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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김 현의 '행복한 책읽기'를 읽다가, 부버가 쓴 '나와 너'를 대학교 2학년 때 읽고서 충격을 금치 못했다는 대목이 눈에 번쩍 띄었다. 신학 전공자들에게만 필독서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나도 신학대를 다닐 때 구입하여 읽기를 시도했는데, 끝까지 다 읽지 못하고 중간에서 덮고 말았다.
이유는 이 책에 대한 선생님들의 잦은 언급, 서평 등을 읽었으므로 굳이 완독할 필요를 못 느꼈고, 당시엔 어려서 그랬는지 책 내용이 딱딱한 철학적인 어투와 반복적인 말들로 다가와 지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읽지 못하고 책장에 묵혀 둔 게 늘 걸렸는데 이번 기회에 맘 잡고 읽어볼 요량으로 다시 꺼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과연 고전은 고전이라는 경탄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번뜩이는 잠언들과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들이 곳곳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책이었다. 만남이 왜곡되고 타자에 대한 배제와 개인 이기주의가 판치는 이 시대에 이 책은 여전히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저자는 이 책을 처음 구상할 때, 자신의 청년 시대부터 되풀이하여 다가오던 어떤 충동과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을 투명하게 정리해내는 작업으로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노라고 술회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왜냐면 이 책은 난해한 내용을 가지고 논증을 한 논문도 아니며, 그렇다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산문집도 아니기 때문이다. 영감 어린 사유가 농축된 형태로 전개되는 철학·신학적 산문시인 것이다.
저자는 인간을 '대화적 실존'이라 규정짓고 있다. 즉 인간은 타자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고 비로소 삶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만남이 왜곡된 형태로 자꾸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하루에도 무수히 경험한다.
인격적인 주체인 '너'의 독존성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를 경험과 이용에 갇힌 (소유적 의미에서) '그것'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이는 타락한 관계를 양산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위선적으로 '너'라는 근원어를 즐겨 사용한다. 저자는 이러한 관계가 인간 사이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연과 정신적 실재(신?) 사이에도 두루 해당된다고 보고 있다. 생각해 보라. 자연을 그저 이용해야할 대상으로 여기고 무분별한 개발을 통한 환경파괴가 낳은 비참한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인간은 날이 갈수록 그에 대한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지 않는가.
역사에는 저자가 실례로 든 소크라테스나 예수 같은 살아있는 '나'라고 말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나'는 힘차고 압도적이며 당연하고 뚜렷했다. 게다가 현재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에 아름다운 메아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반면 희대의 영웅 나폴레옹은 '너'의 지평을 결코 알지 못했던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그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동력기 같은 것으로 밖에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말했던 '나'라는 존재마저도 주어로서의 의미를 지닐 뿐 사실은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그는 자신까지도 기계적인 '그것'으로 취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독재자의 잘못된 자기인식과 인간관은 참된 인간 관계의 파괴를 낳고 그로 인해 많은 인민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기에 이른다.
요컨대 저자가 이 책에서 내내 역설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과의 참된 관계성의 회복이다. 사람이 관계의 전환을 감행하고 낱낱의 '너' 속에서 '영원자 너'를 만날 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면서도 계속하여 '가진다'는 왜곡된 관계의 차원에 머물러있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인간관계에 있어 많은 성찰거리를 제공한다.
참된 삶의 가치를 회복하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고전이 된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저자 부버는 청년기부터 일관된 사회주의자였으며, 1923년부터 10년간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가르쳤다. 그후 1933년 나치스당의 집권으로 추방되어 여러 나라를 유랑하다가 말년에는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에서 사회철학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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