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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꿈꾸고 노래한다. 정치가는 자신만의 사회의 비전을, 종교인은 신앙의 낙원을, 철학가는 논리적인 이상의 세계를, 사업가는 돈이 넘치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의 수많은 신념과 이론들은 모두가 그들의 유토피아를 향해가는 과정을 이야기할 뿐이다. 유토피아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진정 그들이 원했던 유토피아가 달성된 이후의 세상은 행복하기만 것일까?
키리냐가의 저자인 마이크 레스닉은 교묘한 우화를 통해 이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서구인들의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아프리카 대륙에는 온통 도시로 가득하게 된 미래의 어느날, 외국유학까지 다녀온 키쿠유족 지식인 코리바는 정부에 요청해 키쿠유족의 낙원 '키리냐가'를 건설할 것을 허락받는다.
그곳은 과거에 키쿠유족이 살아온 환경을 인공적으로 재현한 공간. 그곳에서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은 과거의 전통을 고수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들은 그곳에서 필요한 만큼만 거두어들이며,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몸을 가눌 수 없게 되면 스스로 하이에나의 먹이가 되며, 소박한 삶을 영위해나간다.
이러한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거부한 문명의 힘이다. 코리바는 자신의 움막 안에서 컴퓨터를 사용해 소행성의 기후를 조정하며, 유지위원회와 연락을 유지한다. 그는 키리냐가의 창조자인 동시에, 그가 배척한 문명의 수혜자인 셈이다.
그러나 코리바는 그가 진정한 유토피아의 상태였다고 믿는 그 상태를 유지해나가기 위해 기지와 재치를 발휘하며 최선을 다한다. 그의 방법은 단 하나, 그들의 문명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와의 완벽한 차단을 이룩하고, 내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새로운 발상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의 방법론은 결국 한계에 부딪혀 있었다. 세상은 역동적인 것이고, 거대한 외부의 세상에 비해 그들의 소행성은 너무나 작고 연약했다. 여자는 글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안 영특한 소녀는 코리바를 설득하고, 그에게 저항한다. 그리고 결국 절망한 그녀는 죽음을 선택한다.
외부의 세계에 마음을 빼앗긴 코리바의 제자 은데미는 그의 스승 코리바를 버리고 떠나버린다. 부족민들에게 전지전능해 보이는 능력을 지닌 외부세계의 의사의 도래만으로 키리냐가는 너무나 쉽게 붕괴해버리고 만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리고 변화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바로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의 유토피아는 참으로 허무한 존재이다. 유토피아, 궁극적 이상향은 그것이 성취되지 못했을 때 유토피아로서 군림할 수 있다.
유토피아가 성취되었을 때, 그것이 우리의 세상이 된 이후에는 결국 유토피아도 수정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할 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새로운 이상향이 될 수 없다. 변화를 거부하고 기존의 유토피아를 고수하는 이는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새로운 이상향>을 거부하는 존재로 기억될 수 있다. 이미 인류는 이러한 일들을 너무나 많이 경험하지 않았는가.
SF소설 '키리냐가'는 질문을 던진다. 세상에 그대가 상상해왔던 세상이 도래한다면 그 세상 그대로 만족할 수 있겠냐고. 하지만 바로 대답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책의 부제처럼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존재했던, 잃어버린 유토피아에 관한 우화>를 노래할 뿐이다.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세상에는 문명에 대해 논하는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나왔다. 신간으로는 부족했던지 기존의 책들이 다시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열기가 잠잠해졌지만, 당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이 바로 이 책. 세상의 이상향으로 존재하는 문명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입장과 현실의 관계가 묘한 우화의 구조를 통해 제법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다면 너무 심한 속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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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냐가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열린책들(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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