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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담배연기, 브라운관을 점령하다
시청자가 소파에 누운 상태로 원하는 채널을 손쉽게 선택할 수 있게 만드는 권능을 부여하는 리모콘. 그래서 혹자는 리모콘을 현대 최고의 문명의 이기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그러나 필자는 지난 주말 저녁 이 문명의 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묘한 현상을 체감해야만 했다.
어두컴컴한 장소에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커멓게 썩어 들어간 폐부가 서서히 클로즈업되면서, 심각한 음향과 함께 아나운서가 담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는 순간. 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필자는 리모콘의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나 이미 그 화면에서는 기형아 출산율 증가라는 서식이 뜨면서, 모자이크 처리한 어느 아주머니가 나와서 자신의 흡연경험을 안타까운 목소리로 고백하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리모콘을 돌린 필자의 눈에는, 골목길 한켠에서 몰래 담배를 피고있는 십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방송 삼사의 공통된 주제가 리모콘이라는 매체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러고보면 정치, 경제에 관련된 큼지막한 이슈를 제외한다면 최근 가장 큰 화제중 하나가 바로 이 '금연'이라는 주제. 게다가 주말의 황금시간대까지 주요채널이 한 목소리를 내게 할 정도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한 노 코미디언의 한 서린 충고까지 힘에 얻고 연일 상종가를 울리고 있는 대중매체의 담배 사냥. 그러나 이러한 대중매체의 담배 죽이기의 이면에는 단순한 방송의 공공성 이상의 기묘한 매커니즘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과민반응일까?
담배가 나쁜 것은 사실인데
신년이면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새해의 결심' 목록중 상위권을 차지하곤 하는 것이 '담배끊기'. 사실 요즘 시대에 담배가 건강에 유해하다, 라는 명제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흡연 행위가 일으킬 수 있는 유해성 혹은 담배 자체에 대한 특성에 대한 객관적 보도는 사실 문제될 것이 없다. 그것은 방송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 중 하나인 '사실의 전달' 과 더불어 '사회적 공익'을 충족시키는 긍정적인 행위일 테니까.
그러나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방송은 더욱 이중적이고 비열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공인(?)된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또 다른 악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나 할까.
만능열쇠가 되어 버린 담배
국민의 건강을 위한 금연, 그 위대한 공익성이 드러나는 방송, 그것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 뒤집어 말하면 금연이라는 모토 아래서는, 선정적이고, 비 논리적인 방송도 용서받을 수 있다. 이 논리가 최근 방송사 측의 모토로 자리잡고 있다. 내장까지 드러나는 수술 광경, 시꺼멓게 변색된 폐부. 이러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이 여과없이 방송될 수 있는 것은 그 대상이 흡연행위의 폐해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기형아 출생률이 증가되었다는 자막이 큼지막하게 떠오르고, 이어지는 '모자이크' 처리된 출산모의 안타까운 목소리의 인터뷰. 이쯤 되면 흡연이라는 행위가 기형아 출산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논리적 의도가 깔리는 셈. 좀 더 시청자에게 감정적 충격을 주기 위한 의도적 영상 배치인 것.
결국 방송사는 담배라는 소재를 통해 묵시적인 면죄부를 획득한 것이다. 청소년의 탈선을 그린다는 명분하에 아직 어린 아이들의 반쯤 벌거벗은 모습을 화면에 보여준다거나, 멀쩡하게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흐릿한 컷으로 잡아내서 이상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기존의 방송의 모습과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단지 최근 금연 방송은 좀 더 고상하고 그럴듯한 명분을 거머쥔 것일 뿐.
상업성과 공공성 그리고 비극
이러한 영상 속에는 천박한 상업성과 어설픈 공공성의 조화가 만들어낸 암울한 현대 방송의 비극이 숨어 있다. 더욱 위험한 것은 이러한 행위가 방송 자체의 선정성이라는 범주에서 그치지 않고 매서운 사회적 폭력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형아 출산율의 증가와 흡연 여성 임산부의 미묘한 영상의 결합은, 여성과 흡연이라는 고질적인 논쟁의 재순환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당연히 이 이면에는, 여성의 희생의 강조라는 사회적 폭력의 시각이 내재되어 있고, 방송은 이를 더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십대가 담배를 피고 있는 모습을 흐릿한 컷으로 잡아낸 것 또한 같은 맥락. 과연 담배를 피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바로 문제아가 되는가? 하지만 영상에서는 그들이 문제아라는 다양한 코드를 제공한다. 어두운 골목, 바닥에 널브러진 수수께끼의 병들. 그리고 우리는 방송이 제공한 코드를 통해 흡연을 하는 십대는 문제아라는 상투적인 논리를 습득한다. 정작 당사자인 십대는 할말이 없을까? 방송은 이미 십대를 흐릿한 영상 속에 가두어 버렸다. 의도된 것이건, 아닌건간에, 이것 또한 무서운 폭력이다.
이러한 영상은 우리들 사이에 일종의 편견을 만들고, 묵시적인 폭력을 생산한다. 흡연에 대한 방송사의 폭력적이기까지 한 영상은, 결국 흡연자와 비흡연자간에 존재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인된 선정성으로 무장한 방송은 흡연자에게 비공식적인 마약중독자라는 기묘한 연결 고리를 채워 넣는다. 그리고 흡연은 무조건적인 '악'으로 규정되고, 흡연자는 머릿수만 다수인 소수로 전락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결국 흡연자와 비흡연자 사이에는 노골적인 증오의 벽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양자간에 합리적인 의사소통은 단절되고, 이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도 제자리를 멤돌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방송의 공공성과 상업성의 어설픈 결합이라는 비극 아래서 태어난 사생아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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