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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서울 세종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민간법정에서 악의적 보도를 일삼아 온 조선일보에 '친일 반민족 반통일 신문'으로 유죄판결이 내려지던 날, 이웃 교보문고 북센터에는 매우 뜻깊은 책 한 권이 독자의 눈을 끌고 있었다.

조선일보가 "몸과 마음을 다해 충성으로 만수무강을 축원한" 발원이 헛되지 않았음인지(?) 88세라는 천수를 누렸던 '現人神 히로히토'를 '戰爭狂 히로히토'로 복원(復元)시켜 놓은 에드워드 베르의 <히로히토-신화의 뒤편>이 그 책이었다.

군국주의 일본이 만주에 세웠던 괴뢰정권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일대기를 써서 널리 알려진 베르는 2차대전의 명백한 전범(戰犯) 히로히토(裕仁·1901~1989)가 '군부에 놀아난 꼭두각시인가, 그림자 없는 지휘관인가' 하는 진부한 주제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히로히토는 이미 대륙 침략을 위한 아시아 약탈, 대동아 전쟁, 2차 세계대전의 원인 제공자였다는 증언이 넘칠 만큼 나왔다는 사실을 저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의 공로는 히로히토가 전범재판에서 면죄부를 받은 내막과 미국의 음모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가 일본인들에게 '살아 있는 신'으로 군림하는 것이 가능했던 과정까지 일련의 연결고리를 실감나게 풀어낸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범이 전후 44년 동안이나 일본 천황으로 최고 권좌에 앉아 천수를 누리게 한 것은 인류의 양심에 역행하는 처사라는 것, 부도덕한 과거의 명쾌한 청산 없이 역사발전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 사회의 '친일 청산문제'를 새삼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 책(Hirohito Behind the Myth)을 쓴 에드워드 베르는 아카데미상을 받은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의 원작자로, 만주국의 괴뢰황제 푸이의 생애를 쓰기 위해 취재하다가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이 새삼 가공할 정도라는 사실에 경악하고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치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드라마를 엮어 가듯이 히로히토의 부도덕한 면모를 남김없이 천착하고 있다.

"2차대전의 공동 정범 히틀러와 히로히토는 어떤 차이로 한 사람은 자살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후에도 44년 동안이나 세계적인 평화의 지도자로, 경제대국 일본의 최고 통수권자로 행세할 수 있었을까.”

저자 에드워드 베르는 이런 의문에 초점을 맞추고 흔들림 없이 대하 다큐멘터리를 끌고 간다. 국제전범재판소의 방대한 기록과 생존자 인터뷰, 미국무성 자료를 섭렵 활용하는 한편 히로히토의 옥새관(玉璽官)이었던 기도 고이치(木戶幸一)의 일기, 당시 육군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彬山元)의 메모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조명을 비춘 것은 획기적인 시도로 보인다.

베르는 이런 근거를 토대로 히로히토가 20세기 인류에게 최대의 참상을 안겨준 '인지(認知) 범죄자'로 단정한다. 그는 확증 제시에 머물지 않고 일본 근대화가 시작된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시대를 거쳐 쇼와(昭和)시대를 열게 한 히로히토의 성장과 교육환경, 취향과 성격까지 그가 일본 국민들에게 '살아 있는 신'으로 군림하게 된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내선일체, 창씨개명 등을 성은(聖恩)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동아일보의 천황 흠모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내각과 군부의 중대 사항을 결정할 때마다 상황판단의 최종 결정권자는 천황이었다는 사실도 베르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해내고 있다.

베르는 "히로히토가 매우 영민하고 탁월한 조작의 명수였다"고 주장한다. 조선강점, 만주사변, 중일전쟁, 진주만 공격에 이르는 일련의 중대 결단을 내릴 때마다 '태도가 불분명한 성명'을 발표하거나 배후에서 수동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전후 책임 문제에 대비 "군부에 의해 조종됐다는‘조작'이 가능할 수 있는 여지들을 고의적으로 남겨두었다"는 예리한 지적이 그것이다. 그것은 히로히토가 황실 보호를 위한 사전 조치였고, 전후 일본 내각은 히로히토의 의중에 맞도록 그의 지침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것이 베르의 지적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새로운 '쇼군'으로 취임한 맥아더와 미국의 보수 진영이 반공산주의 전선의 아시아 전진기지로 일본의 활용도를 과대포장함으로써 이들이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을 면제시켜준 일등공신이었음도 확인한다.

