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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사회운동에 열심히 참여하시던 어느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정의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힘이 승리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었다. 당시 "정의는 언젠가는 승리한다"는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있던 나는 "힘이 승리한다니, 그렇다면 힘없는 자들은 끝까지 그 억울함을 풀 길이 없단 말인가?"하는 반발심이 일었었다.
하지만,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 소망에 지나지 않았던가를 알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왜냐면 현실에서 "정의"는 매번 힘있는 자들에 의해 맥없이 짓밟히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라인홀드 니버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윤리학의 거장 중 한 사람이며, "기독교 현실주의" 혹은 "정치적 현실주의"를 주창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이 책에서 "권력은 권력에 의해서만 도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권력 없이 정의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양심에 과도한 신뢰를 보이는 시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축하였다.
"제국주의의 형태로거나 계급 지배의 형태로거나 집단적 힘이 약자를 착취할 때, 그것에 대항해서 다른 힘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세력은 결코 꺾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만일 양심과 이성이 이 투쟁에 끼여든다 해도, 이것은 저 세력을 규제할 뿐이지 그것을 파멸시키지는 못한다"(8~9쪽)
이를테면, 개인은 본래 지니고 있는 그 동정심과 헤아림으로 도덕적일 수 있으나, 그것이 사회 집단일 경우에는 "자기 초월 능력"이 보다 적기 때문에 더 많은 무제한의 이기심을 보인다는 지적이다.
가령, 고문 기술자들이 민주 인사들 붙잡아다가 그야말로 야만적인 고문을 자행하고서도 집에 돌아가면 자식들에게 다정 다감한 아버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한 국가나 계급에게 동정심과 자비를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니버는 이러한 국가나 계급 집단의 이기심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 도덕적·합리적 설득과 더불어 불가피하게 폭력이나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집단 간의 관계는 언제나 "윤리적"이라기보다는 압도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는 그칠 줄 모르는 집단 이기주의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 사회가 무엇보다 경청할 만한 내용이 아닌가 싶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근 미국의 오만한 패권주의에 의해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우리에게 이미 고전이 된 니버의 이 책은 다시금 음미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니버는 개인이 그렇듯이 모든 사회 집단도 생존 본능을 지닌다고 한다. 하지만, 집단은 생존 본능을 넘어서는 팽창적 욕망을 가지고 있어서 생에의 의지가 곧 권력의 의지가 된다고 보았다. 그가 사회 집단에 비해 개인의 도덕적 가능성을 더 높이 두고 있을 뿐이지 개인의 부패한 본성 자체를 망각한 게 결코 아니다.
그는 "가장 이성적인 사람들일지라도 그들 자신의 이해 관계가 걸려 있을 때는 결코 이성적이 아니다"라면서, 인간 양심의 허약성을 통찰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종교의 '인간은 별수 없는 죄인이니 절대자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식의 "패배주의와 이원론적 입장"에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 이것은 현실을 도외시하는 무책임한 종교 논리라는 것이다. 무책임한 종교적 논리에 대해 그의 다음과 같은 예리한 표현이 가슴에 와 닿았다.
"종교는 생의 활을 너무 당기어 활줄이 끊어지거나(패배주의), 그렇지 않으면 표적을 지나쳐 쏘거나(열광주의와 금욕주의) 한다.(88쪽)
니버는 이처럼 종교가 가지기 쉬운 잘못된 편향을 지적하면서도, 종교의 사회에 대한 긍정적 의미의 기여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즉 사회 정의에 대한 모든 순수한 열정에는 언제나 종교적 요소가 있는데, 종교는 정의의 관념을 사랑의 이상으로 부풀리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종교는 정치적-윤리적 이상인 정의의 관념이 윤리적 요소를 씻어버린 순전히 정치적인 관념이 되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그는 "초합리적인 종교의 희망과 열정 없이는 어떠한 사회도 절망을 극복하고 불가능에 도전할 용기를 가지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올바른 사회에 대한 환상은 그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동되고 접근될 수 있는 불가능한 환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니버는 니체가 기독교를 약자가 도덕적 이상들(온유, 용서)을 강요함으로써 강자들에게 덮어씌워 복수한 노예들의 반란으로 보았듯이, 맑스주의 또한 낮은 자의 덕이 아닌 그들의 지위를 향상시킨다는 의미에서 또 다른 종류의 노예 반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다"는 맑스주의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묵시문학적이라고 보았다. 요컨대 그는 맑스주의와 기독교 양자가 다 절대적인 것의 실현을 기대하기 때문에 종교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1932년, 공산주의가 한참 팽창해 가던 당시에 그는 자신이 사회주의적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미 그 한계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그의 말들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모든 사람이 공동의 사회적 변천으로부터 아무런 제지도 받음이 없이 '자기의 필요에 따라' 취할 수 있는 이상 사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은 완전히 인간 본성의 한계를 무시한 것이다. 사람은 최소한의 필요 이상으로 그 욕구를 확대할 수 있는 충분한 사상력을 가졌고, 또 다른 사람들의 필요보다 자기의 필요의 압력을 더 많이 느낄 만큼 이기적이다"(207쪽)
"종교적 및 정치적 이상주의에 있어서의 절대주의는 영웅적 행위의 훌륭한 자극제이지만,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위험한 안내자인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는 부조리를 허용하고, 정치에 있어서는 잔인성을 허용한다."(210쪽)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적 사회주의의 덕과 악덕의 대조가 그러하므로 그 둘 사이의 순수하고 합리적인 도덕적 선택이란 전혀 가능하지 않다. 어떠한 판단을 하든지 그것은 일부분 개인적 경향 즉 전통적인 부정의 일부분을 존속시키고 싶어하거나, 낡은 부정의를 타파하려고 하면서 도리어 새로운 부정의를 만드는 모험을 하든가 하는 것이다. 그 판단들은 일부는 사람이 사회적 폐습으로부터 고통 받는 정도에 따라 다르고, 또 일부는 사회가 처해 있는 위기의 정도에 의해서 결정된다"(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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