 그 이웃 여인이 실려간 우리 동네 황톳길의 그 돌부리 불거진 길보다도 더 험할 것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느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어떤 말이나 행동은 자기 아내를 죽게 할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치를 떨었습니다. 온전한 남편이 되지 못하면 아내를 죽게 하는 남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내 살인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는 남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지금도 내가 그때 그런 결심을 했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가련한 아주머니가 더 자주 떠올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동이 일어나고 한 달 쯤 지난 어느 날 아침, 마을 구멍가게에서 나는 아주머니를 다시 만났습니다. 살아났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날 밤 이후로는 처음 상면한 셈이었습니다. 그녀는 황톳길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였을까요. 두부 한 모를 손에 든 채 나 역시 그 길을 우두커니 내려다 보았습니다. '서울'로 가는 황톳길은 그날 따라 더욱 아득하고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여인의 눈자위에서 다시 발견한 파란 멍의 잔영이 나의 눈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요.

마을버스가 달리는 이 포장도로 밑에는 그 옛날의 황톳길이 숨죽이고 있을 것입니다. 회상에 젖은 나를 태운 마을버스가 서서히 마을로 다가갔습니다. 내친 김에 내가 자취하던 집과 식당에서 반찬 더 얹어주던 아주머니의 집과 리어카에 실려 갔던 그 아주머니의 집을 찾아볼까 생각했습니다. 어수선한 골목들과 타이어 올린 지붕들과 찌그러진 창문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속의 가련한 얼굴들이 눈에 삼삼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내가 꿈속에도 그리던 판잣집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파트의 하얀 벽들이 나무들 사이로 우뚝우뚝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인헌 아파트'라 적혀 있었습니다.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가슴 속에서 차가운 돌덩이 하나가 스러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마을이 재개발된 것이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들은 지금 어디 계시는 것일까요? 저 고층 아파트 어느 집에서 따뜻한 수돗물로 샤워를 하고 편안한 저녁을 보내고 계실까요? 입주권을 팔아 넘기고는 또 다른 철거민촌을 전전하고 계실까요? 아니면 한 많은 생을 이미 마감한 것일까요? 세입자였던 그분들이 따사로운 불빛이 새어나오는 저 아파트 거실에 앉아 있을 성싶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고향을 잃는 사람처럼 차창 밖으로 펼쳐진 아파트 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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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젖병을 든 아빠, 아이와 함께 크는 이야기>>(돌베개), <<한국야담연구>>(돌베개), <<조선시대 일화 연구>>(태학사),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상>>(보림), <<말이 없으면 닭을 타고 가지>>(학고재)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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