무엇보다 "일본인들은 왜 그토록 황실보호에 집착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변이 흥미롭다. 베르는 한 심리학자의 말을 빌려 "일본사람들은 핏줄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현대화에도 일사불란하게 대처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천황과 같은 핏줄이라는 믿음, 그것이 유지되는 한 일본인들의 기질, 정체성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의 전후 처리방식이 독일과 판이할 수밖에 없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천황의 과거사에 대한 책임은 가족 내부의 비밀사항일 뿐 외부적으로 노출될 성격이 아니다. 천황의 잘못도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한다"는 국민정서가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이루어왔다는 것이다. 천황의 잘못이 곧 인류에 대한 범죄가 될 수는 없다는 편리한 사고방식, 즉 '집안 일'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천황의 전쟁범죄마저도 일본인들에게는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될 수 없다는 편리한 사고방식이다. 이런 집단심리는 '천황에 대한 일본의 본심(本心)'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이들의 공동체성과 집단주의 근원, 또는 신도(神道)주의 전통은 히로히토가 1945년 8월 15일 육성으로 읽은 '종전의 조서'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음을 본다. '종전 조서'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우리가 '히로히토의 항복 성명서'로 알고 있었던 '종전 조서'는 항복이나 패전을 말한 것이 아니라 "친애하는 충성스러운 신민(臣民)들에게!"라는 첫줄에서부터 일본 국민들에게 (포츠담 선언의 수용, 즉 終戰은) '예외적인 조치'였으며 (전쟁을 일으킨 목적은) '세계 여러 나라의 번영과 평화를 위한 노력으로 이는 선조들이 부여한 성스러운 의무'라는 것이다. 끝으로 "모든 신민은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신성한 강토의 영속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대를 이어 한가족처럼 결속을 다져야 할 것입니다. 미래 건설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세계 발전에 맞추어 제국에게 주어진 영광을 고양시킬 수 있도록 단호한 결의로 매진합시다." 격려와 분발을 촉구한 이 연설문이 우리가 알고 있는 히로히토의 태평양전쟁 '항복 성명'이란 말인가.

히로히토의 '종전 조서'는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전문이 게재되었지만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 나라 언론에는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다고 한다.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고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친절한 식민사관에 입각한 교육정책 덕분에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히로히토가 항복방송을 했다"는 것으로 교육받아 그것이 진실인 양 철석같이 믿어왔다. 혹시 조선, 동아가 그렇게 세뇌해왔기 때문은 아닐까. 히로히토 성명은 슬픔에 빠진 가족을 위로하고 분발케 하려는 어버이 천황이 신민(臣民)들에게 보내는 격려문일 뿐이다.

전범 히로히토를 명쾌하게 정리, 단죄한 베르의 '고발'은 우리의 친일문제 청산에서도 참고할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 동아일보가 벌여온 친일행각을 민족 앞에 사죄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애국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친일 사주가 독재권력에 빌붙어 족벌언론으로 부당한 이득을 누려온 악행까지도 '집안 일'로 침묵하고 있는 산하 언론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행적을 단 한 번도 반성하지 않은 채 남들에게 사회 정의를 주장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친일 청산문제의 어려움을 시사하기도 한다. 친일 반민족 반통일 신문 조선, 동아일보가 왜 과거의 친일행적에 대한 사죄나 반성이 불가능한 것인지, 우리는 군국주의 일본의 짙은 그림자를 히로히토를 통해 떠올려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남들에게는 죄가 될 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안 일'에 불과하다"는 사고방식, 이런 보편성이 결여된 가족공동체의 집단 이기주의가 독재를 강화시키고 군국주의 발호를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계초 방응모 선생의 장남 재선 씨가 부도덕한 사촌이 탈세로 교도소에 가는 것을 보면서 '부친의 친일 행적에 대해 사죄했다'는 소식을 이번 민간법정을 통해 들으면서, 조선일보가 '친일 반민족 반통일' 시각을 하루 속히 버리고 '민족의 언론'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기원하면서 개과천선에 한 가닥 희망을 가져본다.


히로히토 - 신화의 뒤편

에드워드 베르 지음, 유경찬 옮김, 을유문화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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